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해외등반] 유럽 알프스 [1] *-

paxlee 2011. 9. 16. 22:29

 

                                    [해외등반] 유럽 알프스

 

뻔뻔한 알프스 원정대의 생고생 5종 세트

한미선, 채미선, 이명희(39) 세 명의 언니는 모두 동갑내기이며 함께 즐겨 원정을 나가는데, 통상 ‘아줌마원정대’로 불린다. 이들과 뉴페이스인 아가씨 서화영(34·설우산악회), 그리고 내(김영미·31·강릉대산악부)가 함께 줄을 묶게 되었다. 나름 ‘젊은 것들’에 속하는 두 아가씨는 도매금으로 아줌마로 넘어가는 것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이다.

나는 산을 다니기 시작한 후 18번의 크고 작은 해외 등반 중, 여자끼리만의 등반은 처음이다. 동성끼리지만 나에겐 이 부분이 가장 생소하다. 각기 다른 산악회에 소속돼 인수에서, 빙장에서, 암장에서 혹은 동대문 장비점 골목 귀퉁이에서 만나던 인연들이 알프스까지 발이 닿았다. ‘우먼 알프스 펀 익스페디션(Woman alps Fun Expedition)’이라는 팀 명칭대로 즐거운 건 더 즐겁게, 힘든 것도 ‘펀(FUN)’하도록! 펀 펀(FUN FUN)하게~! 뻔뻔한 원정대가 되자면서 말이다.

산은 친한 친구의 집을 찾을 때처럼

우리는 샤모니의 조문행씨가 운영하는 알핀로제 게스트 하우스에 베이스를 차렸다. 이곳에서 로체샤르를 등정했던 변성호형, 파트너인 허한구형과 함께 아르장티에르(Aig. d'Argentiere·3,902m)의 밀리우(Milieu)빙하를 고소적응차 등반하기로 했다.


샤모니 도착 4일째, 제1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는 그랑몽테(Les Grands Montets)의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피부에 닿는 자욱한 안개가 서늘하다. 로낭(Rognons)빙하를 내려설 때만 해도 아르장티에르빙하 건너편의 산장이 보였다. 화이트 아웃으로 로낭빙하 위에서 두어 시간 동안 고생하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GPS로 좌표를 확인하며 산장으로 향하는 현지 등반가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양해를 구해 함께 산장까지 동행한다.

한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를 화이트 아웃으로 헤매다 도착한 산장-. 그러나 예약이 되어 있지 않았다. 산장 예약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실수다. 하지만 그들의 배려로 빈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CAF(Club Alpine Francais)에서 가입한 산악보험증으로 50%의 할인을 받고 산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산장을 출발해, 6명이 안자일렌을 하고 60도 정도의 밀리우빙하로 오르는 헤드랜턴 불빛을 좇아간다. 금방 병풍처럼 펼쳐진 레 드로아트(Les Droites) 뒤로 해가 솟아오른다. 찬 공기가 신선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할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고소적응차 쉬엄쉬엄 6시간 만에 아르장티에르 정상에 도착했다. 적응이 되면 3시간이면 넉넉히 도달할 수 있을 듯싶다. 어쩌면 뛰어 올라가듯 가고 싶은 마음이다. 정상에서 코르테스(Courtes), 드로아트(Droites), 자르딘(Jardin)의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느긋하게 햇살을 즐기며 같은 코스로 하산해 산장에 도착했다.

하루 더 머무르겠다는 계산으로 산장에 도착했으나 산장 주인은 굉장히 심하게 화가 난 상태다. 우리의 배낭을 걷어차며 당장 5분 내로 산장을 나가라며 화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쫓겨나는 기분으로 로낭빙하 근처에 비박지를 잡았다. 기분은 몹시 불쾌했지만, 그것만 잊는다면 잠이 들기에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 코스믹 에귀디미디 케이블카에서 발레브랑쉬 설원으로 내려서는 대원들.
샤모니에 도착해, 우리가 잘못한 부분을 확인하고 사과하기 위해 프랑스어에 능통한 조문행 사장을 통해 산장에 연락했다. 그들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첫째 산장 예약을 안 한 점, 둘째 대원 중 한 명이 보험증이 없었으나 특별히 할인해 준 점, 셋째 산장을 사용하고 깨끗이 청소하지 않고 나갔다는 점이다. 표면적인 실수 외에 서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복합적으로 발생한 문제다.

근본적인 것은 의사소통의 문제와 문화의 차이로 인한 오해다. 결국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사과도 못 한 상황이라 개운치가 않다. 이번의 경우를 통해 등반보다 문화적인 것, 의사소통에 관해 다시 반성하며 배운다. 산을 찾을 때엔 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때처럼, 산의 예절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늘 숙지해야 하겠다.

외국 남자 등반가들에게 엉덩이 보여줄 수야

샤모니에 돌아오니 한미선 언니가 도착해 있다. 회사의 상사 눈치를 보며 어렵게 얻은 휴가로, 알프스를 찾은 한미선 언니는 심기가 불편하다. 즐거운 등반을 방해하는 날씨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기분이다. 샤모니에 비가 내리면 3,000m 이상엔 눈이 쌓인다. 그러다보니 샤모니는 저온현상으로 춥다. 샤모니에서 멋진 유럽 남자들 틈에 끈나시티 한번 입어보자고 준비했으나 카고백 구석에 구겨져 있고, 우모복을 입고 시장을 보러 간다.

▲ 코스믹 에귀디미디 얼음동굴을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지는 그랑드조라스의 전경과 구름바다.

