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우리 숲 변천사 [1] *-

paxlee 2011. 7. 19. 23:33

우리 숲 변천사

 

우리 숲의복구는 세계적 자랑거리

“한국은 산림녹화의 세계적 성공작이다. 6·25 전쟁 뒤만 해도 황폐해 있던 산림이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다. 한국처럼 지구도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

이 내용은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된 환경분야의 세계적 저술가이자 지구정책연구소장인 레스터 브라운 박사가 쓴 <Plan B 3.0>(2007)에 기술된 내용이다.

<Plan B 3.0>처럼 환경 관련 도서에 소개되는 것과는 별개로, 한국의 국토 녹화 성공사례는 국제학술지를 통해서도 전 세계 학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산림경영학과 폴 우드 교수 등은 영국에서 발간되는 국제학술지 <International Forestry Review 9(1), 2007>에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정부 주도로 가장 잘 조직되고 결집된 재조림 사업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국인에 의해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헐벗은 국토를 다시 울창한 숲으로 복구한 사업이다”고 밝히고 있다.


▲ 우리 숲의 옛 모습을 간직한 경기도 포천 소리봉의 천연활엽수림. 세조의 능역 주변이라 지난 500년 동안 철저하게 지켜온 숲이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나 또는 외국의 산림학자들은 이처럼 복구된 우리 숲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한국의 국토녹화 성공 사례를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서 국제적으로 널리 소개하고 있다. 숲이 파괴된 중국,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파푸아뉴기니, 에티오피아, 케냐, 엘살바도르, 파라과이, 페루, 온두라스의 산림공직자들이 한국의 국토녹화 사례를 배우고자 매년 한국을 찾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주변의 숲이 자연이 만들어 준 선물인 양 그저 즐기고 향유할 뿐, 우리 숲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파괴되고 복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우리 숲의 옛 모습을 유추해 보고, 파괴 과정과 복구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산림의 해’를 맞이해 나름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숲의 옛 모습…농경문화  정착 이후 소나무가 주종

우리 숲의 옛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숲의 종류나 목재 이용에 대한 구체적인 옛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날 우리 숲의 옛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호수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화분을 채취해 옛날 번성했던 수종을 추정하거나 또는 목조 문화재의 목재 절편을 해부학적으로 조사해 그 당시 재목으로 사용된 수종들을 분석하는 방법들이 주로 활용되고 있다.

화분 분석은 1978년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강원도 속초 인근의 영랑호 바닥을 지하 12m까지 파 내려가 호수 밑바닥의 퇴적물을 조사한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영랑호 퇴적물의 화분 분석에 의하면, 지금부터 4,500년 전에서 1,400년 전까지의 시기는 서늘한 기후를 선호하는 참나무 속, 소나무류, 서어나무류, 개암나무, 느릅나무, 가래나무 등이 많이 분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400년 전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에는 퇴적물에 소나무류와 풀꽃의 꽃가루가 주로 나타나서, 농경문화가 정착된 삼국시대 이후는 우리 숲의 구성 수종이 소나무가 주종이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소나무의 꽃가루가 주로 많이 나타난 이유는 조상들이 영위했던 농경생활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화학비료가 없던 먼 옛날, 농경지를 비옥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은 가축이나 사람의 배설물, 온돌 아궁이의 재, 농가 주변의 산에서 채취한 풀이나 활엽수의 잎을 베어 썩혀서 만든 퇴비였다. 그러나 사람이나 가축의 배설물이나 나무나 풀을 태워서 만든 재는 그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농경지에 퇴비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야산의 풀이나 농가 주변의 산에서 자라는 활엽수의 잎이나 가지를 채취해 퇴비로 사용했다.

▲ 1984~1986년 사이에 강원도 거진에서 시행된 사방사업 전후의 모습.
농사에 필요한 퇴비를 생산하고자 인가 주변의 활엽수를 지속적으로 채취한 결과, 활엽수가 자라던 산림은 차츰 척박해졌다. 이렇게 척박해진 산림은 활엽수가 자랄 수 없는 불량한 토양으로 변하고, 그 결과 척박한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들만이 활엽수들이 자라던 곳을 점차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농경생활을 하면서 농경지를 비옥하게 하고, 온돌을 이용한 난방으로 겨울을 지내는 행위는 농가 주변에 자라고 있던 우리 숲의 모습을 낙엽활엽수림에서 점차 소나무 숲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동인(動因)이었던 셈이다.

