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한국 8경 [7] 수원 화성 (2) *-

paxlee 2011. 4. 30. 10:22

 

                                      한국 8경 [7] 수원 화성 (2)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白眉)!

  

 * 화성행궁(華城行宮)의 개요

 

 

화성(華城)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체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수원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화성 축성 공사에는 모두 22직종 1,84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으며, 석재는 화성 북쪽의 숙지산에서 떠온 돌을 사용하고, 기와와 벽돌은 성역소에서 직접 가마를 마련해 구워냈다. 기둥이나 대들보에 쓰이는 큰 목재는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의 산중에서 금강송을 가져다 사용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고안한 유형거와 거중기 등을 비롯한 장비를 이용하므로 자재 운반 등이 용이하고 수월해져서 일의 능률을 높여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가 있었다.

 

화성은 지형에 의하면 평지와 산에 걸쳐 쌓은 '평산성'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을 쌓는 재료를 한국에서 가장 널리 축조되는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의 석성에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하는 '전축성'을 혼용한 것이 특징인데, 방어시설은 주로 벽돌을 사용하고, 성벽 자체는 모두 돌로 축조하였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축조한 성으로 규모와 시설을 보면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관문을 두었으며, 각 문의 사이에는 적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장대 2곳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통신시설인 봉돈을 비롯하여 각 5개씩의 포루(鋪樓)와 포루(砲樓), 2개의 노대(弩臺), 4개의 각루(角樓), 성안을 흐르는 수원천에 2곳의 수문 등이 축조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 아래 세워진 성이다.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배경』

 

세계문화유산 등록기준 중 두번째 기준인 '한 시대나 하나의 문화권을 통해 건축, 기념물, 문화환경 부문에서 지대한 영행력을 행사한 것'과 세번째 기준인 '소멸된 문명이나 문화전통에 대해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한 사례, 적어도 예외적인 증명이 되는 것'에 근거하여 등재가 되었다. 특히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며,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극동아시아 성제(城制)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

 

* 화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 5.7km(미복원 구간 포함),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51개의 시설물로 성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멸되고 약 40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중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 화성의 축성동기는 군사적 목적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측면,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상업이 활기를 띠자 서울과 지방간에 유통이 활발해져 삼남의 교통중심지인 수원을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신도시 건설이라는 경제적인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기반시설인 문, 도로, 다리, 상가 등을 설치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계획된 신도시로 건설되었다. 중국, 일본 등과는 달리 평지와 산지에 걸쳐 축조된 독특한 형태의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 18세기 동양의 성곽을 대표하는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뿐 아니라,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공사일지 등이 '화성성역의궤'에 완벽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화성만의 독특한 시설인 '공심돈' '현안' 등이 설치됨은 물론 성곽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동양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18세기 실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50개가 넘는 시설물이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성곽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 보이게 하며, 화홍문의 수문은 기능과 7칸의 수문위에 축조된 문루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조화를 이루어 방화수류정과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화성행궁(華城行宮)

 

 

                                                       - 화성행궁의 전경 -

 

화성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사회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조사 및 복원정비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정조시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위민과 개혁을 실천하고자한 역사적 공간이자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베풀었던 효의 상징적인 공간이며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중심축이다.

 

*사적 제478호(2007년6월8일 지정)

*면적:37,268㎡

*소재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화성행궁의 구조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양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로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에는 집사청이 위치해 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양문이 나온다.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별도로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

 

 화성행궁 돌기

 

매표소→신풍루→남군영→서리청→비장청→외정리소→유여택→복내당→장락당→경룡관/봉수당→득중정→낙남헌→화령전(전사청→제정→남측협문→운한각+복도각+이안청→북측협문→풍화당→동측협문→외삼문→내삼문→남측협문)→노래당→중양문→좌익문→집사청→북군영→신풍루/원점회귀

 

                                                ▲ 수원화성 안내도

 

탐 방 기

 

* 탐방일자 / 2010년 8월 27일(야간) & 2011년 2월 15일(주간)

* 소요시간 / 각 1시간씩/총 2시간 소요

 

