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 [2] *-

paxlee 2012. 4. 16. 23:10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

 

한국 히말라야 황금기와 군웅할거


1990년대의 히말라야 등반은 한국이 고봉 등반의 적응기를 거치고 본격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과 기록이 배출되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낭가파르바트(8125m), 캉첸중가(8586m) 등 8000m급 14좌를 향하는 원정대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닐기리 북봉(7061m), 타르케캉(7202m), 추렌히말 등 히말라야의 봉우리를 오르려는 원정대가 끊이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중 특히 주목받은 원정은 남난희 대장을 필두로 여성 만으로 꾸려진 로부제(6145m), 임자체(6183m) 원정이었다. 이 원정대는 1993년 최초로 여성원정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기 위한 훈련등반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으로 주목받았고, 실제 에베레스트 원정에 올라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 대원이 정상에 오르며, 세계 3번째로 여성이 세계 최고봉에 오르는 기록을 낳는다. 또한 같은 해에 같은 장소에서 박영석이 국내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해내고, 허영호가 국내 최초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남동릉 횡단 등반을 성공하기도 한다(네팔쪽 하산을 허가받지 않아 물의).

90년대 들어 허영호, 엄홍길, 박영석 등의 14좌 기록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94년에는 한왕용이 초오유에 오르며 첫 8000m 봉우리를 등정한다. 후일 14좌 기록을 달성하게 될 영웅들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8000m급 봉우리 등정자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1995년에는 한국산악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최초로 등정하기도 했다. 한국산악계의 기록 수립자들의 얼굴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1997년 박영석이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봉, 가셔브룸2봉, 초오유, 로체에 오르며 한 해 동안 8000m급 봉우리를 5개 연속 등정하는 기록을 수립(로체는 후일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40m 전에서 하산했다고 고백)하며 8000m급 14좌 완등 기록을 늘렸고, 93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은 97년 가셔브룸1봉, 98년 가셔브룸2봉, 99년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며 한국 여성 최초로 8000m 봉우리 4개에 오르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하산 중에 실종되어 안타까움을 남기기도 했다.

 

이때 MBC 박상수 기자가 한국 TV 카메라 기자 최초로 8000m 봉우리를 등정하는 기록도 있었다. 한편 1997년 한국산악회는 가셔브룸4봉(7925m)에서 서벽 중앙립 초등 기록을 세우며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1998년 탈레이사가르 원정대는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알파인스타일 방식을 채택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 두 등반은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 높이가 아닌 난이도를 도입한 원정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 1999년에는 경남산악연맹의 조형규가 51세의 나이로 가셔브룸2봉에 올라 8000m 봉 한국 최고령 기록을 수립했고, 제주산악연맹이 초오유를 등정해 제주 산악인 최초 8000m봉 등정하는 등 소소한 기록들도 남았다.

 

밀레니엄 시대 = 14좌 러시의 시대


세기가 바뀐 200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의 14좌 등정욕이 눈에 띄게 들끓기 시작했다. 산악단체, 대학산악부, 단위산악회에서 출정하는 원정대의 대다수가 8000m급 봉우리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으며, 2000년 한 해에만 동국대의 마칼루 원정,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한산악연맹 7대륙 정상 등정), 광주시산악연맹의 K2 원정(남남동릉·박정헌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 등 7개의 원정대가 8000m급 봉우리 등정에 성공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중 한국히말라얀클럽에서 떠난 K2 원정대에서 엄홍길이 등정에 성공해 국내에서는 최초, 세계 8번째로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 기록을 수립한다. 이어 박영석도 브로드피크(8047m)와 시샤팡마를 등정하며 K2를 제외한 나머지 13개 봉우리 완등을 달성한다.

