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박영석 대장 위령제 *-

paxlee 2011. 10. 31. 21:36

 

          박영석 대장 위령제… 1일부터 서울서 추모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에 대한 수색작업이 일단 중단됐다. 대한산악연맹 관계자는 29일 "수색작업이 어제부로 중단됐으며 이를 박 대장 등의 가족에게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후 추가수색 여부는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29일 낮 카트만두에 도착해 실종자 가족들과 협의하고 현지 사고대책반의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들은 뒤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 사진=연합뉴스

’박영석 원정대’ 가족 4,200m 베이스캠프서 위령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가 30일 오전(카트만두 현지시각) 해발 4,200m의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또 박대장 일행에 대한 국내 위령제가 내달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산악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대한산악연맹은 “이인정 연맹회장과 탐험대 가족 등 8명이 30일 오전 카트만두에서 헬리콥터 2대에 나눠 타고 떠나 사고현장 주변을 돌아본 뒤 베이스캠프에서 위령제를 지냈다”고 밝혔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돌탑 앞에서 거행된 위령제는 서울에서 준비해온 막걸리와 사과, 배 등을 실종자 사진 앞에 놓고 참석자들이 술을 따르고 절을 지내는 형식으로 30분가량 진행됐다.

위령제에는 이 회장과 실종자 가족 등 8명를 비롯해 박 대장과 함께 탐험에 나섰던 기존 대원 2명, 사고 대책반의 김재봉 산악연맹 전무이사, 김재수 대장 등 2차 수색대원 등이 참가했다. 앞서 연맹은 전날 수색작업 현장의 기상악화 등을 고려해 올해 수색은 종결했다며 내년 이후에도 수색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수색현장에는 눈이 오고 돌이 떨어지는 등 작업여건이 계속 나빠져 2차 사고 우려가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연맹 관계자는 이날 카트만두에서 한 언론브리핑을 통해 “박 대장 일행에 대한 국내 위령제가 다음날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서 산악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라며 “현재 카트만두에서 영정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 회장과 실종자 가족, 김대수 대장 등이 31일 모두 귀국할 예정이고 카트만두에는 연맹관계자 등 4~5명이 남아 짐을 정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카트만두의 한 사찰에서 30일 오후 박대장 일행을 기리는 위령제를 조촐하게 지낼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종자 가족은 아직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초 '산악인의 장(葬)'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지난 18일 실종된 고(故)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처음으로 ’산악인의 장’으로 치러진다. 대한산악연맹은 30일 故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이 한국 산악계에 미친 영향과 국민의 애도 물결 등을 고려해 대한민국의 산악 관련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산악인의 장’으로 치른다고 밝혔다.

산악인으로서 치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장례식인 ’산악인의 장’이 치러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영석 탐험대의 분향소는 11월1일 오후 5시부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에 마련되며 합동 영결식은 3일 오전 10시에 엄수된다.

영결식은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을 장례 위원장으로 하고 대한산악연맹, 한국산악회, 한국대학산악연맹 등 산악단체와 골드윈 코리아, LIG손해보험 등 후원사와 동국대학교 산악회 등 각 대학 산악회 등이 모두 참여한다. 대구에 연고가 있는 신동민(대구대), 강기석(안동대) 대원을 위해서는 대구에 제2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산악연맹은 대구의 제2분향소 설치를 위해 세부 사항을 조율 중이다.

한편, 히말라야에서 사고가 발생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을 경우 탐험대원들의 유품을 태우는 ’천도재’를 카트만두 현지의 사찰에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장례에서는 유품을 태우지 않고 유가족의 품에 돌려보낼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이번 분향소에는 유골함이나 유품함 없이 영정사진만 놓이게 된다.

 

박영석과 함께 실종된 두 젊은 대원은 누구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오른쪽부터)과 강기석, 신동민 대원이 지난 2009년 에베레스트 원정 길에서 밝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석 원정대는 지난 18일 '가스, 낙석이 많아서 하산한다'는 교신을 마지막으로 실종됐다. /연합뉴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박영석(48) 대장과 함께 실종된 강기석(33), 신동민(37) 대원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젊은 산악인들이다. 강 대원과 신 대원은 2009년 5월 20일 오후 3시(한국시간 오후 6시15분) 박영석 대장과 함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의 남서벽과 서릉을 따라 등정했다.

