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이야기

-* 가문의 혈관에 와인이 흐르는 가족기업 26대(代) *-

paxlee 2010. 3. 2. 21:16

 

                 가족기업 26대(代)… 이 가문 혈관엔 와인이 흐른다

 

이탈리아 와인名家안티노리 후작 인터뷰
세계 1위 오른 '솔라리아 1997'주인
"와인 비즈니스는 10년 내다보면서 맛을 디자인하지요"
"美대륙 발견 100년 前부터 와인사업 기적의 비결은 열정·인내·끈기입니다"

 

"우리의 DNA에는 인내가 들어 있습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인 명가(名家) 안티노리의 사주인 피에로 안티노리(Antinori·71) 후작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인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사나이 앞에서 인내를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늘 인내를 벗 삼아야 하는 와인사업을, 무려 26대에 걸쳐 가업으로 전해 내려오는 안티노리 가문의 계승자이니까.

"와인 비즈니스는 대자연(Mother Nature)에 의존합니다. 올해 수확한 포도가 안 좋으면 다음해, 그 해도 아니면 또 그다음 해를 기다립니다. 어떨 때는 모든 것이 다 잘됐는데, 수확하기 이틀 전에 우박이 와서 망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죠. 시간을 자기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요."

안티노리 가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 기업의 하나로 꼽힌다. 와인사업에 처음 뛰어든 것이 12세기다. 1385년 피렌체 와인 생산조합에 가입한 것을 공식적인 출발로 꼽아도 역사가 600년이 넘는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침공을 비롯한 여러 전쟁과 흑사병, 그리고 소비자의 변덕까지도 모두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

르네상스가 일어난 피렌체(영어로는 플로렌스)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안티노리 가문은 현 사주인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이 25대이며, 26대인 세 딸이 아버지와 함께 와인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후작으로 부르는 것은 1861년 선조 니콜로 안티노리가 이탈리아 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후작(Marchese) 작위를 받아 세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가문의 문장에 넣을 좌우명으로 채택한 것이 '뛰어난 품질을 추구하라'였다. )

안티노리 후작은 이탈리아 와인의 르네상스를 이뤄낸 인물로 꼽힌다. 이른바 '수퍼 토스카나(Super Toscan) 와인(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고급 와인의 애칭)'의 효시로 불리는 티냐넬로(Tignanello)와 솔라이아(Solaia)를 내놓았다. 솔라이아 1997 빈티지는 지난 2000년
미국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로부터 세계 100대 와인 중 1위에 선정됐다. 이탈리아 와인으로 1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미 대륙이 발견되기 100년 전부터 와인 사업을 해왔다고 하면 미국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안티노리 후작은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뒤편 창 너머로 페블비치의 파도가 석양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 전 세계 골퍼들의 로망인 페블비치 골프장에 이탈리아 식당인 페폴리를 열었고, 오늘은 그 10주년 기념행사(와인 시음회와 만찬)가 열리는 날이다. 기자는 이 행사에 초대받아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그와 한 테이블에서 만찬을 가졌다.

전문가들은 안티노리 가문과 같은 가족기업이 전 세계 기업 중 65~80%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가족기업이 대를 이어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기간에 가족기업이 생존하는 비율은 3분의 1에 불과하며, 그 생존기업의 12%만이 3세대에 살아남는다. 또 그 3세대 생존기업의 3~4%만이 4세대까지 살아남는다. 무려 26대에 걸쳐 하나의 가업을 이어온 것은 거의 기적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 가족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치가 있었어요. 오랜 세월 아버지에게서 아들, 딸들로 내려오는…."

안티노리 후작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가치는 모두 알파벳 P로 시작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P는 열정(Passion)입니다. 이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P는 인내(Patience)입니다. 우리 같은 사업에서 이것은 절대적이죠. 포도를 심은 뒤 10년은 지나야 좋은 품질의 포도를 수확할 수 있고, 와인을 만든 뒤에도 좋은 맛을 낼 때까지 2~3년 숙성해야 하니까요. 세 번째 P는 끈기(Perseverance)입니다. 어느 한 해 빈티지가 나쁘면 실망해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우리 사업의 특성이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생각합니다. 이는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죠. 그들은 한 해, 심지어 한 분기를 바라보며 일하니까요. 애널리스트들이 원하니까요.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사업은 불가능합니다. 다음 P는 긍지(Pride)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가업을 이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긍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과거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기업

안티노리 후작은 열정적인 마케터였다. 작위를 갖고 있는 그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P에 대한 설명이 끝났나 싶어 다른 질문을 하려 했더니 그는 "다른 P도 있다"면서 웃으며 제지했다.

