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1] *-

paxlee 2012. 4. 22. 11:59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등반사]
 
한국 산악인이 히말라야에 첫 발을 내 디딘지 올해로 꼭 50주년이 됐다. 반세기의 역사가 흘렀다. 서구의 근대 등산은 1786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 초등을 시작으로 태동해 19세기 말에 히말라야로 그 영역을 넓힌다. 한국은 1931년 일본인 중심으로 조선산악회 창립에 반발, 1937년에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백령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산악운동의 길로 들어섰다고 본다.

광복과 더불어 백령회 동지를 중심으로 발족한 한국산악회가 우리나라 산악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끈다. 대표적인 사업은 국토구명(國土究明)이었고 동시에 암봉 등반은 물론 동계 적설기 등반도 한다.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해외 고산에 대한 꿈은 결국 근대등산이 시작된 지 한 세대가 지나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된다.

▲ 2002년 한국도로공사팀이 시샤팡마 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했다.

1962년은 국가적 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고 산악계로서는 대한산악연맹(이하 대산련)이 창립되던 때, 한국 산악계는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등반으로 히말라야에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전에 해외 등반이라고 나가본 건 1960년 대만 옥산(3,952m)이 고작이었음에도 정찰대는 해발 6,700m 높이의 무명봉에 등정한다. 이때는 세계열강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승전국이나 패전국 모두 자국민의 우월성을 드높이고자 8,000m급 초등에 각축전을 벌였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1봉(8,091m) 초등을 시발로 1960년 스위스의 다울라기리1봉(8,167m)이 이미 14좌 중 13좌가 등정된 후였다. 중국령 티베트 내의 시샤팡마(8,012m)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다울라기리 정찰 후 본대가 나선 것은, 네팔이 중국과의 국경분쟁으로 등반허가를 금지했던 1965~1969년 이후 1970년 한국산악회의 추렌히말 동봉(7,371m)이 처음이다. 1,000m급의 야트막한 국내 산의 핸디캡을 훈련으로 극복해 8,000m급 자이언트 봉에 출사표를 곧 이어 던지게 된다. 한국산악회가 안나푸르나1봉에, 대한산악연맹이 1971년 로체샤르(8,400m)에 이어 에베레스트(8,848m)를, 그리고 김정섭 대장이 마나슬루(8,163m)를 목표로 한다.

이들이 등반 무대로 삼은 히말라야는 인간에게 극한의 환경을 제공한다. 눈사태와 폭풍설, 크레바스와 같은 자연 조건 외에도 높이가 만들어 내는 저기압과 저산소의 환경이 인간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높은 산을 오르려는 것은 인간의 생명 현상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럽고도 고귀한 의지이며, 불굴의 인간정신을 상징한다는 행위이념을 산악인들은 실천하게 된다.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국민에게 자긍심 심어줘

1962년 한국사회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시작된 수출주도형 산업개발과 경제발전 우선정책을 펼쳐 곧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아시아의 용으로 부상하려는 걸음마를 떼던 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열악한 장비와 식량, 그리고 고산에서의 경험이 전무했던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집념의 결과 대한산악연맹이 1971년 로체샤르 실패에 이어 두 번째로 파견한 '77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고상돈 대원이 세계 최고봉 정상 에베레스트(8,848m)에 태극기를 꽂아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그러나 영웅 고상돈은 불운하게도 1979년 북미의 매킨리를 등정하고 하산 도중 추락사한다.

또 한국산악회가 추진하던 안나푸르나 1봉은 1975, 1976년 두 번에 걸친 정찰등반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1978년 당초 목표했던 안나푸르나1봉이 아닌 안나푸르나4봉(7,525m)에 원정대(대장 전병구)가 도전, 유동욱 대원이 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정은 같은 한국산악회가 파견했던 7,000m급인 추렌히말 동봉(7,371m)의 1970년 등정이 일본대로부터 등정 시비에 휩싸인 반면에 시원한 성과를 거뒀다.

한국은 이렇게 1962년부터 1979년까지 히말라야에 8개 원정대를 파견해 2개의 팀이 정상 등정하여 낮은 등정 성공률을 보인다.

한편, 1969년 한국 최초의 등산 잡지인 <등산>(현 월간山)이 5월호로 창간되어 히말라야에서 쌓은 선배의 고산등반 기술과 경험은 후배들에게 이어지는 정보교류의 창구 역할을 한다. 한국산악회는 1969년 10동지 조난사고로 히말라야 고산원정이 무산된 반작용으로 알피니즘의 메카인 유럽 알프스에 훈련대를 파견해 3,000~4,000m급의 알프스 침봉을 오르내리며 알파인 등반의 노하우를 축적하며 또한 샤모니의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에서 배운 체계적인 산악 선진국의 동계등반 기술을 국내에 보급해 1980년대 히말라야 등반의 도약을 위한 기초를 다진다.