 

1982년 한국산악계에 첫 번째 세계 초등정을 안겨준 고줌바캉 원정대의 제3캠프 모습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해에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를 배출한 한국산악계는 그 기세를 이어 지속적으로 히말라야에서의 기록을 만들어낸다. 먼저 2001년 6월 박영석이 K2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9번째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자가 되며 한국은 14좌 완등자를 2명 배출한 국가가 된다. 2002년 초에도 부산클라이머스클럽의 원정대가 콩데(6187m)를 등정하며 국내 최초 히말라야 빙벽 등반의 기록을 만들었고, 한국도로공사 원정대가 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코리안하이웨이) 초등 기록을 세운다. 한편 2002 월드컵 개최 성공을 기원하는 비전Q프로덕션의 에베레스트 원정이 성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이어 2003년에는 전북산악연맹 원정대로 참가한 한왕용이 가셔브룸2봉과 브로드피크를 연달아 등정해 국내 3번째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자가 된다.

 

또한 김창호가 딜리상사르(6225m), 아타르코르(6189m), 하이즈코르(6105m), 빅마브락(6150m) 등 4개 봉우리를 단독으로 초등했고,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원정대가 나와즈브락(5800m)을 신루트로 초등하는 기록도 세운다. 이렇듯 2000년대 초반은 히말라야의 8000m 14좌 완등 기록과 알파인스타일 등정, 초등정, 거벽등반과 같은 의미 있는 기록이 연이어지며 한국이 산악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히말라야에서의 세계 기록 수립자가 생겨나고 그 기록을 뒤따르거나 새로운 기록을 만들려는 한국 산악인들의 활동이 끊이지 않던 와중에, 이미 기록을 수립한 산악인들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0년 14좌 완등 이후 국제적 관점으로는 위성봉으로 분류되어 14개 봉우리에서는 제외되어 있지만, 엄연히 8000m 이상의 고도와 난이도를 갖춘 로체샤르 등의 거봉을 등정하려했던 엄홍길이 2004년 캉첸중가의 서봉인 얄룽캉(8505m)을 등정하며 8000m급 15개 봉우리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국내 3번째 14좌 완등자인 한왕용도 ‘클린마운틴 원정대’라는 신개념의 원정대를 계획하여, 본인이 올랐던 14좌 봉우리들에 대한 청소등반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2004년에는 K2 7300m 지점까지 오물을 수거했다. 2004년 말에서 2005년 초에는 박정헌과 최강식 등 젊은 나이의 산악인이 순수 알파인스타일로 촐라체(6440m) 북벽을 등정하는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세계가 주목할만한 기록을 수립한 그들이었지만 남서릉으로 하산 중 조난을 당해 5일 만에 극적으로 생환하는 일을 겪게 되며, 조난 기간 중의 동상으로 인해 그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의 대부분을 잃기도 있었다. 촐라체 알파인스타일 원정을 포함해 로부제 서봉(6145m)의 남서벽 신루트 등정,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등정 및 횡단 하산 등 2005년까지는 8000m급 고봉 뿐만 아니라 신루트 공략을 위한 원정이나 알파인스타일로 접근하는 등로주의 방식의 원정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2006년에 들어서면서 한국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은 8000m급 14좌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2006년 봄 시즌에 에베레스트를 찾은 한국 원정대가 10개나 집중되는 기현상을 보인다. 이 중 박영석의 횡단등반이나 한왕용의 청소등반 같은 조금 다른 스타일의 등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2006년 한 해 동안의 다른 히말라야 원정대도 초오유와 낭가파르바트, 가셔브룸1ㆍ2봉 등과 같은 14좌에 해당되는 봉우리로 집중되어 기록을 의식하는 한국산악계의 매너리즘을 우려하는 풍토가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NEPA 원정대의 탈레이사가르 북벽 한국 초등정, 한국산악회의 꽁데샤르(6093m) 동계 등정 등의 원정대들이 14좌를 대상지로 하지 않는 원정을 펼쳤을 뿐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들은 기록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등반을 이어나갔다. 사진은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했던 2006년의 박영석원정대

 

2007년의 히말라야 원정도 전년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 대다수의 원정대들이 8000m급 고봉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 해에는 새로운 진기록들이 수립되는 등의 성과가 있어 전년과 조금 다른 결과가 있었다. 먼저 박영석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려는 등반이 주목을 받았다. 박영석원정대는 7700m 지점의 4캠프까지 진출하여 신루트 개척을 코앞에 둔 듯 했으나 눈사태로 인해 한국산악계의 샛별이었던 오희준, 이현조를 잃는 안타까운 결과로 원정에 실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반면 다른 에베레스트 원정대들은 진기록을 남겼다.

