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 [1] *-

paxlee 2012. 4. 14. 23:09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

 

1962년 정찰 등반을 시작으로 무수한 기록 배출
반세기에 이른 역사는 무엇을 남겼는가

 

세계 각국의 산악계에 있어 히말라야로의 진출은 자국 내의 산악문화가 성장했다는 자긍심에서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알프스 지역에서 알피니즘’이라는 근대등산 운동이 시작된 이후 1세기가 지나서야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원정이 이어졌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대등산이 태동하여 자국 산에 대한 개척을 거치고 나면, 그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상지로 눈을 돌려 등반영역을 확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전세계 산악인들에게 모험심과 정복욕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곳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세기 초 인도를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이 히말라야 지역을 측량하던 중 해발 8840m(당시 측정 높이)의 에베레스트를 발견했고, 19세기 후반부터 등산을 목적으로 한 세계의 탐험가들이 히말라야로 진출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진다.

 

이는 순수한 등산의지 외에도 제국주의적 국민의식의 반영이라는 측면으로도 볼 수 있는데, 19세기말 유럽 국가들이 대외팽창을 목적으로 한 히말라야 진출과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힘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돌파구로 이용되기도 한 점이다. 그리하여 1960년대 히말라야의 8000m급 14개 주봉들이 모두 ‘정복’될 때까지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일본, 스위스,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히말라야에 원정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근대적 의미의 등산이 시작된 것이 일제치하시절인 192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어 시작점부터 많이 뒤처진 감이 있었다. 그 시작도 1931년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산악회가 창립된 것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이고, 1930년대 이후에야 국내 산을 대상으로 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마저도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북이 분단되며 대상지의 절반과 더불어 2000m 이상의 산들을 모두 휴전선 너머로 넘겨주게 되어 히말라야에 산재되어 있는 설산을 등반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치 못하기도 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근대등산이 시작된 지 30여 년이 지나 국내산에 대한 초등과 등반방식, 등반루트 등에 눈을 뜨게 된 한국의 산악인들이 좁은 입지에 대한 반발적 욕구로 해외의 높은 산을 갈망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히말라야 진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1971년 1차 마나슬루 원정대가 2캠프로 향하고 있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원정대는 5캠프에서 김기섭 대원의 추락사로 등정이 좌절되고 말았다.

 

1962년 첫 진출과 성급한 도전


국내 최초의 히말라야 진출은 1962년 경희대산악부에서 떠난 다울라기리2봉(7751m) 원정이었다. 그 해 8월, 박철암 대장을 비롯한 김정섭, 주정극, 송윤일 등 4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험난하기로 이름난 다울라기리2봉 남면을 정찰하기 위해 출발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는 히말라야의 8000m 거봉들이 거의 초등되어 중국 쪽에 위치한 시샤팡마(8027m)만이 남은 상태였고, 7000m급 난봉에서 새로운 등로를 찾으려는 시도가 펼쳐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한국은 해외원정 경험이라고는 1960년 대만 옥산(3952m)을 등정하고 온 것밖에 없어 경험이 부족했으니, 다울라기리2봉 원정으로 히말라야 진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큰 의의를 지님과 동시에 조금은 이른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초의 히말라야 진출이라는 행위로 향후의 한국등산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울라기리에서의 정찰 등반은 실제 등반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이후 한국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은 1965년 중국과의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네팔이 히말라야 입산 금지를 표명하면서 한동안 이뤄질 수 없었다. 그동안 한국산악계는 국내 암벽코스의 개척등반과 일본 등지의 해외 등반으로 내실을 다졌고, 입산금지 조치가 풀린 1969년 이후 다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한국의 두 번째 히말라야 경험은 1970년 김정섭을 대장으로 한 추렌히말(7371m) 원정대였다. 이 원정대는 추렌히말 동봉 정상을 밟으며 한국의 첫 7000m급 등정과 추렌히말 동봉 세계 초등이라는 기록을 이뤄낸 것이었지만, 등정에 관한 일본원정대의 의문이 제기되어 국제산악계에서 초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추렌히말 원정으로 인해 한국의 산악계와 사회가 히말라야 원정이 지닌 국위선양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이때부터 국가사회적 명분과 이해를 같이하며 원정대가 조직되는 계기를 마련했음은 틀림없다.