"물론 사업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P가 또 있어요. 바로 이윤(Profit)입니다. 왜냐하면 이윤 없는 회사는 머지않아 문을 닫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겐 이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업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윤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의 P는 완벽(Perfection)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정확하고 엄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P로 시작하는 그런 가치들에 대해 실제로 선조들이 가르쳤나요?

"16세기 초반 한 선조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장이 전해져 옵니다. 거기엔 재산 분배에 관한 것 이외에도 그가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가치관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말했던 내용들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과거 우리 가문은 좋은 시대도 겪고 나쁜 시대도 겪었죠. 그리고 가문엔 좋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대에 한 사람은 늘 가족의 가치를 지키고 책임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행운이었군요.

"(웃으며) 맞습니다. 큰 행운이었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가문의 이름이 브랜드가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되죠. 그것은 결코 코카콜라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이자 안티노리 가문의 뿌리인 피렌체의 안티노리 본사(안티노리 궁전이라고 부른다)에서 포즈를 취한 안티노리 후작. 뒤쪽 돔형 지붕이 있는 건물이 영화‘냉정과 열정 사이’에 등장해 유명한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고, 그 옆의 높은 탑은 지오토의 종탑이다. /안티노리사 제공


―가족기업은 종종 분쟁을 겪곤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도 하죠. 안티노리 가문은 어떻게 이것을 극복했나요?

"한 가지 설명은, 과거엔 일종의 분업체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15,16세기엔 가족 중 어떤 이는 가업을 물려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군대에 가서 장군이 되고, 교회에 가서 성직자가 됐습니다. 메디치 가문도 두 명의 교황을 배출했지요. 그래서 분쟁의 소지가 적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군대나 교회에 가는 경우가 드무니까요. 특히 가족이 많을 경우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제 가족은 저와 세 딸뿐이라 큰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와 가깝게 지내는 페라가모(Ferragamo) 가문은 우리처럼 오래된 가문이 아니고 제 아버지 대에 창업했지만, 후손이 50~60명에 이르러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들에게 해결책 중 하나는 상장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주식을 나눠 갖는 거죠(페라가모 가문은 몇 년 전 상장을 추진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무산됐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업에는 좋은 해법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사업은 장기적 관점이 필요한데, 주식시장 애널리스트들은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와인사업은 증시에 상장한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그 드문 사례 중 하나가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하단 관련 기사 참고)였는데, 그 결과는 불행히도 좋지 않았습니다. 가족에게도 기업에도요.

따라서 와인사업의 경우 해법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내게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겐 오직 딸 셋이 있을 뿐이고, 셋 모두 일을 잘하니까요. 종종 문제는, 가족 중 어떤 이는 사업에 참여하고, 다른 이는 참여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하지만 제 세 딸은 모두 사업에 간여하고 있고, 같은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수가 적어도 의견이 다르면 분쟁이 생기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제 손자 대에 생길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손자 중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에 간다면, 이탈리아에서 교육받는 것과 달라 다른 비전과 미래관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있고 다른 교육을 받더라도 늘 가족이란 느낌을 호흡함으로써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겠죠. 가족의 뿌리를 잊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자긍심의 출발이죠."

■혁신

가족기업은 숙명적인 짐이 있다.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덕목을 모두 이뤄야 한다. 전통이 없이는 가족기업이라는 계속성이 훼손되고, 그렇다고 전통에만 매여 혁신하지 않으면 기업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혁신을 이뤄낸 모델 케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약관 20대의 그가 가업을 물려받았을 때 이탈리아 와인은 생산량으로는 전 세계 1위의 와인 대국이었지만, 품질 측면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안티노리 후작은 최고급 와인을 만들기 위해 혁신적인 시도들을 벌인다. 그는 새로운 포도 재배, 와인 블렌딩, 숙성 기술을 도입했고, 마케팅·유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쇄신했다. 포도 농장 쇄신의 핵심은 넓은 농장에 다른 작물과 혼작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바꿔 포도만을 집약적으로 심은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포도 농장을 전부 갈아엎어 뿌리까지 다 파내 버렸다. 그는 또한 외국의 포도 품종들을 수입해서 심으며 다각도로 연구했다.