 

애초 한국 최고령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하자는 의도로 계획된 한국산악회의 실버원정대는 13명 대원 중 김성봉, 이장우(등정시비)가 등정에 성공해 김성봉이 66세의 나이로 한국 최고령 기록을 세웠고, 플라잉점프김해원정대는 10명의 대원이 정상에 올라 한국 에베레스트 단일팀 최다 기록과 동시에 송귀화(59세) 대원이 한국 여성 최고령 등정 기록을 수립했다. 허영호는 단독으로 에베레스트에 올라 개인으로서는 3회 등정 기록을 수립했고, 로체샤르를 목표로 한 엄홍길원정대도 등정에 성공해 엄홍길은 8000m급 봉우리 16개를 오르는 기록을 세운다. 한편으로는 청죽산악회 팀은 힌두쿠시 가르무쉬(6244m)를 알파인스타일로 올라 아시아 황금피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이어지는 14좌 지상주의와 경쟁 구도


2008년부터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이후의 히말라야 14좌를 목표로 삼은 원정대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보이는 시대가 찾아왔다. 먼저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은 다이나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꾸준한 행보와 더불어, 97년 이후 세계 최초 여성 14좌 완등을 목표로 히말라야 원정을 이어오고 있던 오은선과 그 뒤를 바짝 따라붙기 시작한 고미영의 대결 구도가 산악계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오은선, 고미영 두 여성 산악인의 경쟁은 07년까지 오은선이 5개 봉우리, 고미영이 4개 봉우리 등정으로 누가 세계 최초의 영예를 누릴지 알 수 없는 구도로 펼쳐졌으며, 08년부터 경쟁에 불이 붙어 한 해 동안 오은선이 4개 봉우리, 고미영이 3개 봉우리를 추가 등정하며 점점 거세져 갔다.

 

2009년에도 경쟁에 따른 무리한 원정 일정이 산악계의 우려를 자아내자 대한산악연맹이 2010년 안나푸르나를 마지막 봉우리로 삼아 합동 등반을 펼쳐 공동 기록을 세울 것을 제안하는 일도 있었다. 그 일정에 맞춰 09년 한 해 동안 오은선은 4개 봉우리를 등정했고, 고미영은 6개 봉우리를 목표로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2009년 여름 낭가파르바트와 가셔브룸1ㆍ2봉을 단번에 등반하러 떠났던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의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 중에 추락사하여 명예를 위한 경쟁이 낳은 악재로 남는다. 결국 2010년 봄 오은선이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며 세계 최초 여성 14좌 완등자를 한국에서 배출했으나, 오은선과 더불어 세계 최초 여성 14좌 완등을 목전에 두고 있던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에 의해 오은선의 2009년 캉첸중가 등정 시비가 불거지며 ‘여성 최초’의 문제를 두고 세계산악계에 논란을 일으키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이는 한국산악계가 ‘과연 최초 기록이 중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점과 등반의 목적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만 한 여지를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두고 오은선만을 문제 삼는 건 옳지 않다. 고미영의 사고사 이후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의 대장을 맡으며 고미영과 함께 14좌 등정을 이뤄가던 김재수가 고미영의 뒤를 이어 14좌 완등에 도전하여 2011년 한국 5번째 완등자(오은선 포함)가 되었고, 장애인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고 있는 김홍빈, 단체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는 다이나믹 부산 희망원정대와 같은 원정대들이 여전히 14좌의 거봉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단체의 이러한 목표 의식이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이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이루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라 볼 때, 개인이든 단체든 14좌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땀은 아름답다. 이는 오히려 그들의 목표와 방향을 문제시 삼기에 앞서 이런 방향으로 흘러와버린 한국산악의 흐름에 대한 반성이 앞서야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14좌 완등을 목표로 한 원정을 제외한 다른 히말라야 원정대의 풍토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강원대산악부의 안나푸르나 팡(7647m) 신루트 등정, 2008년 직지원정대의 차라쿠사 직지봉(6235m) 초등정, 서울시립대의 무즈타그 바투라2봉(7762m) 남벽 신루트 세계 초등 등에 이어 2009년 Park’s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의 남서벽 신루트 개척, K2 스팬틱 골드피크 원정대의 스팬틱(7027m) 알파인스타일 등정 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초등정, 신루트 개척을 위한 원정들이 비록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21세기에도 계속 이어가야하는 등반 형태인지는 고민을 해봐야할 일이다. 최근인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러 떠났다가 사고로 실종된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을 보며 한국산악계는 산을 오르는 이유를 되짚어봐야 할 시기가 왔다. 그들의 목적과 뜻은 의미 있었지만, 행위에 따르는 안전문제가 산악계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이 사고는 등로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따른 시련일 수도 있지만, 한국산악계가 큰 충격을 입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계산악계의 격랑 속에 한국의 나침반은 어디에