눈 비 안 오고 바람이 불지 않는 산은 없으니, 맑은 날만 골라 산에 갈 수는 없다. 결국 샤모니 근교 2,000m대에서 대상지를 찾아 브레방(Brevent), 발로시네(Vallocine), 르브에(Le Buet), 가이앙에서 암벽등반을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락블랑(Lac Blanc), 몽탕베르(Montenvers), 플레제르(Flegere) 등지에서 우산을 쓰고 트레킹을 하며 짧은 휴가를 내어 온 한미선 언니의 등반욕구에 밸런스를 맞췄다.

 

한미선 언니는 휴가 동안 샤모니에 12일간 체류하며 10일 동안 비만 맞고 3,000m 이상의 벽은 코스믹 리지와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3842m) 레뷔파 루트를 등반하고 귀국했다. 코스믹 리지를 하러 갔을 때도, 날씨가 좋지 않아 눈보라에 다시 샤모니를 내려가려고 했다.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운 좋게 3,000m 아래로는 구름바다를 이루더니 하늘엔 해가 떴다. 에귀디미디 설원의 안부(Col du Mid·3,532m)에 텐트를 치는 동안 나는 호텔급 화장실을 준비했다.

자고로 높은 곳에선 먹고 싸는 게 제일 중요하되, 외국 남자 등반가들에게 언니들의 엉덩이를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은 사명감이었다. 날씨는 안 좋고 텐트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언니들은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현빈 노래만 나오면 현빈 닮은 등반가를 데려오라고 한다. “현빈! 현빈! 현빈!” 아무래도 언니들이 고소가 왔나보다.


여자들만 있다 보니 등반 얘기를 빼면, 명희 언니의 아들 보건이 이야기나, 한미선 언니의 딸 유빈이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원정을 준비하며 주말에 함께 등반할 때, 두 아이들의 아빠들은 알래스카와 스페인으로 각각 등반을 떠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언니들은 두 아이를 산에 데려와 함께 등반해야 했다. 아이들도 이런 생활이 익숙한지라 하루 종일 산에 있어도 힘든 줄 모르는 것 같다. 채미선 언니가 둘째를 더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면 언니들은 애부터 낳고 오라고 한다. 그래도 가장 늦게 결혼한 채미선 언니가 가장 신혼인가보다. 말만 터지면 ‘신랑님’ 얘기다. 그런 말들 속에 언니들이 등반할 때보다 더 진중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영미야, 결혼은 하지 마. 아무래도 애 낳고 시댁 챙기다 보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데엔 한계가 있어.”

한계상황에서 자신의 자아를 계발하고 등반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언니들은 본인 스스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본다.

▲ 그랑카푸생 보나티 루트의 첫버째 트레버스 구간을 건너는 대원.
 
2박3일의 야영 장비를 등에 짊어지고 5개의 퀵드로와 3개의 슬링과 자일 한 동, 아이젠을 사용해 코스믹 리지를 3시간 30분 만에 등반했다. 에귀디미디 정상에 도착하니 기상예보대로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서 다시 흰 눈이 설원을 향해 내려앉는다.

“영미야. 나 발가락 없으면 앞으로 등반 어떻게 해!”

8월 1일, 드디어 2일 이상 연속으로 좋은 날씨가 처음으로 찾아왔다. 한미선 언니를 배웅하고 우리는 그랑카푸생(Grand· Capucin3,838m)으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헬브로너(Helbronner)로 넘어가 케이블카 근처의 설원에 텐트를 치고 루트 파인딩과 짐 데포를 위해 그랑카푸생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등반길이 400m의 벽 앞에서 등반을 마치고 하강하는 날렵한 가이드와 손님을 만났다. 그들은 당일에 샤모니에서 출발해 벽을 5시간 만에 등반하고 한시간 만에 하강했다고 한다. 벽 앞에서 개념도를 보며 더듬듯 루트를 확인하는 내 눈엔 체력 좋고 알프스에 경험이 많은 모습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러더니 스키를 타고 순식간에 설원 속으로 멀어진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기상해서 벽 앞에서 준비를 마치고 설사면을 올라서서 신발과 아이젠을 데포시키고 암벽화를 갈아 신으니 벌써 오전 8시다. 벽의 좌측에 3피치 정도의 고정로프가 있었다. 가이드들이 빠른 등반을 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하다. 캠 한 조 반(0.5호, 0.75호, 1호, 2호)과 60m 싱글과 더블로프 각각 한 동씩 두 동의 로프로 선등자만 등반을 하고 나머지는 주마를 쓰며 빠르게 올라갈 계획을 세운다.

트래버스가 잦고 날카로운 바위면에 닿아 자일이 심하게 쓸리며 손상돼, 2피치만 주마링하고 모두 등반을 한다. 한 피치에 한 시간의 속도가 계산된다며 나는 자정쯤에나 정상에 도착할 거 같다는 걱정을 한다. 명희 언니도 하강해서 좀 짧은 스위스 루트를 오르자고 한다. 채미선 언니는 이왕 온 거 맘먹고 끝까지 가보자며 강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 의지에 합심하고 나니 모두들 눈빛과 동작이 바빠진다.

 ▲ 코스믹 리지의 크럭스 구간에는 아이젠 홈이 파여있다. 뒤로 에귀디미디가 보인다.

             - 글·김영미(강릉대산악부OB) / 사진·원정대 / 월간 산 9월호 -
          -  원정대 / 2011 Woman Alps Fun Expedi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