화분 분석에 의한 연구와는 달리, 지금까지 출토된 목조 문화재나 또는 고건축물의 부재로 사용된 목재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한 최근의 연구는 사용된 목재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목재의 해부학적 연구 결과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사용된 목재는 주로 참나무였고, 고려시대에는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건축물은 주로 소나무로 지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수행된 연구에 의하면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의 배흘림 기둥,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등의 축조에 사용된 재목들 중 일부가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사찰을 비롯한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이나 목조 유물 중, 시대에 따라 사용된 목재의 종류가 참나무에서 느티나무로, 느티나무에서 다시 소나무로 점차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먼저 역사 발전에 따른 인구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그에 따라 목재의 수요도 함께 늘어났다. 인구 증가에 따른 곡물 생산을 위해 개간을 늘리다 보니, 마을 주변의 산림은 점차 황폐해졌다. 증대된 목재수요를 충당하고자 운반이 용이한 마을 주변의 참나무나 느티나무와 같은 활엽수부터 사용했지만, 공급보다는 수요가 더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주변의 산림은 농경에 필요한 퇴비생산에 필요한 임상(林相) 유기물과 활엽수의 지속적 채취로 점차 척박해졌다.

결국 척박한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만이 살아남게 되었고, 다행스럽게도 소나무는 건축재로서의 재질도 나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참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활엽수재 대신에 소나무가 주된 건축재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우리 농경문화의 발전에 따른 인구 증가와 산림황폐도 한몫을 했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 소, 말, 지게를 이용해 묘목을 나르고, 나무를 심는 모습.
고려와 조선시대의 산림황폐

고려시대의 대표적 산림황폐 원인은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70여 년의 지배기간 동안에 자행되었던 목재 수탈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사>에는 ‘산천임수의 7할 이상이 벌채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3년에 한 번꼴로 풍수해와 기아가 계속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극심한 산림 황폐는 종국에 고려의 멸망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치산치수의 중요성을 인식해 개인의 산림 소유를 금지하고 적극적으로 산림보호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선 초기 100여 년 동안만 제대로 시행되었을 뿐이었다. 땔감을 채취하던 인가 주변의 산림은 백성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나라에서 허락한 공리지(共利地)였지만, 조선 건국 100여 년 이후부터 왕족을 비롯한 세도가들이 산림을 사사로이 점유했고, 그에 반비례해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산림 면적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축소된 공리지의 면적에 반비례해 단위 면적당 땔감 채취량은 점차 많아졌고, 그 결과 숲의 훼손은 더욱 촉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6세기 말 일본의 침입과 17세기 초 청나라의 침입으로 한반도의 산림은 더욱 황폐해졌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생된 막대한 산림파괴의 후유증을 보완하고 산림이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산림 제도를 숙종 때부터 도입했다. 그러나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만큼 충분한 산림 축적을 갖지 못한 여건에서 새로 도입한 산림제도 역시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그 결과 인구 밀집지역인 서·남해안 주변의 숲은 점차 더 황폐해졌다.

이런 황폐화 과정을 거쳐, 이 땅의 산림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헐벗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후기 산림황폐가 극심했던 주된 이유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정치부패 및 사회적 혼란으로 왕족과 권세가의 산림사점(山林私占), 사회적 약자들에 의한 화전과 개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마을 공동체를 단결시키고 협동을 이끌어 왔던 상부상조의 전통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현실적 생활고 때문에 더욱 치열한 생존경쟁을 유발시켰고, 극심한 생존경쟁에 도태된 사회적 약자들은 종국에는 공동체에서 이탈해 원시림이나 천연림을 화전으로 개간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화전 이동경작은 조선 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사회적 혼란기까지 이어져 대 면적 산림황폐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글·사진 | 전영우 국민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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