2010년 8월 27일(금) 야간에 한차례 화성행궁을 찾았었고, 10월 2일(토) 비가 내리는 날 화성 성곽돌기를 하기 위헤 두번째로 화성을 찾았었다. 화성돌기를 한 두번째 방문 때 화성행궁을 다시 찾을 계획이었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탐방을 보류하게 되어 이번에 수원에 행사가 있어, 참석 후 짜투리시간을 내어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의 외부 성벽들을 살펴보고 화성행궁 탐방을 위해 세번째로 재방문을 하게 되었다.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화성행궁내의 건물들이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민족문화 및 역사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사라져버려, 당시의 자료들을 토대로 원형대로 새롭게 복원되어 2003년 공개된 건물들이지만 옛 모습을 보는 듯 하였으며, 우리나라 문화 이미지를 세계인의 마음속에 널리 알린 MBC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 등의 촬영지이다. 화성행궁에서 한류열풍의 본향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또한 야간에 탐방했을 때와는 달리 주간에 비쳐진 화성행궁의 모습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색다른 체험을 경험하게 하였다. 본 탐방기에서는 탐방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각 건물들을 소개하고, 주야 두차례 탐방 때 촬영한 사진들을 함께 게재를 하기로 한다. 화성행궁 소개에 앞서 지난 해 10월 화성 성곽돌기를 할 때 성곽 위를 따라 진행을 한 관계로 성벽 외부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다. 

 

이번에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의 북서적대(北西敵台), 북서포루(北西砲樓), 북포루(北鋪樓) 그리고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성밖에서 관찰하고, 외부 모습을 공개를 한다. 화성에 시설된 4대 관문, 그리고 각 5개의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4개의 적대(敵台), 3개의 공심돈(空心墩)의 외부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되어 소개를 간략하게 곁들이기로 한다.

 

◎ 화성(華城) 장안문(長安門)과 화서문(華西門)

 

♧ 관문(關門)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청룡문 등 4개 성문이 있으며, 그 중 서울을 향한 장안문(북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훼손된 것을 1975년에 복원))과 그 반대 방향의 팔달문(보물 제402호, 남문, 돌로 쌓은 무지개문 위에 목조의 2층 문루를 축조하였으며, 전면에는 반월형의 옹성을 쌓았다)이 대표적인 성문이다.

 

 

                                                ▲ 장안문

 

♧ 적대(敵台)

 

성문과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그 구조와 기능은 치(雉, 성곽의 요소에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와 거의 같으며 화성성곽내에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좌우에 각기 북동, 북서, 남동, 남서적대라고 불리는 4개소가 있다.

팔달문 좌우의 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사라졌다.

 

 

 

   ♧ 포루(砲樓)

 

아랫부분을 3~6단의 화강석 돌을 쌓고 그 윗부분에 벽돌을 쌓았으며, 맨 위는 목조건물을 설치하였다. 화성 성곽에는 동포루, 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등 5개 소에 포루를 설치하였는데, 윗 부분에는 양쪽에 3문씩 6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성벽을 향해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다만 화성에서는 단 한차례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다.

 

 

 

♧ 포루(鋪樓)

 

일명 각건대라 불리며,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등 5개 소가 있다.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는 군사들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두꺼운 판문이 있는데, 동일포루와 동이포루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 서북공심돈과 북포루, 그리고 화성의 외부 성벽 모습

 

♧ 공심돈(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놓아 위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군사들이 이 안에 들어가서 작은 구멍으로 백자총, 큰 구멍으로는 불랑기포를 쏘게 하였다.

             

                                           ▲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 화성행궁의 시설물들

 

                 - 화성행궁과 성곽 축조에 이용된 유형거와 거중기의 조형물 - 

 

♧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 보호수들 

 

 

 

*고유번호:경기-수원-14(좌측), 경기-수원-6(우측)

*지정일:1982년10월15일

*수종:느티나무

*수령:약350년

 

화성행궁 앞 느티나무는 궁궐의 조경제도에 의해 品자 형태로 심어진 것이다. 영의정을 비롯하여 삼정승이 이 나무 아래에서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올바른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신풍루(新風樓)

 

 

 

                  ▲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사진 上)

                     신풍루의 야경/전면(사진 下)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정조14년(1790)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후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되었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성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리기도 하였다.

  

♧ 남군영(南軍營)

 

 

화성성역의궤'에는 공해(관아)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정조13년(1789)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18년(1794) 좌우익랑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신풍루를 바라보는 쪽에서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복원된 것이다.

 

♧ 서리청(書吏廳)

 

 

신풍루를 들어서면 좌익문 앞마당이 나타나고, 앞마당에서 좌측/남쪽에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데 중간에 위치한 건물이 서리청으로 서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던 아전이다. 비장청 앞에 자리하며 남향 건물이다. 예전의 금도청 건물을 증측하여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복원된 것이다.