그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남들이 모두 가는 편한 길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비롯됐다. 안티노리의 주력 포도밭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주도가 피렌체이다)의 키안티 클라시코라고 불리는 지역에 있다. 이곳에서는 고유의 포도 품종인 산지오베제를 주로 사용하고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따라 생산한 와인에 높은 등급을 부여하며, 그에 위배될 경우 등급에서 탈락시키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안티노리 후작은 이러한 관례를 과감히 탈피해 외래 포도 품종이지만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산지오베제에 블랜딩해 티냐넬로라는 와인을 만들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접목한 것이다. 그는 화인트와인 품종을 일부 블랜딩해야 한다는 룰도 어겼다. 1971년의 일이다. 그리고 1978년에는 까베르네 소비뇽 비율을 크게 높인 솔라이아를 내놓았다.

이 와인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최고 등급을 받지 못했고, 가장 하위 등급을 받고 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등급과는 무관하게 이들 와인은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이탈리아 와인 중 최고급 와인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에 고무받아 이 지역에서 비슷한 와인들이 계속 출시되기 시작한다.

안티노리의 대표적 와인들. 왼쪽부터 솔라이아, 티냐넬로, 페폴리.

―그런 과감한 혁신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회사를 물려받은 1960년대 말 토스카나는 물론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도 와인사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와인의 질은 낮았고, 그 명성과 가격도 함께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멈춰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고의 와인을 만들던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을 다녔고, 미 캘리포니아도 다녔죠. 캘리포니아는 품질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두 위대한 인물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에밀 페이노(Peynaud) 보르도대 교수입니다. 현대 와인 양조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가 우리에게 자문을 해준 것이 큰 힘이 됐지요.

또 한 사람은 로버트 몬다비였습니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에서 보듯 도전정신이 충만한 곳입니다. 늘 보다 나은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캘리포니아의 혼이고, 몬다비는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죠. 당시 미국에 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저는 새로운 아이디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머리에 가득 차곤 했어요.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오면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았죠. 그런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 1971년에 내놓은 티냐넬로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회사는 물론,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와인산업 전체에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안티노리 후작의 롤 모델이 됐던 로버트 몬다비의 와인회사는 두 아들의 불화와 기업 공개의 후유증으로 경영난을 겪다가 2005년에 다른 회사에 매각되고 만다. 새삼 26대를 내려오는 안티노리 가문의 저력을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룰을 깨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기존 와인 제조법과 다른 여러 실험의 결과로 새로운 와인(티냐넬로)을 만들게 됐을 때 저는 주저했습니다. 기존 원산지 표기 규정에 부합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와인을 마케팅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루이지 베로넬리(Veronelli)라는 분과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됐습니다. 그는 작가였고 최초의 와인 평론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 와인을 테이스팅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극찬을 했습니다. 그는 '걱정 마라. 원산지 표기는 잊고 그냥 출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감을 얻고 공격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결정을 주저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죠. 그럴 때 늘 그렇듯 누군가가 와서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밀어붙이곤 합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군요.

"그렇습니다. 훌륭한 사람과 의견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것은 큰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죠."

안티노리 후작은 좋은 인재를 보는 눈도 가졌다. 현재 안티노리사의 CEO인 렌조 코타렐라(Cotarella)는 프랑스의 미셀 롤랑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와인 메이커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안티노리가 없었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그는 1979년 파트타임 사원으로부터 출발, 31년간 안티노리사에서 일해 안티노리 후작과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다. 안티노리의 세 딸과도 잘 통한다. 안티노리 후작은 그를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표현하면서 세 딸에의 경영권 승계도 코타렐라가 있기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부

―사람들은 보통 부자가 된 뒤에는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꺼리고, 보다 점잖아 보이는 직업, 예를 들어 금융업 같은 일을 택합니다. 그러나 와인 제조업자로 있는 한 손이 늘 더러워지기 마련인데….

"저는 농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제품이 땅과 흙에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와인이 아니라 다른 모든 비즈니스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잘하려면 사업의 모든 측면에 간여해야 하죠. 저는 20대 초반 이 사업에 처음 몸을 들여놓으면서 남부 이탈리아 지방의 세일즈맨으로 출발해 몇 년을 일했습니다. 당시엔 세일즈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말입니다."

