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산악인 한계를 넘어선 사나이 *-

paxlee 2011. 9. 30. 22:10

 

                                       산악인 한계를 넘어선 사나이

 

산악인에게는 한계가 있다. 능력의 한계요 무대의 한계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이 한계를 넘어선 자가 나타났다. 박정헌이 바로 그 사람인데, 그는 지금까지 히말라야 고봉(高峰)에서 활동하다가 이제 고공(高空)으로 그 무대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도 ‘Flying the Himalaya 2400km’라는 대장정에 올랐다. 이것은 무대의 이행(移行)이 아니고 말 그대로 비상(飛翔)이다.

등산의 역사는 무대의 변천사다. 무대가 바뀌면서 등반의 형식과 내용이 따라 바뀌고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나갔다. 250년에 걸친 세계 등반사의 커다란 분수령은 19세기 후엽에 유럽 알프스 4,000m 고소에서 일약 히말라야 8,000m 고소로 무대가 이행한 일이다. 윔퍼의 마터호른 등반으로 알프스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고, 머메리의 낭가파르바트 도전으로 간 것은 그 상징이다.

물론 세계 등반사가 그런 이분법(二分法)으로 정리될 수는 없고, 알프스는 알프스대로, 히말라야 역시 그 안에서 새로운 등반 의식과 행동이 그때그때 창출되며 오늘에 이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머메리즘과 단독행이며, 알파인 스타일의 소수 정예주의, 그리고 무산소 등정과 8,000m 고봉의 연속 등반 등이 세계 등반사를 기록해 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상 고산군에 미답봉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저 시간이 흘러 거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외국의 과학사상사가(思想史家)가 ‘유럽 근대화는 과학기술 성립과 등산으로 비롯했다’며,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완성과 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발명은 알프스 몽블랑의 초등정(1786. 8.7)과 동시였다고 구체적 사례를 들었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도 등산도 인간의 디모니슈한(마력적인) 활동의 양극을 대표한다는 그 사상사가의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반드시 과학의 도움 덕으로만 볼 수는 없다. 몽블랑을 초등하는 데 4반세기가 걸렸고, 윔퍼의 마터호른 등반도 5년이나 시간을 요했다.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의 경우, 메스너가 10일 동안 고투한 데를 최근에 한두 시간에 오른 기록이 나왔다.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에베레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1953년 영국대가 초등할 때까지 10차 도전, 32년 만의 성취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 정상에는 하루 100여 명의 사람이 운집했다.

지구상 오지 중의 오지인 곳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등반가들의 능력 이전에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현대문명에 힘입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즉, 교통과 통신과 정보를 비롯해 식량과 장비 등 등산에 필요한 절대적 요소와 여건이 엄청난 발달을 했다는 이야기다.

지난 1970년대만 해도 우리는 히말라야를 거의 몰랐다. 산사나이들은 오직 설악과 지리와 한라에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의 오지를 마치 국내의 산 가듯 오가고 있다. 산악인들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사회의 여건이 그만큼 달라졌다. 이제는 오랜 세월 선두 주자였던 등산 선진국을 바라만 보지 않고 우리들 스스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 우려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전통과 모방 속에 머물고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고봉과 거벽과 오지가 더 갈 곳이 없다면 이제 우리 알피니즘이 맞을 운명은 어떤 것일까.

등산은 처음부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고 고도지향을 그 요체로 하고 있다. 페터 하벨러가 목표는 정상(Das Ziel ist der Gipfel)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반드시 정상만을 노린다는 등정주의를 뜻하지 않으며, 언제나 앞을 보고 높이 높이 오른다는 그의 등산정신이리라. 그런데 더 오를 데가 없으니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산악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런 문제로 철학에서 말하는 아포리아(aporia)에 부딪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스너의 책을 들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오랜 세월 극한의 세계를 독무대로 살아온 자기 인생을 정리하며 한 말이다. 즉 ‘자유에는 단념이 있어도 한계는 없다(In der Freiheit gibt es den Verzicht, aber iceine Grenzen)’가 그것이며, 그는 또한 한계 도전의 과정을 기록한 책(마인 베크, Mein Weg)에서 ‘사람들은 오늘날 지상에 월더니스, 황무지가 없다고 하는데, 각자 마음속의 공백이 바로 윌더니스다’고 했다. 공백이란 남이 했어도 자기가 못했으면 그것도 공백이다. 요는 자기가 그 빈 공간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메스너가 말하는 ‘한계’와 ‘공백’은 서로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등산가들의 의식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등산세계의 이러한 추상론이 어느날 구체성을 띠며 내 마음을 자극했다. 박정헌이 히말라야 상공 2,400km를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산악계 일각에서 들려왔을 때였다. 물론 패러글라이딩으로 난다는 것인데, 산에서 이런 장비로 내려온 일은 그전에도 있었다.

1970년에 일본의 프로 스키어가 에베레스트를 사우스콜에서 낙하산을 달고 로체페이스를 하강했고, 1978년에는 오스트리 등반대가 역시 에베레스트 등반 때 패러글라이딩 하강으로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렀는데, 이번 박정헌의 시도는 그 세계를 한마디로 뛰어넘고 있다. 그는 이달 8월에서 오는 1월에 걸쳐, 12번의 비행으로 히말라야 전역 2,400km 상공을 비상한다는 이야기다. 이 길고 긴 여정은 지상에서 상공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국경을 넘으며 트레킹하고, 빙하 횡단과 비박 그리고 고소캠프 설치, 그때 그때 식량 구입과 포터 고용 등 일반 등반대가 거쳐야 하는 이른바 ‘로지스틱’ 전술이 입체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알피니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세계 탐험의 역사는 수평과 수직 이동의 역사였으며, 20세기 초엽의 남·북극점 탐험과 최고봉 에베레스트 도전이 그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21세기로 이행하면서 우리 앞에 더 이상 갈 곳과 할 일마저 없어진 듯이 보였다. 7대륙 최고봉이나 8,000m급 14봉 완등, 지구의 양극과 제3극을 모두 답파한다는 과제들이 나온 것도 이를테면 더 이상 갈 곳, 할 일이 없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여기 히말라야 전역의 상공을 난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이 나왔다. 메스너의 말대로 한계를 모르는 자유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박정헌의 비전은 무엇인가. 그는 남들이 저마다 히말라야 고봉에 집착하는 동안 혼자 고봉 아닌 거벽을 응시하더니 그 촐라체 시련과 부딪쳤다. 그보다 앞서 조 심슨의 남미 시울라 그란데 시련이 당시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는데, 사실 박정헌의 경우는 남다른 의미에서 조 심슨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었다.

박정헌은 그뒤 한동안 조용했다. 그때 입은 심신의 상처와 피로가 격심했을 터이니 당연하겠지만, 그것으로 익스트림 클라이머로서의 그의 생애도 마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산사람에게 없는 날개를 남몰래 기르고 있었다. 박정헌은 극한 등반가이며 자유인이었다.

나는 언젠가 독일 등산잡지에서 어느 산악인의 글 한 토막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인 적이 있다. 그것은 이런 글이었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자유뿐이며, 그 자유가 내게 있다.’

메스너의 책 가운데 <가고 싶은 데로 떠나는 자유>라는 것이 있다. 박정헌이야말로 가고 싶은 데로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산악인이다.

 

         - 글=김영도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