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악우여! 이제 고향으로 함께 가자꾸나 *-

paxlee 2011. 8. 31. 22:14

 

              악우여! 이제 고향으로 함께 가자꾸나

 

고 박행수 대원 시신 운구… 윤치원 대원 끝내 못 찾아

 

‘자유를 향한 2011마나슬루 원정대’는 작년 여름부터 준비하여 가을과 겨울 동안 대원들을 대상으로 등반보다는 시신 수습

작업에 중점을 둔 훈련을 해왔다. 직접 운구장비를 제작하여 한라산에서 사람을 태우고 내리는 훈련을 하며 단점을 보완

하고, 또 논의하여 수정하기를 몇 차례, 마침내 우리는 많은 운구장비를 가지고 네팔 카트만두로 향했다.

3월 18일 방콕을 거쳐 카트만두에 도착한 우리는 마음이 급했다. 대장 박상수, 등반대장 이정현, 대원 김덕신, 박남수, 김미곤,

윤욱현 그리고 촬영을 담당한 신현한 피디 등 총 7명으로 구성 되었다. 현지에 도착해서는 고용인들을 먼저 만나 인사를 나눴

다. 카트만두에서 4일 동안 준비를 마친 뒤 대원들이 먼저 고라카를 출발했다. 고라카부터 카라반을 시작하면 카라반 기간이

길어서 대원들의 컨디션 조절과 등반을 위한 워밍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년 전, 우린 다섯 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팀으로 이곳 마나슬루를 찾아왔으나 단 세 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돌아온 이들도

몸이 성치 않았고, 손과 발에 심한 동상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얻은 채 살아왔다. 우린 아직 마나슬루에 남아 있는

나머지 두 대원들을 찾아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다시 이곳에  찾아 온 것이다.
4월 11일에는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라마제를 지냈다. 등반이 시작되기 전 매번 지내는 라마제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현지인

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우리 대원들의 마음자세를 바로 잡기 위한 하나의 행사이다.라마제단에는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

의 사진이 놓여있다. 모두들 그 사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숙연하게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제발 우리 팀이 단 한 명도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등반을 마치기를 바라며, 동시에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을 꼭 찾아 고국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4월 12일 새벽 4시, 대원들이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라마제단 앞에 모였다. 박상수 대장은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에게

절을 올리고 우린 묵념을 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하다. 셰르파 7명과 대원 5명, 카메라맨 1명 이렇게 총 13명이 출발

했다. 랜턴 불빛과 숨소리뿐, 베이스캠프에서는 아직도 랜턴 불빛이 우릴 지켜보고 있다. 이날 우린 캠프1까지 짐을 운반하

고 돌아왔다.
윤욱현 대원과 김덕신 대원은 히말라야가 처음이다. 이들은 단지 자신의 후배인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을 찾기 위해

온 것이다. 등반을 해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야한다는 마음 하나로 이번 원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신현한 피디(PD)

그리고 나(김미곤)또 이정현 등반대장과 박남수 대원은 고인들과 생전에 는 작년에 이들과 같이 등반했다.

신현한 피디는 그저 이번 등반을 꼭 기록을 해야 한다며 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작년 대원들이 모두 많이 다쳐서 등반

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나 혼자 참여하게 되었다. 셰르파는 작년에 같이 등반했던 2명과 시신수습 경험이 많은 셰르파

5명으로 구성했다.

