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paxlee 2011. 11. 11. 22:35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산에 대해서 두 가지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산이란 무엇인가?' , 그리고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두 가지다.

첫 물음은 산은 자연의 일부라고 하면 되겠는데 두 번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산에 대한 생각, 산을 보는 눈은 동서양이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산을 자연의 대표격으로 보며 자연을 산천초목이라고 즐겨 부른다.

또한 천연자연이라는 사자성어를 줄여서 쓴다. 이러한 산천초목이니 천연자연 같은 개념과 발상은 적어도 영어 'nature' 나 독어 'Natur' 에는 없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우리처럼 자연을 인간 세계 저편에 두지 않고 생활 속에 끌어넣고 있다.

즉 그들은 자연을 뜻하는 낱말을 동시에 '성격' , 또는 '성질' 또는 '종류' 등 선천적 의미로 쓰는가 하면, 자연을 어머니로 보는 'Mother Nature' , 'Mutter Natur' 라는 개념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볼 때 '산은 무엇인가?' 는 동양적 물음이고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는 서구적 문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양의 자연관이 정적인 데 비해 서양은 동적인 것 같다.

 

 사람이 정적인 자연관을 가질 때 거기서 행위가 나오지 않으며, 산과 사람의 만남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등산이 동양의 산물이 아니고 서양의 사고와 행동 양식인 것은 이러한 동, 서양 간의 자연관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1760년 제네바의 대학교수인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을 보고 그 정상에 오른 자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몽블랑은 사철 만년설에 덮여 있고 때때로 눈사태를 일으켜 산록 주민들은 산마루에 귀신이 산다고 믿었으며 두려워했다. 이러한 몽블랑이 등정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1786년의 일이며 이때부터 알프스 등산시대가 열리고 '알피니즘' 이라는 사고와 행동양식이 생겼다.

 

유럽의 근대화는 과학기술의 성립과 등산으로 비롯했다.

제임스 왓의 증기기관의 완성과 카트라잇의 역직기 발명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초등정과 동시였는데, 이것은 과학기술도 등산도 인간의 데모니슈한 활동의 양극을 대표하고 있다.

위는 외국의 한 자연과학자가 쓴 <산의 사상사> 서두에 나오는 글인데 기실 등산은 과학 기술 문명과 더불어 전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보낸 저명한 등산가 게오르게 잉겔 휜치'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 이라고 했는데, 의식주의 이동인 등산이 인간사회가 고도로 산업화하면서 놀라운 개발과 변천을 맞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산악인들의 입버릇처럼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어졌다. 지구상에 공백지대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류문화의 발전으로 인간의 행복을 뜻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몽블랑을 둘러싸고 산에 대한 도전이 가, 불가론이 한창이던 무렵, 괴테가 튀링엔발트에 있는 키켈한(861m) 정상에 올라 그곳의 수렵인 산장 벽에 '산마루마다 쉼 있고 나뭇가지 스치는 바람 한 점 없네.' 로 시작하는 '나그네의 밤 노래' 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이에 앞서 연간 300일 안개가 끼며 브로켄 현상을 일으키는 하르츠(Harz) 고산 지대를 겨울철에 혼자 올랐다.

 

괴테는 등산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후년 스위스를 편력한 그의 산행은 시대적으로 크게 앞서 있다. 그리하여 괴테가 산을 통해서 얻은 영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 등 그의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괴테는 남들이 아는 시인이기에 앞서 철두철미 자연아(Naturkind)였다.

 

산이라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깊고 다양하다.

성서의 첫머리 창세기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노아의 방주(方舟)가 홍수때 아라랏트산에 걸렸다는 이야기지만 이 아라랏트(Ararat, 5165m)는 실제로 터키 영내에 있으며 구소련 및 이란과 접경하고 있다.

또한 인류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던 곳이 모리아산이고, 그 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유명한 10계명을 받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산을 신성시해서 입산을 금지하는 데가 여기저기 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눈 덮인 8000미터 고봉들을 눈앞에 볼 수 있는 포카라(Pokhara)의 명봉 마챠푸챠레(Machapuchare, 6993m)가 그 좋은 예이다. 그 모습이 알프스 마터호른과 같다고 해서 '네팔의 마터호른' 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산은 20세기 중반 영국 등반대가 시등했을 때 정상을 밟지 못했다.