▲ 1982년 대전쟈일클럽이 세계 초등정한 고줌바캉 남벽루트
1970년대에 도전했던 8,000m급 4개 봉 중에 에베레스트 외에 마나슬루를 포함 3개 봉우리는 1980년대 과제로 넘겨진다. 동국산악회 원정대(대장 이인정)가 1980년 마나슬루를 향해 출정한다. 김정섭 대장이 1971년, 1972년, 1976년의 세 번에 걸친 도전에 두 동생을 포함해 16명이 조난사하여 한국 국민들에게 ‘비운의 산’으로 각인됐던 바로 그 마나슬루다.

동국산악회 원정대는 1976년 토왕폭 하단을 완등한 여세를 몰아 등정한다. 한국인에게 실패를 거듭 안겨주었던 마나슬루에 대한 등반을 일개 단위산악회가 성공으로 이끌자 국내 산악계의 해외 진출은 상황이 크게 바뀐다. 히말라야를 너무 높게만 생각해 온 많은 산악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어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길을 모색한 도전 정신을 가진 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때를 맞춰 원정 방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83년 허영호다. 기존의 대규모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던 방식에서 탈피하고 무산소로 마나슬루를 단독 등정한다. 1차 시도 때 고소등반 셰르파를 캠프3까지 대동해 엄격한 의미에서 단독등반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산악계로서는 소규모 원정과 단독등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후 허영호는 이러한 스타일을 추구하며 1989년 로체(8,516m)에도 단독등반하고, 1993년 중국 측 에베레스트와 1997년 초오유도 베이스캠프 설치 후 속공등반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높낮이를 가리지 않았다. 알파인스타일로 한국 최초 등정은 1983년 한국알파인가이드협회의 틸리초(7,134m) 등정을 꼽을 수 있으며, 또 최초의 등로주의 등반은 1984년 한국외국어대학팀의 바룬체(7,220m) 등반으로 본다. 이어 새로운 루트로의 도전도 시작된다. 그중 8,000m급만 2011년까지 살펴보면 ‘변형루트(Variant Route·정상까지 3분의 1 이상 개척된 루트)’로는 1982년 한국산악회 마칼루 학술원정대(대장 함탁영·대원 16명·등반 셰르파 14명)가 1970년 일본대가 초등정한 남동릉 루트로 등반을 개시, 캠프6(7,700m)을 떠난 허영호 대원과 네팔인 고소포터 파상 노르부·앙푸르바 셰르파 등 3명이 동면으로 변형루트(마지막 캠프에서 정상까지)를 개척하며 마칼루(8,485m)에 등정한다.

이러한 모험적인 등반은 실패의 부담을 안고서도 꾸준히 계속되어 1994년 가을 경남연맹 안나푸르나1봉 남벽 원정대(대장 박주환·대원 12명, 등반 셰르파 7명)는 1970년 영국대 루트를 따라 오르다가 6,300~7,300m 구간을 변형루트로 오르며 박정헌 대원과 네팔인 고소포터 3명이 성공한다. 그리고 2007년 봄 엄홍길 로체샤르 원정대(대장 엄홍길·대원 15명·등반 셰르파 11명)는 남벽에 변형루트를 개척하며 엄홍길·변성호·모상현·파상 남걀 셰르파가 로체샤르 등정에 성공한다.

그리고 히말라야 8,000m급봉 이상에서의 ‘신 루트(New Route·정상까지 3분의 2 이상 개척된 루트)’를 개척한 한국 원정대는 2002년 봄 시즌 한국도로공사 시샤팡마 원정대(대장 박상수)가 남벽에 ‘코리아 하이웨이’라 명명한 루트를 개척하며 박정헌·강연룡이 정상(8,012m)에 선다. 또 2009년 봄 시즌 박영석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 원정대(대장 박영석)는 5명의 대원과 8명의 등반 셰르파들로 구성됐는데 2007년과 2008년에 이은 세 번의 도전 끝에 박영석·진재창·신동민·강기석이 에베레스트에 등정한다. 이 원정대의 루트 개척에 대해 일부 산악전문가들은 변형루트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국제산악계의 관례로 보아 신 루트로 인정하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해외원정이 시작된 지 20여 년 만에 한국 최초의 여성 히말라야 원정대가 꾸려진다. 1982년 여성산악인들로 구성된 선경산악회 람중히말(6,986m) 원정대의 기형희 대장과 윤현옥 대원이 등정에 성공한다. 이 원정대는 남성 매니저의 행정적인 뒷받침과 지도를 받았지만 대원들 모두 여성 산악인의 히말라야 첫 걸음을 훌륭히 장식했다.