 

수색작업과 시신운구를 위한 장비를 4캠프로 수송하고 있는 대원들과 셰르파

 

2개 조로 나누어 루트작업과 수색 실시

이번 마나슬루 날씨는 작년에 비해서 더 좋지가 않다. 쌓여있는 눈도 많고, 또 많이 내리고 있다. 대신 작년보다 이곳을 찾은

팀이 많다. 대규모 팀으로는 인도 군인 팀과 17명으로 구성된 이란 팀이었고, 대만 팀도 있었다. 우린 베이스캠프에서 다른

팀과 협의를 하여 3캠프까지 루트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다. 각 팀에서 셰르파 4명과 스노우바, 로프를 1000m씩 사용했고,

우리 팀은 셰르파 3명과 내가 로프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이정현 등반대장을 비롯해 나머지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각 캠프

까지 로프가 깔리면 짐 수송과 캠프를 구축하기로 했다.
4월 16일, 셰르파 6명과 나 그리고 신 피디 이렇게 8명은 2캠프로 루트작업에 나섰다. 눈이 무릎까지 빠져 몇 걸음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작년과 비교해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우선 우리 A조가 2캠프까지 로프

작업을 하고 나면 B조가 뒤를 이어 3캠프까지 작업을 하기로 했다.
로프를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니 허리에 찬 스노우바가 달그락거린다. 1캠프에서 2캠프사이가 제일 위험한 곳이다.

상습적으로 눈사태가 일어나는 구간을 지나가야 한다. 이곳을 지날 때는 모두 숨소리도 죽이고 말도 하지 않는다. 혹시나

머리 위의 세락이 무너지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하는 구간이다. 위험 구간을 통과하고 나니 셰르파들이 오늘은 작업을

여기까지 하고 내려가자고 한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12시다.
나는 나이 많은 셰르파에게 이야기를 해서 작업을 좀 더 하자고 했다. 그래야만 내일 2캠프까지 작업을 완료할 수 있다고 말

하고 내가 앞장을 서서 진출하자 셰르파들이 내려가지 않고 뒤를 따라온다. 얼마나 올랐을까? GPS로 고도를 보니 6200m를

가리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다. 날씨도 안 좋아 지려고 한다. 이렇게 오후까지 날씨가 좋기는 처음이다. 작업을 마

치고 1캠프으로 내려오니 우리 팀 대원들이 모두 올라와 있다가 우리에게 차를 건네준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피곤함이 사라

진다.
이제 1캠프에 우리 텐트가 3동이나 되었다. 다른 팀까지 합하면 총 20동이 넘는다. 다른 팀들도 모두 올라온 것 같다. 밤에

바람이 조금 불더니 새벽이 되면서 조용해진다. 윤욱현 대원이 밤에 바람소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새벽

에 일찍 일어나 물을 끓인다. 막내라고 항상 한 발 먼저 움직인다.
이정현 등반대장이 “여기는 히말라야야. 후배가 무조건 물 끓이는 거 아니야. 컨디션 좋은 사람이 더 움직여야지” 라고 하면

서 스스로 코펠을 집어 든다. 아침을 대충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짐이 많다. 2캠프로 올라갈 짐과 로프들을 보고 박남수 대원

이 조용히 로프 한 롤을 더 집어넣는다. 윤욱현 대원은 고소적응을 위해 그냥 1캠프에 남아서 텐트 주위 정리를 했다.

 

수색작업을 위해 1캠프를 향해 설릉을 오르는 대원들과 셰르파들

 

어제 로프설치 마지막 지점까지 오니 오전 11시. 2캠프 자리가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수송조인 김덕신, 박남수, 이정현

대원은 셰르파 3명과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박 대장님은 무전으로 날씨가 안 좋아 질 것 같으니 하산조는 서둘러서 베이스

캠프로 내려오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2시가 되니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겨우 안심이 된다. 2캠프의 큰 세락과 크레바스가 우리를 눈사태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저녁이 되면서 바람이 잦아들다가 새벽이 되더니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고민이었다. 원래 목표는 3캠프까지 로프를 깔아 놓

고 베이스캠프로 내려가기로 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고민이었는데 일단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라는 박 대장님의

무전이 왔다. 우리는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화이트 아웃과 눈이 내리는 바람에 어제 올라온 길이 없어져 애를 먹었다. GPS로

확인하면서 신속하게 움직여  1캠프을 거쳐 베이스캠프에 겨우 도착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날씨는 더욱 나빠지고 내리

