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100대 명산 덕유산(德裕山 /1,614m )을 가다.[4-1] *-

paxlee 2011. 3. 21. 20:49

 

 -* 100대 명산 덕유산(德裕山 /1,614m )을 가다.[4-1] *-

 

◇ 지극히 복된 덕유산의 동편 조망. 맨 왼쪽 소뿔처럼 솟을 가야산,

    그 오른쪽으로 거창의 산들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덕유산은 동으로 경남의 가야산(1430m), 서로 전북의 운장산(1126m), 남으로 전남의 지리산(1915m), 북으로 충북의 속리산(1058m), 그 한 가운데를 우뚝 솟았다. 덕유(德裕), 덕이 넉넉하다는 말이다. 넉넉한 덕은 넓은 품으로 발현된다. 전북 무진장 고을의 무주와 장수, 경남의 첩첩 산마을 거창과 함양에 제 몸을 부리고 있다. 덕유산의 영역은 많은 사람들이 종주하는 향적봉(1614m)∼봉황산(남덕유산·1507m) 구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경전 <산경표>에 따르면 ‘삼봉으로부터 봉황산까지 모두 덕유산이다’라는 주석이 나온다.

삼봉·적상·봉황이 삼각형을 그리다

삼봉산(1254m)은 빼재(신풍령)의 동북쪽 봉우리이고, 봉황산은 남덕유의 본래 이름이다. 따라서 백두대간 덕유산의 주릉은 남쪽 육십령에서 북쪽 소사고개(도마재)까지 장장 35.9㎞에 이른다. 이 구간의 고도는 빼재를 제외하고는 1000m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덕유산을 내려보면 북쪽의 적상산(1034m)·남쪽의 봉황산·동쪽의 삼봉산이 삼각점을 이루면서 그 중심에 솟은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을 수호하는 형국이다.


백두대간이 남하하면서 덕유산이 시작되는 삼봉산은 신장봉·칼바위·투구봉·노적봉·칠성봉 등 8개의 암봉이 치솟아 있다. 대간을 타고 남진(南進)하다 보면 대덕산(1280m)에서 소사고개로 아득하게 추락했다가 별안간 치솟은 삼봉산 바위들로 인해 덕유 입성식을 톡톡하게 치르게 한다. 이 산은 사방 전망이 뛰어나지만 특히 남서쪽으로 요동치는 덕유 능선 조망이 탁월하다. 또 삼봉산 아래 금봉암 부근의 용바위는 예로부터 거창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영험한 장소다.


붉은 치마, 그 이름처럼 가을 단풍이 화려한 적상산(赤裳山)은 국가 공인 천혜의 요새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이건명은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고 성안이 넓고 평평하니, 실로 하늘이 설치한 험조(險阻)다. <실록>과 <선원첩>을 이미 모두 여기에 봉안하였으니, 결코 비워서 버려 둘 수가 없다. 지금 성첩이 무너져서 오랫동안 수리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증보문헌비고> ‘여지고’편에 나온다. 적상산 남쪽에는 ‘안렴대’라는 유명한 전망대가 있는데, 향적봉에서 뻗어 가는 덕유 능선과 진안·장수의 첩첩 산들이 장관이다.

 ◇ 북상면에서 가장 빼어난 수승대.



지극히 복된 덕유의 조망

전형적인 육산(肉山) 향적봉이 여성적이라면 봉황산은 남성적이어서 음양의 이치를 맞추고 있다. 중봉에서 바라보면 한없이 부드러운 덕유평전, 뿔처럼 솟은 무룡산과 삿갓봉 너머 신장(神將)처럼 버티고 서 있는 봉황산의 웅장한 모습을 유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 이 산을 오르고 내릴 때는 수백 개 급경사 계단을 각오해야 한다. 다시 덕유산이 양팔을 벌리면 삼봉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거칠봉(1178m), 갈미봉에서 남쪽으로 가지친 호음산(930m), 봉황산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진 금원산(1353m)과 기백산(1330m)이 모두 덕유의 품에 안기게 된다.


