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우리 숲의 변천사 [2] *-

paxlee 2011. 7. 20. 21:41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

20세기에 들어서도 산림황폐는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던 장강(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산림은 자원수탈에 혈안이었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장강 지역의 산림자원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러시아가 눈독을 들였고, 마침내 대한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한-러 산림조약의 체결(1896년)로 산림이용권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도 잠시, 장강 유역의 산림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체결된 한일삼림 협동약관(1906년)에 따라 일본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갔고, 종국에는 한반도의 모든 산림이 일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으로 수탈되기에 이른다.
 

▲ 일제 강점기에 압록강 유역의 산림벌채와 뗏목으로 벌채목의 운반 모습.
일제 강점기의 산림정책은 이 땅의 산림 대부분이 헐벗었기에 국유화해 녹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우매한 민중을 기만하고 소유가 불분명하던 임야를 탈취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니었다. 인구집중이 일어났던 중남부 지방의 큰 강 유역은 비록 헐벗었지만, 정착민이 많지 않던 장강 유역과 개마고원 일대는 청나라 태종의 변경 이용 금지정책으로 그 때까지 ha당 200㎥의 울창한 원생림이 5억㎥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한반도의 산림 총축적은 7억㎥ 이상이었으나 광복 직전에는 약 2억㎥만 남아 전체 약 5억㎥가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간 동안 약탈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약탈된 산림자원은 지하자원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재원으로 충당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 숲의 슬픈 파괴역사는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명맥이나마 겨우 유지되고 있던 이 땅의 숲은 6·25 전쟁으로 또다시 고사 직전으로 내몰렸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취약해질 대로 취약한 우리 산림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소각이나 군수용품에 필요한 목재의 벌채로 다시 한 번 결딴이 났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군대가 주둔한 주변의 산림은 군의 후생사업의 재원으로 활용되었기에 무절제하게 벌채되었으며, 이러한 남벌은 전쟁의 직접적 피해보다 오히려 더 극심한 피해를 우리 숲에 입혔다. 특히 피란민을 위한 판잣집의 증대는 판자의 수요 증대를 가져와 가격 상승을 초래했고, 이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일제수탈의 마수를 용케 피했던 안면도, 조령, 괴산, 오대산, 지리산 등의 울창한 산림이 민·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남벌되었다.

전후 복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업정책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은 지속되었다. 일제의 수탈적 산림이용 전통은 지속되었고, 또 부족한 기술 인력은 산림황폐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 단적인 예로 1948년부터 1957년까지 10년 동안 1만8,000여ha의 숲을 새롭게 만들었지만 벌채 면적은 매년 1만2,000ha에 달했고, 설상가상으로 사방사업이 필요한 임지면적은 68만ha에 달했던 산림훼손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런 산림훼손은 1973년부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산림복구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마침내 멈추게 되었다.

세계적 산림복구 모델 - “애국가를 부르며 산으로 가자”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때, 본격적으로 숲을 복구한 시기는 1973년부터 1997년까지 30여  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시적인 산림복구 사업이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1960년대에도 있었지만 전 국토를 대상으로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시행했던 녹화사업은 1970년대 산업화와 발맞추어 함께 추진한 1, 2차 치산녹화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녹화사업은 산림법 제정(1961년)과 산림청 발족(1967년) 같은 산림정책 추진체제의 사전 구축과 함께 산림녹화에 대한 범정부적 노력과 범국민적 참여 분위기의 확산으로 1973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흔히 학계에서는 1973년을 한국 임정사상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하고 있다.

1차 치산녹화사업(1973-1978)의 목표는 국민참여, 유실수 조림으로 농촌 소득 증대, 속성수 조림에 의한 국토 재건이었다. 국민적 참여는 산림청을 내무부에 두는 한편 국민식수기간(3월 21일~4월 20일)과 육림의 날(11월의 첫 일요일)을 새롭게 지정해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유실수와 속성수의 조림비율을 3 대 7로 계획해 연료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농촌의 소득증대에 필요한 새마을 운동의 지원책으로도 국토녹화 사업은 활용되었다.

