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이야기

-* 칠레 와인의 꿈 *-

paxlee 2011. 1. 13. 21:18

                                  칠레 와인의 꿈

            ▲ 양조장 카사 실바(Casa Silva) 포도밭과 겨울 안데         

 지진도 갈라놓지 못한 칠레 와인의 꿈

프로젝트를 프로’헥’트로 발음하는 스페인어 권역의 칠레인들은 꿈꾸기를 좋아한다.
비아 와인(Via Wines)의 와인메이커 라파엘 티라도(Rafael Tirado)는 올해로 16년째 양조장 녹을 먹고 있다. 티라도는 몇 년 전부터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달픈 투잡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다. 퇴근하면 곧장 자신의 양조장으로 출근하고, 주말도 없다. 어떻게 월급 받아 땅을 사고 밭을 조성할 수 있냐는 의문은 무척 자연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직 칠레는 땅값이 싸다는 해답에 쉽게 도달할 것이다.

칠레의 땅값은 싸다. 유럽 와인 명산지의 1%도 되지 않는다. 프로젝트 비용은 결국 물을 끌어들이는 파이프 설치와 관개 시설을 확충하는 데 달려있다. 전통 산지 마울레 밸리가 칠레에서 가장 넓은 포도밭 면적을 지니는 이유는 비가 제법 와서 물이 많기에 별도로 돈을 들이지 않아도 포도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산티아고 근교에 있는 마이포 밸리는 강수량이 적어 관개작업을 하지 않으면 포도를 키울 수 없다. 척박하고 황량한 밭에 포도를 심지만 너무 척박하면 말라 죽어 포도 농사가 안 된다.

예리한 신맛으로 인기 있는 레이다 밸리는 10여년 전만 해도 거친 광야와 같았다. 하지만 미세 기후와 일조량 등을 놓고 투자를 결정한 양조장 비냐 레이다는 큰 자본을 들여 밭으로 변모시켰다. 비냐 레이다는 마이포 강에서 8km의 수관을 연결해오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칠레 황야에서는 물만 있으면 포도농사가 된다. 그러나 그 물을 끌어들이는 데는 엄청난 자본이 소요되니 미개척지에 개인이 나서기는 불가능하다.

       꿈을 꾸는 듯 노래하는 칠레 목동
           후아소 (Huaso).

세계를 뒤흔든 리히터 8.8의 강진이 지난 2월 27일 칠레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도 대규모 자본력에 의해 산업화된 양조장은 피해가 덜 했으며 곧 회복할 수 있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끄떡없었다. 다만 높이 쌓아둔 와인 병과 오크통 등이 피해를 입었다. 지진의 근원지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영세한 양조장들이 많은 남부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지진은 그들의 꿈까지 갈라놓지는 못했다. 마울레 밸리의 와인 양조장 카사 베르가라(Casa Vergara)의 대표 파블로는 “지진으로 인해 전기가 끊겨 수확을 앞두고 제대로 관개를 할 수 없어 수확량 손실이 15% 가량 있었지만,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 했다. 실제로 지진으로 인해 2009년 빈티지 와인의 손실이 1억 2500만 L에 달했지만, 2008년도 재고 물량도 있고 해서 수출 전선에는 큰 차질을 빚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이포 밸리의 양조장 데 마르티노(De Martino)의 와인메이커 호르단(Jordan)은 “지진으로 오크통 숙성고가 엉망진창이 되어 이제부터는 오크통을 높아 봐야 3층 정도로만 쌓지, 예전처럼 6층까지 쌓진 않는다”고 했다. 이제 양조장 구석 구석을 살펴봐도 우울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물론 지진이 잦은 탓도 있다. 필자가 머문 동안에도 강도 4.5 이상의 지진이 여러 번 관측됐다. 호텔방이 진동하는 것을 두렵게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칠레인들은 고통을 잊었으며, 2010 빈티지 양조에만 골몰한다. 오직 보험회사에 제출하기 위한 보상금 청구서 사본에만 지난 지진의 상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양조장 피해를 확인하는 카사 베르가라의 대표 파올로.

칠레 와인산업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처럼 강성해졌을까.

2009년 전체 수출액에서 와인은 2.6%를 차지하며 해마다 그 비중이 증대하고 있다. 전체 수출의 절반이 광산업인 칠레에서 와인은 아주 중요한 산업이다. 그 경쟁력은 우선 자연환경에서 비롯된다. 칠레 수출 산업을 책임지는 프로칠레(www.prochile.cl)의 대표 펠릭스 밍고(F?lix Mingo)는 “지난 20여년간 칠레 와인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했다”고 말했다. 칠레의 빼어난 환경을 믿은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국제 자본들은 직접 투자 혹은 합작 투자를 통해 양조장을 현대화하면서부터 칠레 와인의 부가가치가 제고되었다.

칠레의 긴 국토는 그 끝을 보기가 힘들지만 동서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어디에서도 국경은 분명하게 보인다. 좌청룡 우백호처럼 양쪽으로 산맥들이 도열해 있는 땅 너머가 바로 국경이다. 그러니 남북으로 달릴 때는 꼭 V자 협곡을 달리는 기분이다. 오늘날 칠레 와인 산업을 규정짓는 표현 중에 ‘포도 재배의 파라다이스’란 게 있다. 북으로 사막, 남으로 남극, 동으로 안데스, 서로 태평양, 이렇게 섬처럼 둘러싸인 칠레는 질병이 드물어 포도가 완벽하게 익는다.

