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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8경 [7] 수원 화성 (1) *-

paxlee 2011. 4. 29. 10:46

 

                           한국 8경 [7] 수원 화성 (1)

 

수원 화성의 역사

                                          - 화성 연무대와 성벽 -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화성(水原華城)에 대한 문화적인 가치성 향상을 위하여 전문인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운영과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수원화성운영재단을 설립하여 수원화성을 역사문화도시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낸 수원은 인구 110만의 휴먼시티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 화성 화홍문 -

 

                                                  - 화성 창룡문 -

 

                                             - 화성 화서문 -

 

                                          - 화성 팔달문 -

 

                                             - 화성 장안문 -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이다.

 

시대상황

 

조선의 문화전성기인 18세기는 진경시대로 규정되는 바, 탕평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왕권이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숙종 대가 그 문화의 토대를 놓은 시기라면 영조 대는 그 문화의 전성기로서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문물제도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수정 보완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인식 하에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전면적으로 재정리하는 시기였다.

정조대는 조선문화의 완숙함에 부수되는 퇴폐적 분위기와 함께 사회전반에 이완 현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유교적 공동체사회가 농경사회의 물적 기반에 의존하였다면, 상공업사회로 이행하고 있던 정조대 조선사회는 그에 조응하는 변화논리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조선문화 절정기였던 영조후반기에 태어나 그 문화의 정수가 건재하던 시기에 이를 체득한 군주로서 자신의 통치기에 체제를 지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다지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하는 고민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는 전시대에 이룩한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는 한편,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 내고 있던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여 상호 보완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그가 탁월한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동인은 당대의 어느 학자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문치주의는 이 시대에 와서 활짝 꽃피면서 인문적 소양과 학문적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제왕으로서 자격미달자로 낙인찍혀 신하들을 설득할 수도 없거니와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지적 풍토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임금이면서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면서 신하들을 독려하고 모범을 보여 교화를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에 전력투구하였다. 국가최고통치자로서 사회체제를 지켜야하는 보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변화에도 적극 대응하여 새 시대에 맞는 지배논리를 창출하고 이를 구체적인 정치현실에서 하나하나 풀어갔던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후 세손으로 책봉되어서도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새벽닭이 울 때까지 독서를 통하여 자신을 지키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즉 위기 상황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독서를 택했고 그 결과 방대한 문집을 남겼을 만큼 학자군주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휘는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요,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혜빈(惠嬪: 혜경궁) 홍씨이다. 11세 때 장헌세자가 참화를 당한 뒤 왕세손으로 동궁에 책봉되고, 영조51년(1775년)부터 대리청정하다가 다음해 영조의 뒤를 이어 진종(眞宗: 효장세자로 요절함)의 후사로 즉위하였다. 24년 간 왕위에 재임하다가 1800년에 49세로 승하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영조 때, 영조는 무수리 집안의 딸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열등 의식과 혹시나 세자에서 폐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영조는 남 모를 편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색당파의 회오리 속에서 힘들게 왕으로 등극하였다. 

 

항상 모반과 반역의 당쟁속에서 그 자신 또한 수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영조와 중전 서씨(徐氏) 사이에서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고, 정빈(靖嬪)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진종(眞宗)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향년 10세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영빈(瑛嬪) 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영조는 그 후 김한국의 딸인 15세의 김씨를 중전으로 맞아 81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인군(仁君)·현군(賢君)으로 칭송되었으나, 사도세자와는 친하지 못하였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나, 그 성격이 괴퍅하여 여러 일로 영조의 성미를 건드리며 눈 밖에 났는데, 무수히 많은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세자는 궁궐 정원에서 호미로 개미집을 부수고 일일이 손으로 개미를 잡아 죽이고 있었다. 

 

이를 본 대신들은 '세자는 모름지기 어질어서 마땅이 하찮은 미물이라도 귀중히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성격이 괴퍅하고 모지니 장차 왕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하였다. 한번은 영조가 매우 귀여워하는 외국의 개가 있었는데, 세자가 그 개를 못살게 굴자 그 개는 세자를 보고 짖으며 물려 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세자는 감히 왕세자인 자기를 몰라 본다고 그 개를 즉석에서 칼로 베어 죽였다.

 

이 사실이 영조에게 알려지자 영조는 극도로 화를 냄은 물론 세자의 자질을 의심하였다.