2012년 한국산악계의 히말라야 진출이 50년을 맞이했다. 세계 산악의 흐름보다 1세기 늦게, 그것도 일제치하시절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근대등산에 발을 들였던 한국산악이 지금의 모습을 이룩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한국보다 일찍 히말라야 원정을 시작해 1950~60년대의 초등정시대와 70~80년대의 변형등반과 동계등정시대 등을 거친 서구의 산악문화를 우후죽순 받아들여, 이렇다 할 시대를 나눌 새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산악계가 남긴 발전이었다. 그것도 만년설이 쌓인 산은커녕, 2000m 이상의 고도를 지닌 산은 찾아볼 수 없는 한반도 남쪽의 작은 나라가 히말라야에 진출한지 50년 만에 세계인의 이목을 받을만한 등정기록과 등정자를 배출을 한 것은 한국이 산악강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산악강국인지를 곰곰이 따져봐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세계의 흐름을 쫓아 그 울타리 안에서 일궈낸 성과와 기록들이 산악강국임을 증명해주는가? 그리고 등반을 함에 있어 산악강국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현재 세계산악계의 흐름도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다. 자국의 산들에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려 히말라야, 7대륙 최고봉 등을 섭렵한 뒤 목적을 잃어버린 세계의 산악인들은 삼삼오오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어느 지역에서는 등정 시간을 다투는 등반 형태가 인기를 끌고 있고, 다른 어느 지역에서는 고난이도의 자유등반을 하는 등반 행위를 즐기는 등 가지각색의 모습이다.

 

물론 한국도 히말라야를 비롯한 해외의 고봉들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다. 스포츠클라이밍의 김자인이나 박희용 같은 젊은 산악인들이 세계의 흐름에 맞는 등반 행위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이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산악계의 격랑에 휩쓸리는 지금 시기에는 한국도 ‘한국다움’을 표방할 수 있는 알피니즘을 찾아내어 새로운 산악문화의 형성에 힘써야할 시기가 왔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한국이 히말라야에 진출한 이래 수많은 선구자들과 희생자들이 하얀 설산을 찾아갔다. 반세기를 이어온 역사를 토대로 이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재조명해볼 시기가 찾아왔다. ⓜ

 

아마다블람을 오르고 있는 오은선의 뒷모습. 오은선은 세계 최초 여성 14좌 완등자를 목표로 꾸준한 원정을 이어나갔다.


- 글 노규엽 기자 | 사진 <역동의 히말라야> 발췌 / 월간 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