이렇듯 방대한 덕유산은 3개의 후덕한 계곡을 품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25㎞에 이르는 구천동 33경이다. 이 길은 제1경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시작하여 학소대(鶴巢臺)·인월담(印月潭)·금포탄(琴浦灘) 등의 숱한 소와 담을 지나 32경 백련사(白蓮寺)에서 합장을 한 후, 향적봉에서 하늘로 입적해 버리는 기묘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덕유산 서쪽 칠연계곡(안성계곡)은 용추·칠연폭포를 품고 있는 빼어난 계곡이다. 구천동과 달리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상대적으로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7개의 소와 담이 연이어지는 칠연폭포가 장관이다.


마지막으로 삿갓봉과 봉황산에서 발원하는 월성계곡은 동쪽으로 흐르면서 사선대, 강선대와 모암정을 수놓으면서 위천으로 변신한다. 또 위천이 시작되는 농산리 야산에는 잘 생긴 석조여래입상이 서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그 미소는 덕유산의 후덕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이라 했다. 덕유산 주릉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이며 금강과 낙동강 수계의 분수령이 된다. 쉽게 얘기하면 덕유산 주릉에서 서쪽 전북 땅을 향해 물을 버리면 낙동강, 동쪽 경남을 겨냥하면 금강으로 흘러가게 된다.


북쪽 구천동에서 콸콸 쏟아지는 원당천과 적상산에서 흘러오는 적상천은 남대천과 몸을 섞어 금강으로 흘러간다. 또 칠연계곡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들은 구량천이 되어 역시 금강이 된다. 주릉 동남쪽 물줄기들은 월성계곡으로 모여서 동쪽으로 흐르다 차례대로 산수리의 산수천·병곡리의 분계천·송계사의 소정천(갈천)의 물을 모아 위천이 된다. 다시 위천은 빼재의 신기천·소사고개의 황강천을 흡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또한 봉황산 월성재 남쪽 100m 아래 참샘에서 발원한 남강 역시 낙동강을 겨냥한다.

수승대를 맴도는 세 편의 시

덕유산은 남한 산줄기들의 중심에 놓인 만큼 탁월한 조망을 보여준다. 향적봉대피소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진작가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사방팔방 조망 중 특히 동쪽과 남쪽이 으뜸이다. 가야산 주변에서 떠오르는 해는 가히 남한 제일의 일출 풍경이라는 칭송이 헛되지 않는다. 이 풍경은 산국(山國) 거창의 산들이 서너 겹 깔려있고, 그 중심에 가야산이 극적으로 솟아있다.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불리는 가야산은 1430m의 높이와 여러 개의 뿔이 돋친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소머리로 주변 산들을 단숨에 제압한다.

 

가야산 바로 앞에 유독 또렷한 삼각형을 그리는 산은 단지봉(1327m)이고, 그 왼쪽 울퉁불퉁한 산이 수도산(1317m)이다. 남쪽 전망은 중봉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준다. 덕유평전·무룡산과 삿갓봉·봉황산으로 흘러가는 덕유 주릉의 흐름은 백두대간 능선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이다. 거기에다 무룡산 왼쪽 멀리 허공에는 일필휘지로 피어난 지리산 능선에 입이 떡 벌어진다. 날이 맑으면 천왕봉에서 노고단 옆 만복대까지 지리산 주릉 전체가 아주 선명하다.


모습은 원경으로 보는 '지리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특히 천왕봉은 구름이 물결쳐 바다를 이루었을 때에도 유일하게 고개를 내밀어 ‘천왕섬’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덕유산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갈천(葛川) 임훈이다. 임훈은 무룡산 동쪽 바로 아래인 거창 북상면 산수리 마학골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학골은 산수리에서 3㎞ 더 올라가고, 무룡산에서 도상거리 2㎞ 아래이므로 덕유산 아래 첫 동네인 셈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은 이곳에 후손들이 ‘갈천선생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임훈은 52세이던 1552년에 무려 3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행문 <등덕유산향적봉기>를 남겼다. ‘덕유산은 내 고향의 진산이다. 내 가족 또한 그 아래에 있다.(德裕. 吾鄕之鎭山. 而吾家又於其下.)’로 시작되는 이 기행문은 덕유산의 풍경과 주변 풍물, 지명의 유래 등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따라서 이 기행문이 덕유산에 관한 가장 방대하고 상세한 자료가 된다. 이 글에서 임훈은 덕유 주릉의 흐름을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삼봉(三峯)을 시작으로 비스듬히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대봉(臺峯), 백암봉(白巖峯), 불영봉(佛影峯·무룡산), 황봉(黃峯·남덕유산)이 이어진다고 했다.