던 눈은 눈보라로 변해버렸다. 이후 매일 같이 눈이 내렸다.
4월 22일, 1년 전 바로 오늘 우린 밤 10시 마지막 캠프를 출발하여 5명의 대원이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국 2명의 대원은

돌아오지 못했고, 3명의 대원은 심한 동상을 입고 카트만두 병원으로 후송돼야만 했다. 저녁에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의 제

를 지내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제사 음식으로 제상을 차렸다. 제단 앞에 서니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이 우릴 보고

웃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제를 지내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7500m 지점서 박행수 수습 운구

4월 24일, 날씨가 좋아져 다시 1캠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이정현, 박남수, 김덕신, 윤욱현 대원과 셰르파 5명은 7300m지점

에서 고 윤치원 대원을 수색하고, 나와 셰르파 2명은 4캠프까지 구축하고 시간이 되면 박행수 대원을 수색하기로 했다. 전

대원과 셰르파가 2캠프까지 같이 움직였다. 2캠프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위계룡 단장님께서 오셨다는 무전이 온다. 반가운 소

식이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았다. 우린 계속 밀고 올라가 세락 밑에 3캠프를 설치했다. 머리가 멍하다. 해발

 6900m인 이곳에서는 작년 우리의 마지막 캠프가 보인다. 코끝이 찡해진다.
4월 27일, 7200m까지 로프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윤치원 대원을 수색해 보지만 보이질 않는다. 고 윤치원 대원 실종위치는 7200m~7300m사이였다. 마지막 목격 지점을 찾아보았지만 지형은 많이 변해 있었다. 우린 다시 3캠프로 내려와 계획대로

이정현, 박남수 대원은 셰르파 4명과 수색하기로 하고 나와 셰르파 2명은 4캠프까지 진출해 박행수 대원을 수색하기로 했다.
4월 28일, 4캠프로 향했다. 7300m 지점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지만 윤치원 대원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우린 B조

에게 수색을 맡기고 4캠프로 향했다. 4캠프에 도착하니 오후 2시. 텐트를 치고 차를 한 잔 마신 후 수색에 나섰다. 작년에 같

이 등반했던 셰르파 싼누와 상의하며 그가 예상하는 위치로 향했다. 저 앞에 뭔가 노란 물체가 보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10m 앞까지 왔을 때 느낌이 왔다. 그 앞에 서는 순간 난 숨이 콱 막히고 다리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세

상이 노랗게 변한 것 같았다. 바로 행수였다. 그는 반듯하고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셰르파들이 나를 부축했다. 이제 그를 찾았으니 내일 다시 오자고 나를 끌고 텐트로 향했다. 난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베이스캠프로 ‘행수를 찾았다’고 무전을 보냈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물만 마시며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4월 29일, 셰르파 2명이 3캠프에서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었으나 우린 그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행수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정도 셰르파 2명이 도착했고, 이제 5명이서 서서히 행수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용할 고정로프와 시신 운구용 로프를 따로 설치했다. 내가 내려가면서 시신 운구용 로프를 설치하고 그리고 네 명의

 셰르파가 1명은 확보를 보고 3명은 시신 옆에서 그를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려오다가 갑자기 행수 시신과

함께 셰르파들이 미끄러지며 3m 아래로 떨어졌다. 얼음이 깨지면서 아이스스크루 하나가 뽑힌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떨

리는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며 그들을 진정시키고 셰르파들 먼저 자리를 잡게 한 후 행수의 시신을 추슬렀다. 이곳에서 약 1시

간을 소비하고 나니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들과 함께 하며 조금씩 행수를 다시 운구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청빙 구간을 통과했다. 그 순간 난 ‘이제 행수를 한국으로 데려 갈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했다. 박남수, 신 피디 그리고 이정현 등반대장이 우리를 돕기 위해 올라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이제 3캠프까지 안