추렌히말 원정으로 탄력을 받은 한국은 1971년 2개의 8000m급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하나는 다울라기리 정찰 원정부터 히말라야 경험을 축적한 김정섭이 마나슬루(8156m)를, 그리고 1962년 창립되어 체제정비를 마친 대한산악연맹이 로체샤르(8400m)를 목표로 원정대를 조직한 것이다. 특히 김정섭이 마나슬루 원정을 계획하게 된 것은 74년을 에베레스트 등정의 해로 잡고 그에 앞서 8000m급 등반경험을 쌓기 위함과 동시에 마나슬루가 56년 일본대에 의해 초등된 후 재등되지 않았다는 점 등의 판단에서였다. 그리하여 김호섭 대장을 필두로 김인식, 한이석, 최창돈, 김기섭 그리고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을 가게 된 김정심 등으로 조직된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진출했다.

 

한국으로서는 처음으로 8000m 등정을 목표로 등반을 진행하던 원정대는 일기가 급변하며 불어온 돌풍으로 김기섭 대원이 크레바스로 추락하는 희생을 남기고 마감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로체샤르로 원정을 떠난 대한산악연맹의 원정대는 서남릉으로 도전해 약 8000m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계속되는 악천후와 몬순이 다가오는 시기에 맞물려 철수하고 만다. 이로써 큰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71년의 두 원정이 불과 정상 몇백미터 앞에서 쓰라린 철수를 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마나슬루 등정을 목표로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동생 김기섭을 잃고 돌아온 김정섭, 김호섭 형제는 귀국 즉시 2차 원정대를 결성해, 이듬해인 72년 다시 마나슬루를 향해 출정하는 집념을 보였다.

 

총 대원 12명의 대부대를 편성한 원정대는 전년에 이어 순조로운 정상 공격을 이어갔으나, 3캠프를 덮친 눈사태로 김호섭, 안준행, 오세근, 박창희, 야스히사 등 5명의 대원과 셰르파 9명, 쿡 1명 등 총 1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며 원정을 실패한다. 이는 1937년 독일의 칼빈대가 눈사태로 16명 전원이 조난당한 사고 이후 두 번째로 큰 히말라야 사고로 기록된다. 마나슬루에서의 대참사를 겪은 한국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은 원정후원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분위기와 유능한 산악인들을 잃은 후유증으로 인해 3년 간의 공백기를 갖는다.

 

1974년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로의 열기는 1975년 한국산악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안나푸르나 1봉(8091m) 원정과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8848m) 원정, 그리고 1976년 김정섭의 집념이 반영된 제3차 마나슬루 원정대로 불타오른다. 한국산악회의 원정은 예정에 없던 코스 변경으로 인한 출발 지체 등으로 인해 애초 정찰이 목적이었던 대한산악연맹의 원정과 함께 고도순응 및 시등으로 마무리된다. 이듬해 떠난 마나슬루 원정대의 세 번째 시도도 기상악화와 팀워크 부재로 7700m 지점에서 와해되고 말아, 한국 히말라야 원정의 개척기를 주도했던 김정섭 형제의 마나슬루 도전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되었다. 이로 인해 마나슬루는 한국산악인에게 비운의 산으로 남고 말았다. 어쩌면 이는 한국산악계가 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국제산악계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한 도전을 한 탓에 연속적인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선구자들의 도전으로 인해 후일의 영광이 잇따를 수 있는 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다.