 

이처럼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데 대해 서구인들은 산을 적극적으로 생활 속에 끌어 넣어 자연과 친화 관계를 맺고 있다. 독일 남쪽 지방에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라는 광대한 삼림지대가 있다.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검게 보인다고 '검은 숲' 으로 불리는 여기서 도나우강이 시작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학촌으로 이름난 프라이브르그(Feiburg)는 이 검은 숲의 중심지인데, 인구 10만 남짓한 고도(古都) 한가운데 맑은 물이 흐른다. 지방 사투리로 '베힐레' 라는 이 도랑은 다름 아닌 슈바르츠발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도심으로 끌어서 고도 프라이브르그를 더욱 미화하고 있다.

 

 '자연보호' 라는 구호가 우리 귀에 익은 지도 오래인데 독일의 자연보호는 언제나 환경보호와 붙어 다니는 것이 돋보인다. 독일어권에 속하는 스위스 발리스 알프스의 명봉인 마타호른 산록에 체르맛(Zermatt)이라는 아름다운 산촌이 있는데 여기는 차량 진입이 금지되어 있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의 하나겠지만, 그들은 체르맛에서 7킬로미터 밑에 있는 테슈에 대형 주차장을 만들고 그 사이를 등산열차로 연결하고 있다.

 

그들의 자연은 아름답고 풍부해서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 세계는 자연미와 인공미가 공존하는 것이 특색인데, 그 자연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까닭은 그들의 꾸준하고 줄기찬 노력에 있다.

물론 서구사회에도 고민이 적지 않으며 멸종 위기에 있는 산양 같은 포유동물이나 엔치안이라는 고산화초 등의 보호문제가 역시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산과 인간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다.

신앙과 공포의 대상에서 개발 단계를 거쳐 지금은 현대인의 도피처로 옮겨가고 있다.

태초에 원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슈테환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제3의 비둘기' 신세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오다 끝내 지친 나머지 문명사회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대자연으로 도망치려 한다.

 

 20세기 중반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개봉 가운데 하나인 마칼루(Makalu, 8481m)를 초등정한 프랑스 등반대장 쟝 프랑코가 '등산은 스포츠요 탈출이며 정열이고 일종의 종교' 라고 했는데 산과 인생을 밀착시키는 조건은 등산이다. 이러한 등산은 20세기 후반에 보편화되고 급기야는 세속화하면서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이 되던 해, 어느 하루 그 정상에 50명이 넘는 사상 최다수의 등정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가 1996년 5월 10일에 일어났다.

이른바 상업등반대(Commercial Expedition) 운영으로 1인당 7천만 원의 거액을 받고 세계 최고봉 등정 희망자를 모집한 등반대가 8천미터 고소 능선에서 8명의 희생자를 내는 대참사를 빚었다.

 

산과 사람의 만남은 미지에 세계에 대한 도전과 한계상황에서의 자기극복이 목표요 동기가 된다.

이러한 본래의 의미 즉, 고전적 의미가 시대의 추이에 따라 다소 퇴색하고는 있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히말라야 최고봉급 14봉을 혼자 모두 올라 세계 최강의 등산가로 인정된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 )는 많은 산서(山書)를 저술한 것으로도 으뜸 가지만 그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책이 있다.

 

 <산을 옮긴다ㅡ한계 도전자의 신조>(Berge VersetzenㅡDas Credoeines Grenzgangers)가 그것인데 그의 표제는 물론 '겨자씨의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 는 성서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 것으로 한계 도전자로서의 등산가의 신조로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산악계의 거인 메스너의 등산관 내지는 등산정신이 이 표제에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

메스너가 1978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고 같은 계절에 낭가 파르바트를 혼자 오르내려 20세기 산악계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데는 그의 남다른 신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산은 천연자연이며 그 산격(山格)이 웅대, 장엄 그리고 정일함을 지닐 때 명산(名山)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명산으로서의 자기 현시(顯示)는 인간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

지구의 오지에서 고고(孤高)한들 그 존재를 누가 알랴?

 

 사람마다 운명이 있듯이 산에도 운명이 있다.

그리고 등산가와 산이 만날 때 그들 운명이 결정된다.

위대한 등산가와 세계의 명산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고 빛을 발휘했는데,

250년의 세계 등산의 역사에서 에드워드 윔퍼와 마터호른, 모리스 에르족과 안나푸르나 그리고 헤르만 불과 낭가 파르바트 등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이 산을 세상에 알리고 그 산으로 인해 그들이 유명해졌다.

세계 산악 문학의 고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알프스 등반기>와 <인류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그리고 <8000미터 위와 아래> 등은

윔퍼와 에르족과 불의 불멸의 알피니스트로서의 아이덴티티이며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 하인홀드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