 

♧ 비장청(裨將廳) 

 

 

조선시대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을 따라 다니는 관원(막료)을 비장이라고 하는데, 비장청은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있는 남향건물이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 외정리소(外整理所)

 

                 '외정리아문'이란 현판

 

 

정리소는 1795년 정조의 을묘원행 때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명명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들이 행차할 때 화성행궁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의 정리소는 장용내영 조방(소속 관원들이 조회하는 건물)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 화성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 현 위치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 유여택(維與宅)

 

 

 

                                                ▲ 유여택 전경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정조19년(1795) 행차 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으며, 이 건물은 원래 정조14년(1790)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정조22년(1796)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 복내당(福內堂)

 

 

 

                                                       ▲ 복내당 전경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13년(1789)에 건립되었으며, 1994년에 증축되었다.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며, 평소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판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 장락당(長樂堂)과 경룡관(景龍館)

 

* 장락당(長樂堂) 

 

 

                  ▲ 장락당 전경(사진 上) 장락당의 야경/전면(사진 下)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정조18년(1794) 화선 축조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봉수당의 남쪽에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정조19년(1795) 을묘원행 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 경룡관(景龍館)

 

 

                        ▲ 경룡관 전경(사진 上) 경룡관의 야경/전면(사진 下)

        

장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

정조18년(1794)에 세워졌으며, 2층 구조로 2층은 누마루로 만들고, 1층을 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이름 붙였다.

 

♧ 봉수당(奉壽堂)과 중양문(中陽門)

 

* 봉수당(奉壽堂)

 

 

 

                  ▲ 봉수당 전면 전경(사진 上, 中左)

                     

                                                     ▲ 봉수당 야경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이다.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 현재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 건물로서 현재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유수가 집무를 하던 곳이다.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하였다. 정조13년(1789) 9월25일 완공되었으며, 정조18년(1794)에 지금의 규모롤 증축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하였다. 정조가 수원 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 봉수당 내부 전경 

                  ▲ 봉수당 앞에서 바라본 앞마당의 어도와 봉수당의 정문인 중양문 후면 모습

 

* 중양문(中陽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앞에 있는 문으로 1790년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 협문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각각 행각을 두었다.

 

 

 

                  ▲ 봉수당 뒷편의 화성행궁 서쪽 담장(사진 上)

                     

♧ 덕중정(得中亭) 

 

 

                                                  ▲ 득중정 야경 

                     

활을 쏘는 정자(사정, 射亭)이다. 1790년 정조가 새로 만들어진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모두 맞춘 기념으로 낙남헌 자리에 지었다가, 정조18년(1794)에 현재의 자리에 옮겨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정조가 쓴 편액을 달았다. 북쪽 방향으로 노래당(老來堂)과 이어져 있으며, 계단 앞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아 어사대를 두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에 복원된 것이다.

 

                           ▲ 화령정 입구에서 바라본 낙남헌과 득중정 일대 전경

 

♧ 낙남헌(洛南軒)

 

 

 

                          ▲ 낙남헌 측면(사진 上)과 낙남헌 야경(사진 下)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정조18년(1794)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경기도기념물 제65호로 1972년 지정되었다.

 

 

                                                ▲ 노래당

    

♧ 좌익문(左翊門)

 

 

                            ▲ 좌익문 전경(사진 上)  좌익문 야경(사진 下)

                     

신풍루를 통과하여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중양문 앞에 위치해 있다. 1790년에 지어졌으며 남쪽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 집사청(執事廳)과 집사청 앞 느티나무

 

* 집사청(執事廳) 

 

 

국왕이 사용하는 문방사우를 보관하고, 비품을 관리하는 등과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담 안에 정조13년(1789)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집사청 앞 느티나무 

 

 

화성행궁의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키온 신성스런 나무이다. 영목(營木), 신묵(神木), 규목(槻木)이라고 불려왔으며, 옛부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의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였다. 또 이 느티나무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높이 30m, 둘레 6m에 이르며, 1982년 경기도 보호수(지정번호:5-3)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수원시는 2003년 5월에 대대적인 나무 살리기 작업을 하였으며 현재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 북군영(北軍營)

 

집사청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남군영과 마찬가지로 친군위의 기마병이 숙위하는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남군영과 동일하며 1789년 지어졌고, 1974년에 좌우 익랑 21칸이 증축되어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2002년 7월에 현재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 출처 / 왕마구리의 산행 http://blog.daum.net/cheonym/16506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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