 

1977년 9월 15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태극기와 네팔기를 휘날리고 있는 고상돈 대원. 이 등정으로 한국은 세계 8번째 등정국이 되었고 고상돈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세계 최고봉 등정이 낳은 춘추전국시대


히말라야 진출 초기부터 실패와 아픔의 쓰라린 경험을 맛봤던 한국산악계는 1977년에 이르러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대한산악연맹이 3년에 걸쳐 계획한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고상돈 대원이 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를 휘날렸다. 이 소식은 한국 산악계와 국민들의 숙원을 성취한 사건이었고, 고상돈 대원의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는 무전통신은 환호를 넘어선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때의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인해 한국은 1953년 영국의 초등정 이후 14번째로 성공한 등정국이 되었으며, 국가별로는 8번째 등정국이 되었다.


에베레스트 원정의 성공이 한국산악계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듬해인 78년 출정한 한국산악회의 안나푸르나4봉(7525m) 등정을 비롯해, 80년 동국대산악부의 마나슬루 등정, 81년 성균관대산악부의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등정 등 원정대의 성공이 뒤따랐고, 은벽산악회의 안나푸르나 정찰, 연세대OB산악회의 푸모리(7145m) 정찰, 악우회의 바인타브락2봉(6960m) 원정 등의 다양한 원정활동이 80년대 초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로 계획되어 오던 원정대 조직에 반해 단위산악회나 대학산악부의 원정활동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또한 히말라야 원정 초창기부터 8000m급 고봉에 편중되던 원정대가 주변의 6~7000m급 봉우리로 향하는 원정대로 편성되는 모습도 보였다. 이와 함께 1982년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하나인 마칼루를 등정하고,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여성히말라야원정대였던 선경여자산악회의 람중히말(6983m) 원정대가 기형희, 윤형옥이라는 등정자를 배출하며 여성의 히말라야 진출을 본격화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처럼 1980년대에는 한국의 히말라야 진출 역사 이래 활발하고 의미 있는 원정들이 잇따랐다. 원정대의 수도 점차 늘어 7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2~3차례의 원정대가 히말라야를 향한 반면에, 80년 5차례, 81년 7차례로 점차 늘어나다가 82년부터는 거의 매해 10차례 이상의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떠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중에는 초오유(8201m),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와 같은 8000m급 14좌에 속하는 봉우리들을 향한 원정 뿐 아니라, 푸모리, 강가푸르나(7454m), 눕체(7855m) 등 7000m급 주변 봉우리들에 대한 원정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1982년 대전쟈일크럽이 성공한 고줌바캉(7806m) 등정은 한국 히말라야 사상 첫 세계 초등반이라는 업적을 달성했으며, 같은 해 푸모리 원정도 국내 최초 동계 초등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이후 83년 악우회의 바인타브락2봉 초등반, 남선우의 아마다블람(6812m) 동계 단독 초등, 허영호의 마나슬루 무산소 단독등정 등 새롭고 의미 있는 기록들이 배출되었다.


1980년대 초의 활발한 히말라야 진출은 중반을 지나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전히 매년 10개가 넘는 원정대가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목표로 히말라야를 찾았으며, 1986년 서울산악회의 원정은 실패에 그치기는 했으나,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3봉(7555m)을 동시에 목표로 삼아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2개봉 종주를 시작했다는 의미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히말라야 원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히말출리 북봉(7371m) 세계 초등정, 가우리샹카르 동계 초등정, 캉테가(6779m) 동계 초등정, K2(8611m) 한국 최초 등정 등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수많은 산악인들의 히말라야를 향한 염원은 계속 이어져 1988년에는 대한산악연맹이 준비한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등반에서 에베레스트와 로체(8516m)를 동시 등정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고, 1989년 광운대산악부의 바기라티3봉(6454m) 원정은 한국최초의 히말라야 거벽 등반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 렌포강(7038m) 서벽 초등, 눕체 북서봉(7745m) 동계 초등정과 같은 기록들과 가셔브룸1봉(8068m), 가셔브룸2봉(8035m), 시샤팡마(8027m) 등 한국원정대의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채워나가는 모습도 있었다.

 

1997년 가셔브룸4봉의 최상단부를 등반 중인 유학재 등반대장. 이 등반을 통해 정상에 오르며 서벽 중앙립 초등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 글 노규엽 기자 | 사진 <역동의 히말라야> 발췌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