종전에 누구도 밟은 적이 없는 이 난벽 등반로에는 ’코리안 루트’ 또는 ’박영석 루트’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붙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넘어 서릉을 통해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것은 1982년 러시아팀 외에는 없었고 서릉 등반도 1978년 유고팀을 포함해 두 차례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라서 유고팀은 하산하는 과정에서 정상에 오른 대원들이 모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박 대장은 1991년과 1993년,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는 추락해 크게 다쳤고 두 번째는 두 대원이 다쳤고, 2007년 신루트 도전 때는 눈사태를 만난 두 대원이 숨지고 말았다. 박대장과 함께 산악사에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신 대원과 강 대원의 다음 행선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로체 남벽과 함께 ’세계 3대 난벽’으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남벽이었다.

역시 박영석 대장과 함께 원정대를 꾸린 신 대원과 강대원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처음 도전한 것은 작년 4월이었지만 실패로 막을 내렸다. 강 대원은 전진 캠프를 떠나 1캠프를 구축하러 갔으나 낙석으로 오른쪽 무릎이 10㎝가량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카트만두로 후송됐다.

원정대는 5월까지 장비와 식량을 정비하고 등정을 위한 적기를 기다렸으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리는 눈과 눈사태 위험 때문에 철수하고 말았다. 이들 대원은 작년에 겪은 신난한 등반에 굴하지 않고 박 대장과 함께 이번에 안나푸르나 남벽을 재도전하다가 변을 당했다.

박영석 원정대를 후원한 노스페이스는 이번 등반이 ’알파인 스타일’로 시도된다며 등반 전에 그 의미를 크게 부각했다. 알파인 스타일 캠프를 점차 건설해가며 정해진 능선을 따라 오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식량과 침낭, 장비 등을 스스로 짊어지고 떠나는 자급자족 방식의 등반을 의미한다.
꼭대기에 오르는 결과를 중시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가 아닌 험한 길을 선택해 오르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지향하는 등반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신동민 대원은 185㎝가 넘는 키에 무척이나 힘이 세 ‘괴력의 사나이’로 불렸으며 박영석 원정대가 에베레스트를 남서벽으로 등정할 때도 선두에 섰다.

최고의 등반가로 꼽히는 박 대장은 신 대원에 대해 “8,000m 위에서 똑같은 속도로 하켄을 박으며 등반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신 대원은 아내와 세 자녀을 두고 있다.

강기석 대원도 그에 못지않은 끈기 덕분에 ’차돌 같은 사나이’로 불리며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한국산서회(山書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학술에도 관심을 뒀으며 등산용품 업체 직원으로 일하면서 개인 등반을 위해 휴직해 이번 등반에 나섰다. 강기석 대원은 미혼이었다. 국내 산악계에서는 한국에서 산악 정신을 제대로 고취할 차세대 주자들을 잃었다는 슬픈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인정 산악연맹회장 "산이 박영석 대장 불러"

“세계산악인들, 그랜드슬램 이룬 박 대장 인정”

 

“박영석 대장은 산에 갔다온 뒤 늘 ’이젠 그만 가겠다’고 말했지만 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나섰다가 지난 18일 신동민과 강기석 대원과 함께 실종된 박 대장 일행의 구조ㆍ수색작업을 총괄지휘하는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29일 올해 수색작업은 종결했다고 밝히며 자신과 박대장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수색작업 상황을 파악하고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자 이날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날아온 이 회장은 가족들을 위로한 뒤 카트만두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언론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약을 먹고 있다”며 “20일전 박 대장과 만나 밥도 먹고 위스키도 마시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박 대장이 대학후배로 그의 연애시절부터 알고 지내왔다는 이 회장은 “걔는 산에 못가게 하면 죽는다. 죽음으로써 살아난 것이다”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그동안 수색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제는 어렵겠구나’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하지만 찾을 때까지 내년 이후에도 계속 수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박 대장 사고 때문에 난 평생 괴로운 심정으로 살아야 할 처지”라며 “수십년전 내가 히말라야 마나슬루(해발 8,156m) 등정에 네번째로 도전해 성공한 것을 보고 그 친구가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박 대장이 결코 유명세를 타려고 산에 다닌 것은 절대 아니라며 그는 산에 갈 때마다 산의 신(神)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회상했다.

이어 “박 대장은 모교 석좌교수지만 그동안 대중앞에서 나서지 않은 것은 산이 자신을 살렸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박 대장이 세계산악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질문에는 “최근 열린 세계산악연맹 회의에 참석했더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인들이 한결같이 박 대장에게 관심을 표명했다”면서 박 대장은 히말라야 14좌와 3극점,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거나 답사해 ’그랜드슬램’을 이룬 세계적인 산악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박 대장이 선후배간에 인정있고 의리있게 지냈다면서 최근엔 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수색해온 대원들에게 모레까지 철수하라고 명령했다”며 “올해 수색은 종결하고 눈물을 흘리며 철수하겠지만 내년 이후에도 계속 수색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