히말라야는 도전의 무대로서 남녀라는 성별은 국내에서 파괴된다. 1984년 12월 안나푸르나에서 한국 산악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할 만한 낭보가 전해진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히말라야 거봉 도전에 나선 김영자 대원이 여성 최초로 안나푸르나1봉을 등정하면서 남성들을 제치고 안나푸르나1봉 동계 세계 초등정이란 기록을 세웠다. 당시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쾌거로 평가됐다.

그런데 국내의 자축 분위기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당시 한국대와 같은 시즌에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던 프랑스대가 등반 후 로이터통신 기자로 카트만두에 있던 엘리자베스 홀리와의 인터뷰에서 불거져 나왔다. 결국 이 등정은 안나푸르나 중앙봉 등정으로 세계 산악사에 기록됐다.

이후 여성산악인들의 활동은 상승곡선을 그린다. 1986년 네팔의 강가푸르나(7,455m) 원정대에 합류한 남난희(당시 29세)와 정영희(26세)는 첫 7,000m급 봉우리 등정에 성공했고, 1989년에는 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한 안나푸르나1봉 원정대에 지현옥과 곽명옥이 참여한다.

1982년 고줌바캉과 1983년 바인타브락2봉 세계 초등정

1982년과 1983년에는 한국등반사상 통쾌한 한판 승부가 있었던 해다. 대전쟈일클럽 원정대(대장 박동규)가 네팔과 합동으로 미등정으로 남아 있던 고줌바캉(7,806m)을 김영한 등반대장이 세계 초등정한다. 이어 1983년 악우회 대(대장 심의섭)가 카라코룸의 바인타브락2봉(6,960m)에 유한규·임덕용이 그 정상에 태극기를 휘날렸다는 소식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이것은 한국 산악계가 매년 한두 팀밖에 해외원정을 나가지 않던 초창기에 거둔 성과라 그 의미가 더욱 컸으며 히말라야 고봉에 세계 초등정을 노렸던 1962년의 다울라기리2봉과 1971년 로체샤르의 소원을 풀게 됐다. 8,000m급의 초등은 아니었지만 고줌바캉은 거의 8,000m에 가까운 해발고도였고, 특히 악우회대가 오른 바인타브락은 당시까지 영국이 8회, 일본이 3회 도전했지만 모두 물리친 악명 높은 봉우리여서 한국의 등반능력을 세계에 알린다.

이들의 성공은 1979년 아이거 북벽, 1980년 그랑드조라스와 마터호른 북벽의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른 기술과 저력이 뒷받침됐고, 1981년 1차 첫 원정에서 이정대 대원을 잃는 아픔을 이겨낸 후에 이루어졌다.

▲ 2008년 익스트림라이더팀은 메루북벽에 신루트를 개척했다.

초등정은 계속돼 1985년 울산합동대(이규진 대장) 히말출리 북봉(7,371m)에도 등정한다. 이후 한국산악계의 초등 열기는 1995년까지 급격히 식는다. 1995년은 바로 한국산악계가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게 된 해였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 그리고 1989년 1월 1일 국민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를 계기로 한국 내의 스포츠 열풍은 후끈 달아오르고 자유로운 출국 편의로 히말라야 등반도 동반 활기를 띤다. 한국산악계는 남아 있는 8,000m급 ‘한국 초등’, 또 7,000~6,000m급 ‘한국 초등’에 목표를 둔다.

1987년 12월 22일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

K2(8,611m)는 완전한 대칭으로 아름다운 산이지만 어떤 루트를 택하더라도  정상에 오르기가 8,000m급 다른 어떤 봉우리보다 어렵다. 대산련은 이런 상황인식 하에 2회에 걸쳐 정찰대를 파견한 후 1986년 장봉완·김창선·장병호 대원이 등정에 성공한다. 8,000m급에 한국 초등 행진은 계속돼 1987년 부산대륙산악회 캉첸중가(8,586m), 1988년 대산련 에베레스트-로체, 1988년 부산합동대 다울라기리1봉, 1989년 대구등산학교 로체샤르(8,400m), 1989년 대구경북연맹 초오유(8,201m, 후에 등정하지 못했다고 발표), 1989년 영남 지봉산악회 얄룽캉(8,505m), 1990년 대전충남합동대 가셔브룸1봉(8,068m), 1991년 성균관대 가셔브룸(8,035m), 1991년 대산련 시샤팡마(8,047m) 남벽, 1992년 경남합동대와 광주 우암팀의 낭가파르바트(8,125m), 1994년 경남연맹 안나푸르나1봉 남벽, 1995년 엄홍길과 광주전남 합동대의 브로드피크(8,047m) 등정으로 1977년에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룩되고 18년이 지나 8,000m급 14좌 한국초등은 마무리된다. 그중 마칼루, 시샤팡마, 안나푸르나1봉을 제외한 산은 노멀루트로 등정됐다.

