경제이야기

-* 인문학이 보는 경제학의 맹점 *-

paxlee 2009. 1. 17. 11:34

 

                 오만의 끝은 파멸, 탐욕의 끝은 자멸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이번 경제위기는 외부 타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난 25년간 미국이 주도해온 시장체제, 시장 세계화, 신보수 경제정책 등 금융자본주의 체제 내부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시장체제의 전면적인 제도적, 정책적, 도덕적, 지적 ‘실패’를 그 위기의 본질로 하고 있다.

시장은 효율적 자기 교정력을 갖고 있어서 자산·신용 평가의 오류나 관리 부실로 인한 실패는 결코 있을 수 없다던 월가의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한 것이 제도적 실패다. 그러나 이 제도적 실패는 ‘시장효율의 신화’를 맹신했던 정책 실패의 결과다.

미국 연방은행 총재를 지낸 앨런 그린스펀이 상원 청문회에서 “우리가 시장을 너무 믿었다”고 말한 것은 정책 실패에 대한 뼈아픈 인정이다. 이 실패는 또 시장의 효율만 믿고 시장의 탐욕과 타락의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했던 주류 경제학의 지적·철학적 실패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월가의 소위 ‘첨단금융기법’이란 것은 사실은 금융 카지노, 부채를 늘려 돈 먹기, 무모한 탐욕과 타락의 기법들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경제와 윤리, 시장과 윤리를 철저히 분리한 것은 이번 위기가 지닌 도덕적 실패의 국면이다. 이런 국면들을 보지 않는다면 위기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고 위기를 타개할 방책도 나오기 어렵다.

인문학적으로 보면, 모든 오만의 끝은 파멸이며 모든 탐욕의 끝은 자멸이다.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는 시장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제일주의의 오만과 탐욕이 시장의 순기능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의 목적적 가치와 삶의 수단적 가치 사이의 순위를 뒤바꿔 고통을 자초했다.

세계는 현실 사회주의의 멸망 이후 20년 만에 자본주의의 선진적 발전 형태라고 여겨진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의 종말을 보고 있다. 이것은 신보수주의적 경제체제의 종언을 의미한다. 정부의 시장 규제나 개입을 배척해온 부시 정권이 망해버린 금융회사들을 구제하기 위해 결국 국민 세금을 투입하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 미국 경제체제는 자기 손으로 자기 사망을 신고한 것이다.

대내적으로, 오바마 정권은 자유시장 체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정부와 시장의 역할을 안배하는 케인스식 중도요법을 들고 나올 것이 확실하다. 케인스 요법은 한때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출해준 전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케인스 방식은 적자 재정과 팽창예산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미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는 미국이 이번에도 그 방식으로 일자리 창출에 의한 내수 회복과 경제 회생을 잘 이루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수백만 개, 아니 수천만 개의 일자리를 인도, 중국, 기타 국가들에 내주고 부채에 의한 거품 번영을 누려온 미국이 단기간에, 전쟁 특수 같은 것도 없는 상황에서, 안정적 일자리와 유효수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그 전망은 아주 어둡다. 국제적으로, 미국의 세계 경제 주도권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미국식 자본 자유화나 금융시장 세계화에 대한 신흥 경제대국들의 규제 움직임이 대두할 수 있고, 국제통화 체제에 대한 그들의 발언권도 높아질 것이며, 미국식 자유무역주의에 의한 시장 세계화는 더 치열한 저항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보수주의가 갖고 있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의 건강한 부분들을 거의 몽땅 내버린 것이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착각은 시장만능주의로 사회를 완전히 재편하고 경제논리로 사회를 유효하게 이끌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시장만능주의 체제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주의와 국가의 역할 증대라는 두 극점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가면서 한쪽이 실패하면 다른 쪽으로, 다른 쪽의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반대쪽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운영되어 왔다.

미래의 자본주의는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이런 주기적 이동 대신 두 방식의 상시적 공존과 협상에서 체제유지의 해법을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당장 확실해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가 방향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방식대로 더는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규제 없는 시장은 반드시 타락


시장은 만능이 아니다. 규제 받지 않은 권력이 부패한다면 무규제의 시장은 반드시 타락한다. 시장만능주의나 경제논리만으로는 결코 사회를 지탱할 수도 발전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 데는 경제논리보다도 공존의 정의에 따른 사회논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돈은 행복을 결정하는 열 가지 열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 사회는 성장과 개발에 대한 거의 종교적 수준의 숭배를 버려야 한다. 정부와 기업은 국민에게 허황된 부의 환상을 심어주거나 ‘부자되기’의 수사로 사람들을 자극하는 일보다는 성실한 노동에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는 일, 임시 땜질식 비정규직 창출보다는 교육, 연구개발, 서비스, 복지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라도 안정된 일자리를 늘려나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일자리의 안정화와 생활임금의 보장 없이 내수 확대는 불가능하다. 이른바 주류 경제학은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은 경제 각료와 참모들에게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라고 물었는데, 이는 경제학자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것은 의도한 것과 생판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이른바 ‘반대효과의 원리’에 대한 상상력이 경제학자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문학이 이미 3000년 전부터 사용해온 ‘아이러니’는 바로 반대효과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다.

인간과 사회에 가장 중요한 본질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환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시장제일주의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 본질적 가치를 내팽개치는 체제다. 돈이 안 되면 갯벌도 없애고 나무도 잘라내고 상품가치가 미약하면 인간도 무시한다.

지금의 위기는 이런 근시안적 사고와 전도된 가치관이 초래한 체제적 실패다. 인간과 사회는 주류 경제학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불확실하고 항시적인 예측불가성 앞에 노출되어 있다. 인문학적 사고는 이런 복잡성, 모순성, 불확실성, 예측불가성에 대한 상상력 훈련이다.

이 훈련은 사회적으로 너무도 중요하다. 그 훈련 없이는 사회는 집단사고의 오류에 빠지고, 대안에 대한 상상력은 고갈되며,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패러다임 전환에 필요한 창조적 사유는 마비된다. 인문학적 정신이 비판과 이견, 사상과 표현의 자유, 다양성과 관용을 중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경제 위기에 대한 직접적인 해법을 내놓는 것은 인문학이 할 일이 아니지만 그 해법의 근본적 모색방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발언권은 인문학도 갖고 있다. 월가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들이 누린 연간 소득은 미국 근로자 평균 소득의 370배 이상이다. 어떤 사회도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경제체제를 원하지 않으며 열 명 중 한 사람만 잘살고 아홉은 거지가 되어야 하는 체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건 너무도 간단하고 자명한 진실이다.

소득의 평등을 부단히 확대하는 일, 이것이 향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정치경제적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위기에서 보면 실패의 책임자들은 국민에게 막심한 고통만 안기고는 어떤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보석’되었는데 이제 세계는 사회적 책임으로부터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시장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문제를 자본주의 문명의 대과제로 새삼 발견하고 있다.
- 글 / 도정일 1941년생. 경희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미 하와이대 문학박사.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역임. 현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대표. 저서로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외 다수.

 - [인문학자 10人 세계 경제위기 본질을 말하다] / Economist 972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