그 이외에 세자가 대행 왕의 직무를 수행할 때, 하루는 영조가 사랑하는 숙의 문씨가 남동생인 문성국을 병조 참의로 등용하여 줄 것을 왕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행 왕인 세자에게 검토를 부탁하였으나, 세자는 이 것이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청을 거절하여 왕의 노여움과 더불어 숙의 문씨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대리청정에서 물러난 세자는 그 후로 더욱 분별을 잃고 고집스러워졌는데, 세자의 의대공포증(衣帶恐怖症)은 유명하였다. 이 증세는 한 번 입은 옷은 벗지 않고 계속 입으려 하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빨래와 왕의 알현을 위하여 반드시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는데 세자는 고집을 부리며 벗으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궁녀가 세자의 옷을 갈아 입히려다 세자가 밀어 젖히는 바람에 벽에 부딪쳐 죽은 일까지 있었다.

 

계속되는 꾸지람에 세자는 급기야 그 돌파구로 밤을 틈 타 몰래 담을 넘어 여승들과 동침하는 미행(微行)을 서슴치 않았으며, 평양까지 가서 기생과 술로 소일하고 왔다. 이 때는 당파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운 상황이었는데, 나경언(羅景彦)의 상소로 세자의 미행이 낱낱이 밝혀지자 영조는 세자의 미행을 추궁하였고, 이 책임을 짊어진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좌의정 이후(李후) 등이 연이어 자살을 하였다.

 

계속되는 세자의 파행과 남동생의 등용에 불만을 품은 숙의 문씨의 이간질로 영조는 더 이상의 자제심을 잃고 햇볕이 내려 쬐는 여름날 세자를 문초한 뒤, 뒤주에 가두고 밖에서 못을 박아 7일 만에 죽게 하였으니,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다. 이것이 전대미문의 극형으로 전해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며, 이 현장에는 11살 된 아들(뒤의 정조)이 할아버지인 영조의 옷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영조는 끝끝내 손자의 애원을 무시하였다.

 

화성행궁의 풍수

 

한남정맥의 중조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은 남진하여서 광교저수지에 모이고, 이 물은 다시 수원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수원천으로 남진해 서해로 흘러든다. 수원성의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반대쪽인 동쪽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있고, 수원천 가로 약간의 평지가 펼쳐져있다. 화성행궁이 자리한 팔달산은 백운산을 떠난 정맥이 지지대 고개로 뻗어가는 도중 한 기맥은 남진시키고, 이 기맥은 남동진하며 광교저수지 서쪽으로 바짝 붙어 뻗고, 이 후 몸을 남서진을 바꾸어 영화동의 장안문에서 성곽을 따라 팔달산으로 이어졌다.

수원천 동쪽의 지맥은 한남정맥의 버들고개를 지난 정맥이 광교산으로 뻗어가는 도중, 한 기맥을 남진시키고, 이 기맥은 광교터널 위를 지나 경기대학교의 앞산을 거쳐 수원천을 따라 남서진한다. 따라서 팔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화성행궁의 터는 속리산이 태조산이고, 칠현산이 중조산이고, 광교산이 소조산이며, 팔달산이 주산이다.

하지만 화성행궁은 팔달산의 급사면과 완사면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용맥이 짧아 지기는 왕성치는 못하나 물이 癸方(계방)에서 득수하여 수구가 巳方(사방)이고, 이 때 내룡은 평지룡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庚酉龍(경유룡)으로 지질은 단단하면서도 생기를 품을 만한 흙이다. 이때 화성행궁의 좌향을 庚坐甲向(경좌갑향)으로 놓으면, 향상으로 木局(목국)의 冠帶水(관대수)가 病方(병방)을 충파함으로 신동이 태어나도 단명하고 과숙하는데,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를 보면, 행궁은 정문인 신풍루에서 정당인 봉수당까지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신풍루·좌선문·중앙문·봉수당으로 연결되고,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거치는데, 동향인 庚坐甲向(경좌갑향)을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곳은 水局(수국)의 墓向(묘향)은 戌坐辰向(술좌진향)을 놓아야 대부대귀하고 발복한 땅이 된다.

 

                                                  화성 북암문

                                           화성 방화수류정

                                              화성 동일포루

                                               화성 동성벽

                                                  화성 동북공심돈

                                              화성 화양루

 

                               -  자료 출처-

                        수원화성운영재단

 행궁의 설치목적시대상황사도세자의 죽음화성행궁의 풍수적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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