히말라야 등반은 각 지역마다 그곳에 맞는 적정한 등반시즌에 오른다. 네팔은 여름계절풍인 몬순을 피해 봄과 가을에, 파키스탄은 여름에 원정등반을 한다. 그런데 1980년부터 네팔 정부는 동계시즌을 별도로 등반 허가하면서 그해 2월 폴란드대가 에베레스트 동계 세계 초등을 한다. 히말라야 등반시즌은 사계절로 늘어났고 한국도 동계시즌 등반에 나선다.

한국의 히말라야 동계등반 행렬은 1982년 12월 푸모리(남선우·동계2등)로부터 시작해서 동계초등만 열거해도 1983년 12월 아마다블람(남선우 임병길 김영수)과 자누(김기혁), 1986년 1월 가우리상카르(최한조), 1985년 12월 31일 대구 파라마운트산악회 캉테가(이대석), 1986년 한일합동 타우체(허영호), 1987년 겨울시즌 광운고OB산악회 로부제 서봉(박재홍, 최상현, 심상일), 1988년 12월 눕체 북서봉(배현철 김화곤 오세철 전봉곤), 1989년 12월 랑탕리(박영석 윤태영), 1990년 계명대 히말출리 서봉(7,540m) 초등정, 1991년 명지대 도르제락파(6,990m) 등으로 이어진다. 이 중 혹독한 겨울 상황에서 어려운 루트를 뚫고 정상에 오른 경남연맹의 1988년 눕체 북서봉(7,745m) 등반이 돋보인다.

이외에도 1983년 12월 틸리초(윤대표·장봉완, 동계2등), 1988년 1월 고줌바캉(유광렬·최미호), 1992년 12월 랑탕리룽(등정자 김진현 조난사), 1991년 12월 아마다블람(유병철·박경이), 1992년 12월 제주 설암산악회 랑탕리룽(김진현)이 초등은 아니지만 동계에 등정한다. 1988년 고줌바캉을 등정한 최미호군(당시 17세·광운공고 2년)은 최연소 최고봉 등정기록을 세웠고, 1991년 아마다블람을 오른 박경이는 한국 여성으로 첫 동계 등정을 기록했다.

8,000m급은 그 고도로 진정한 동계등반의 가치를 가진다. 1977년 한국 초등 이후 에베레스트에 대한 여섯 차례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두 번째 등정이 겨울시즌에 이루어진다. 양정OB대(1984~1985년 동계), 고려대(1985~1985년 남동릉), 박영배대(1985~1986년 남서벽), 김기혁대(1985~1985년 서릉), 히말라얀클럽대(1986~1987년), 크로니대(1986~1987 남서벽) 등 이전에 실패한 원정대도 모두 동계원정대였다.

실패 원인은 영하 50℃까지 떨어지는 기온과 겨울이면 하강하는 제트기류다. 이 강풍을 이겨낼 체력과 충분한 지원이 없으면 빤히 보이는 정상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첫 번째 시도에 실패한 허영호는 1987~1988년 동계원정(대장 함탁영)에서 12월 22일 등정해 고상돈에 이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두 번째로 오르며 동계 제4등을 기록한다. 또 마칼루와 마나슬루에 이어 8,000m급 3개 봉을 오르면서 고상돈의 자리를 잇는다.

1984~1985년 은벽산악회 안나푸르나1봉 동계 등정은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등정의문이 제기되었고, 1987~1988년 부산 대륙산악회도 해를 넘긴 1988년 1월 2일 이정철 대원이 단독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으나 후에 정상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된다. 또 1989년 영남 지봉산악회 얄룽캉(8,505m) 원정대의 등정자 진교섭은 등정 후 동행한 셰르파 2명과 실종됐다. 한국의 동계등반은 1990년대 이후 급감해 2000년 후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1998년 12월 6일 동국산악회 마나슬루를 등정한 박영석이 마지막이었다.

1980년대에 이렇게 동계등반이 활발히 이루어진 이유는 더욱 극한의 환경에 도전하는 등반본질의 추구도 있었지만 각각의 봉우리에 한 시즌 한 개 팀 또는 한 루트에 한 개 팀에 입산을 허가하는 네팔 정부의 정책으로 겨울시즌에 입산허가를 득하기가 용이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1980년대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는 95개 팀이었다. 이 중 82개 팀이 네팔로 몰린 편중현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요인은 네팔 히말라야에 이름 있는 산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밖에 자료수집· 현지 장비구입 등이 용이하고 교통편이 비교적 편리하면서, 무엇보다 고소등반 셰르파 고용에 대한 의존도가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파견된 원정대 수만큼 등정을 주장할 만한 근거자료가 부족한 팀들도 많았다.


     - 글 / 김창호 기획위원·서울시립대OB / 사진 원정대 / 월간 산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