또한 구천동의 원명은 구천둔(九千屯). 예전에 이 골짜기에서 성불공자(成佛功者) 9천명이 살아서 그와 같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오수자굴은 계조굴(戒祖窟)로 나온다. 계조굴은 백련사 스님들이 용맹정진하던 도량으로 추측되는데, 훗날 오수자의 전설이 얽히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임훈이 처음 마학골에 연 서당은 갈계리 치내마을로 옮기면서 크게 번창했다. 서당 앞을 흐르는 냇물이 갈천인데, 임훈은 그 이름을 자신의 호로 취한다. 서당 건너편 갈천(소정천)과 위천의 합수머리 부근에는 갈계숲이 있다.

 

이 숲에는 임훈의 후손들이 선생과 그 형제들을 추모해서 세웠다는 가선정·도계정·병암정이 빽빽한 나무 그늘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덕유산 동남쪽의 물줄기 월성계곡·갈천(소정천)·위천에는 임훈과 관련된 유적들이 흩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빼어난 곳이 수승대(搜勝臺)다. 수승대는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 자연에 은거하던 신권(1501∼1573)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거북을 닮은 거대한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바위가 잘 보이는 장소에 요수정(樂水亭) 지었다.


수승대는 본래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수송대(愁送臺)로 불려오다가 퇴계 이황과 신권, 그리고 임훈이 주고받은 세 편의 시로 인해 수승대로 바뀌었다. 사연인즉, 퇴계가 근처 지방을 유람하다가 신권을 찾아오겠다는 연통을 보냈다. 그러나 도착한 것은 퇴계가 아니라 한 통의 서찰이었다. 퇴계는 왕명으로 급하게 발길을 돌리면서도 시 한 수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라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라’

이 시를 읽은 신권 역시 답장을 보낸다.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시름에 잠겨 거북바위 소나무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는 신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임훈 역시 기다리던 퇴계를 생각하며 붓을 든다.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 예전에는 해인사 만한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작고 아담한 절이 된 영각사.


상처받은 덕유 여신의 선택

임훈의 풍류 이후 덕유산은 고난의 역사로 접어든다. 이것은 우리 근대사가 시련의 역사로 점철되었다는 말이다. 구한말 함양·안의·거창·무풍 등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모두 덕유산에 근거를 두었다. 칠연계곡에 병막을 차렸던 신명선 장군 부대는 전북 지역을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안성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출전하던 중 매복에 걸려 전 대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칠연계곡 매표소 옆의 칠연의총(七淵義塚)은 그들을 진혼하는 합장묘다.


또 구천동의 인월담 부근에는 항일항쟁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문태서 장군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1950년 한반도는 전쟁의 시대를 통과한다. 전쟁이 휴전된 후 남한의 산과 골을 핏빛으로 물들인 빨치산 토벌 광풍이 지나간다. 덕유산 역시 그 광풍을 온몸으로 두들겨 맞는다. 근래에 들어 덕유산은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련을 겪고 있다. 1993년 향적봉 북사면에 무주리조트가 건설되면서 4000여 그루의 주목들이 비명횡사했다. 나아가 1997년 리조트는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설치했다.

 

곤돌라에서 내려 15분 걸으면 1614m의 향적봉에 오르게 된다. 그것은 덕유산 자체의 존재까지 위협하는 막강한 위력이다. 그것은 산을 유기적인 생명체로 보지 않고 개발과 발전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인간의 오만이다. 그리고 더 이상 북덕유, 남덕유 하는 국적불명의 산 이름을 쓰지 말자. 우리 선조들은 향적봉과 봉황산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줬다. 모든 사물은 제 본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서로 교감하기 마련이다. 
풍요로운 덕을 가진 덕유의 여신이 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면 무시무시한 마녀로 변신할 줄도 모른다. 그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덕유산을 사랑하는 바로 우리들이다.                         

 

                          - 글 진우석 기자·사진 김종권 사진편집위원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