전하게 내려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3캠프에 도착 할 때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캠프로 고 박행수 대원의 주검을 후송하는 대원들과 셰르파들

 

윤치원 박행수 사진 마나슬루 정상에 묻어


4월 30일, 2캠프에서는 김덕신, 윤욱현 대원이 헬기장을 만들고 있었다. 2캠프까지 전 대원과 전 셰르파가 동원되어 안전하게

 행수를 내렸다. 이제 헬기가 와서 그를 데리고 카트만두로 가기만 하면 된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단 한 명의 셰르파도 다치지 않고 행수를 이렇게 기적적으로 데려가게 해주어서…”
행수 유가족과 통화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행수 사진을 정상에 묻어 줄 수 있어요?”
마지막 마을에서 행수를 내려 하얀 천으로 그를 덮어주고 제를 지낸 후 단장님이 행수를 데리고 카트만두로 향했다. 이제 남

은 일은 고 윤치원 대원을 찾는 일 그리고 그들의 사진을 정상에 묻는 일이다.
5월 5일, 아침을 먹고 대원 4명과 셰르파 5명이 출발했다. 라마제단 앞에서 기도를 한 후 박 대장님은 “이제 마지막이다” 라

고 하셨다. 2개 조로 나누어 1개 조는 정상에 두 대원의 사진을 묻어주고 오고, 1개조는 마지막으로 윤치원 대원 수색을 한 번

 더 하라는 것이었다. 다 찢겨진 텐트 속까지 샅샅이 한 번 더 수색을 하라는 당부였다. 위로 향하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행수를 내리면서 체력을 너무 소비했고, 회복이 덜 된 것 같았다
5월 7일, 7300m 지점에서 한 번 더 수색을 하고 나와 박남수 대원 그리고 셰르파 2명은 4캠프로 향하고 이정현, 신 피디는 3

캠프로 내려갔다. 밤새 바람이 심했다. 6월 8일 박남수 대원은 정상을 가지 않겠다며 3캠프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나를 위한

결정인 것 같았다. 난 하루 더 기다려보고 날씨가 좋으면 정상으로, 좋지 않으면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5월 8일 수색조가 윤치원 대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색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했다. 산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윤치원

형은 결국 영원히 마나슬루에 남기로 한 것일까….
난 밤 11시에 일어나 물을 끓여 마시고 밤 12시에 셰르파 2명과 같이 행수와 윤치원 대원의 사진을 가지고 정상으로 향했다.

밤새 쉬지 않고 걸었다. 산소를 쓰는 인도 팀이 내 앞에 갔다. 5월 9일 6시, 정상에 섰다. 그리고 두 대원의 사진을 정상에 묻

었다. 정상에 서면 기뻐야 하는데 어쩐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두 셰르파와 난 쉬지 않고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3캠프에는 이정현 등반대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 발가락을 보니 작년 동상이 걸렸던 엄지발가락이 다시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우린 6월 10일, 전 대원이 고 윤치원 대원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베이스캠프를 떠나 카트만두로 와서 행수를 만났다.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 준비를 했다. 6월 11일, 행수는 이제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행수의 가족들이 그를 배웅했

다. 화장터에서 행수의 가족이 내 등을 다독이며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 보내주게, 우리 행수 그래도 행복한 놈이네. 그만 울고 이제는 웃어”
‘정말 미안하다. 행수야! 이제 울지 않을게’
화장터에서 나와 저녁을 먹을 때야 행수 아버님이 웃음을 띠며 말씀하셨다.
“대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때서야 그의 가족들이 웃음을 보였고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이번 원정을 위해 애써 주신 많은 선, 후배들과 내팔 주재 영사관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다시 한 번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의 명복을 빈다.


마나슬루정상에 오른 김미곤 대원이 고 박행수, 윤치원 대원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 글 /  김미곤 대원\사진 /자유를 향한 2011마나슬루 원정대’ / 월간 마운틴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