물론 각종 야채, 과일 재배에도 동일한 효과를 미친다. 특히 포도에 치명적인 진드기의 일종인 필록세라는 칠레에 없다. 19세기 말 유럽 포도밭에 창궐했던 필록세라로 인해 오늘날 유럽 포도의 뿌리는 거의 대부분 필록세라에 내성이 강한 캘리포니아 산을 쓰는 신세지만, 칠레는 뿌리까지 오리지널인 포도나무를 지닌다.

하지만 땅만 바라보았다면 칠레 와인이 오늘날처럼 융성해졌을까. 역시 사람의 의지가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수출전선에서 고군분투한 사람들 덕분이다. 지난 7월 9일 프로칠레의 아시아 마켓 세미나를 시작하기에 앞서 장내는 한동안 엄숙함을 유지했다.

칠레 유명 쇼핑몰, 파르케 아라우코(Parque Arauco).

와인생산자협회(Wines of Chile)와 프로칠레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다. 더글라스 머레이(Douglas Murray). 우리 와인계에서도 친숙한 인물인 그는 몬테스의 공동창업자로 칠레 와인의 정체성조차 희미하던 시절인 1990년대 초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장 개척에 매진했다. 국내 와인시장의 베스트 셀러인 몬테스의 성공은 수입상과 더불어 그의 의지가 낳은 작품이다. 펠릭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추모했다.

“우리는 한때 그를 무모하다며 비난했고, 그가 전하는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전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마르코 폴로처럼 우리에게 아시아 시장의 매력을 전파했다.”  오늘날 칠레는 현재 세계 5위의 와인수출국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한다.

칠레 와인 산업이 더 발전하려면 한계를 뛰어넘는 활약이 한층 더 요구된다. 와인 산업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수출 주도로 이뤄진 와인 산업에는 칠레인의 일상이 많이 묻어나지 않는다. 와인은 문화지만, 칠레에서는 산업과 등식을 이룬다. 2009년 생산량의 70%를 수출하며, 국내 소비량은 지난 20년간 정체되어 있다. 와인 생산국가 중에 와인을 가장 덜 소비한다.

와인의 끝맛에는 사람의 희노애락이 묻어나야 여운이 오래 남는 법인데, 칠레 와인에는 문화적인 여운이 길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대신 진한 타닌의 여운만이 남는다. 프리랜서 투어 가이드 장 라울(Jean Rauld)은 “칠레 와인산업의 성장으로 인해 중산층의 와인 관심과 소비가 예전보다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소비자의 관심을 높이려면 칠레 와인 산업이 더 분발해야 한다. 칠레대학 후안 카를로스 엘리세르 교수는 “콘차이토로를 비롯한 와인 회사의 연봉이 낮기 때문에 좋은 인재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와인업계가 더 성장하려면 더글라스 같은 개척자들이 마케팅뿐 아니라 포도밭과 양조장 내에서도 나와야 한다. 지역 와인경쟁대회 카타도르(www.catador.cl)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와인컨설턴트 세르지오 코레아(Sergio Correa)는 “출품한 와인 중에는 나쁜 와인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와인도 드물다”고 말했다. 양조 기술의 표준화로 인해 흠 없는 와인 생산에는 성공했지만, 복합적이고 세련된 입맛을 좇는 애호가들을 끌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카르미네르의 재배 면적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칠레 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카르미네르는 최근까지도 명목상의 인기 외에는 실제적인 인기가 없었다. 만생종인 까닭에 완숙되기 힘들어 와인에서 특유의 거친 맛이 많이 났다. 애호가들이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요즘은 카르미네르의 생산량뿐 아니라 품질도 많이 향상됐다. 시행착오를 거쳐 오랫동안 익힐 수 있는 구역을 찾아낸 것이다. 포도를 완숙되게 하려면 포도밭에 더 많이 나가 돌봐야 하므로 노동비가 더 많이 든다. 칠레 와인메이커들은 ‘품질 향상을 이루면 가격 상승은 필연적‘이라고 믿으며 카르미네르를 돌보고 있다. 실제로 칠레의 최고가 와인은 양조장별로 모두 카르미네르다.

국경이 항상 코앞에 보이는 특이한 지형의 칠레인들은 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항상 안데스를 넘어, 그리고 태평양을 넘어서 세계로 나아가려는 꿈을 꾼다. 그 꿈은 와인 산지의 지도를 매년 확장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

2010년 공식지도를 보더라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새로운 산지들이 남북으로 여러 군데가 있을 정도다. 밭이 동서남북으로 계속 확장되면서, 극단적인 곳에라도 품질 향상에 도움이 되면 그들은 프로’헥’트를 시작하는 것이다.                    - 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 [조정용의 즐거운 와인세상 11] -


▶ 조정용은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이자 와인 저널리스트. 국내 와인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올 댓 와인'의 저자다. 1년의 3할 이상을 세계 와인명가 탐방에 투자하며 자료를 모으고, 직접 맛을 본 느낌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와인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는 용기를,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을 받는다. 고려대에서 ‘포도주 개론'을 강의한다. 저서로 ’올댓와인‘, ’올댓와인2‘와 ’와인이 요리를 만났을 때‘(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