그는 "일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한때 영국 회사에 팔았던 주식 지분을 다시 사들인 것을 꼽았다. 그에겐 아들이 없고 세 딸 뿐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딸이 사업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는 가업이 자기 대에서 끝날 것을 우려했고, 사업의 영속성을 위해 기업 공개를 추진했다. 그래서 그는 1983년 가문이 보유한 지분의 49%를 영국 맥주회사 휘트브레드에 팔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딸들이 와인 사업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식을 팔았던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팔았던 주식을 1991년에 어렵사리 되사들였다. 그러나 세 딸의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하고 경영권을 어떻게 승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 가업을 잇는 딸에게 안티노리 성(姓)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 상속에 얽힌 여러 문제는 앞으로 안티노리 후작에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와인은 10년 후를 내다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포도를 심고 재배하면 10년 후에 어떤 와인이 나올지 볼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판단하고 예측하는 것은 우리 일의 일부이니까요. 물론 종종 실수도 하지만요. 우선 우리는 테이스팅을 통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다음엔 분석을 합니다. 어떨 때는 실망하지만, 어떨 때는 긍정적인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많이 있어요. 기후에 따라서도 달라지죠. 하지만 만일 모래 섬에 와인 하나를 갖고 간다면 나는 티냐넬로를 택할 겁니다."

―빈티지는?

"최근 걸로는 2001년, 2004년이 좋고, 보다 최근 걸로는 2007년도 좋습니다."

―훌륭한 와인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위대한 와인을 좋은 와인과 구별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훌륭한 와인은 개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나이가 들어가며 원숙해지는 능력, 즉 숙성력(aging potential)을 갖춰야 합니다. 또한 쾌락적 기쁨과 함께 지적인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와인이 어느 땅에서 나왔고, 포도 품종은 어떤 것을 썼고 하는 역사를 말해줘야 합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처럼 와인에도 좋은 와인을 넘어 위대한 와인이 있다니 놀라웠다. 와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는 40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와인 메이커는 이 400가지 중에서 골라 맛을 건축한다. 의도하던 맛이 5년, 10년 후에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 미래를 내다보면서 맛을 디자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와인은 고도의 예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단 한 번 맛보면 사라진다는 것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작품은 미각 속의 기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 찰나의 기억을 위해 와인 메이커들은 10년을 투자하고 변덕스런 자연과 싸운다. 그래서 와인은 기자가 보기에 가장 고상하거나, 아니면 가장 사치스러운 예술이다. 그리고 안티노리 후작은 집념의 예술가인 것이다. 르네상스를 이룬 예술가들의 혼을 물려받은….

창밖 페블비치엔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렸다.

◆안티노리社는

여의도 3배 크기의 포도밭 소유 1800만병 생산해 100개국 수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최대 와인회사(이탈리아 전체 4위)로 1800만여병의 와인을 생산해 세계 100여개국에 수출한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2008년과 2009년 매출은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으나, 미국시장 매출은 2009년에 증가세를 보였다. 매출 규모는 약 1억1000만유로(약 1800억원) 정도로 일반 기업과 비교하면 영세하지만, 세계 각지에 소유한 포도밭의 재산 가치는 엄청나다. 본거지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 1764헥타르(ha)를 비롯, 미국 나파밸리, 헝가리, 칠레, 몰타에 2304ha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의 약 3배 크기다.

2008년 10월 미국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인 '60분(60 Minutes)'에 장수 가족기업으로 소개돼 미국 일반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현 사주인 안티노리 후작은 딸만 셋을 두고 있는데, 각기 총괄 부회장과 커뮤니케이션 담당 이사, 미국 시장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안티노리 가문은 모든 이윤을 회사에 재투자한다. 40년 이상 배당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가족들은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

1506년 선조가 르네상스풍 3층 대저택(안티노리 궁전이라고 부른다)을 매입, 회사 본부와 안티노리 가족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와인 레스토랑이 있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면 틴토레토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안티노리 후작이 장남으로서 가업을 물려받았을 때 그의 동생 로도비코가 언짢아하면서 600년 가업에 최대 위기가 닥칠 뻔했다. 그러나 안티노리 후작의 아버지는 밀라노에 포도주 수입상을 열고 로도비코에게 경영을 맡겼다. 자식들에게 사업을 나누어 맡김으로써 분쟁을 피하게 한 것이다. 로도비코는 뒤에 토스카나 해변에 자신만의 포도농장을 만들어 성공했다.

  - 페블비치(캘리포니아)=이지훈 위클리비즈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