▲ 1 1970년대의 산림. 2 1980년대의 산림. 3 1990년대의 산림.
아쉽게도 1차 치산녹화사업은 임업으로서의 발전요소는 포함하고 있었으나 미완의 성공으로 마감되었다. 미완의 성공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록 4년이나 앞당겨 1차 치산녹화사업을 완료해 108만ha의 황폐지를 녹화했지만 지나치게 실적을 중시했기에 적지적수(適地適樹)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조림지에 대한 사후정리가 철저하지 못해 많은 조림목들을 고사시켰던 데서 찾을 수 있다.

2차 치산녹화사업(1979-1988)은 1차 치산녹화사업에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는 한편 경제림 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1차 치산녹화사업의 문제점은 절대녹화’라는 표어처럼 국토녹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조성된 산림의 질적 상태나 장래의 경제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2차 사업에서는 21개 수종을 경제수종으로 선정해 경제림 조성에 박차를 가했고, 이런 사업은 3차 산지자원화사업(1988-1997)의 밑거름이 되었다. 1차 및 2차 치산녹화사업(1979-1988)으로 완료한 212만8,000ha의 인공조림, 20만8,000ha의 연료림 조성, 12만ha의 산지해안사방 사업은 세계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한민족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산림 황폐의 질곡으로부터 탈피해 숲을 복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경제성장에 따른 연탄의 개발과 보급 덕분이라고 그 공을 대체연료에 돌리기도 한다. 도시나 농촌 구분할 것 없이 땔감을 장작으로 해결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과히 틀린 답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국토를 성공적으로 녹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국토녹화에 대한 강인한 신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박 대통령에 의해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자조자립정신을 계발하고, 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의식을 함양할 수 있었고, 이런 정신은 마침내 산림녹화에 국민적 호응을 끌어 모아 종국에는 모든 구성원이 녹화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물론 산업화로 늘어난 도시민의 소득은 나무 땔감 대신에 연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선호하게 만들었던 점을 고려하면, 1960~1970년대 사회 경제적 여건변화도 녹화한 숲을 온전하게 지키는 데 일조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조림왕 임종국 독림가가 조성한 장성의 편백숲.
앞선 세대가 쏟은 각고의 노력 덕분에 우리 산림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자원으로 되살아났다.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 산림률(30%)의 2배가 넘는 국토의 64%가 산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높은 산림률은 OECD 국가 중에 4번째이다. 산림의 울창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 면적당 임목축적량은 일본(171㎥/ha)이나 독일(320㎥)에는 미치지 못하나 OECD의 평균(104㎥)보다는 조금 더 많은(109㎥/㏊) 형편이다. 비록 일본이나 독일의 임목축적량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1910년(43㎥/ha, 남북한), 1943년(13㎥/ha, 남북한), 1948년(9㎥/ha), 1952년(6㎥/ha), 1961년(11㎥/ha), 1972년(11㎥/ha), 1978년(31㎥/ha), 1987년(56㎥/ha), 1998년(73㎥/ha), 2010년(109㎥/ha)의 늘어난 축적량을 살펴보면. 이 기간에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의 산림이 엄청나게 사라진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숲의 복구는 분명 세계적 자랑거리다.

우리 숲의 축적이 괄목할 정도로 늘어난 덕분에 2000년대 초반에 5% 미만의 목재 자급률은 2010년 13.5%로 늘어났고, 울창한 숲에 조성된 휴양림을 찾는 사람들도 현재 1,0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알면 사랑한다. 우리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의 땀과 눈물로 30여 년에 걸쳐 복구된 사실을 기억하고, UN이 정한 ‘산림의 해’를 맞아 우리도 내일의 세대를 위해 앞선 세대가 만든 숲을 열심히 가꾸고 지킬 책무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 글·사진 | 전영우 국민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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