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2] *-

paxlee 2012. 4. 24. 23:21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등반사]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 성공은 여성산악인의 저변확대에 큰 몫

1991년 가을 대산련이 겨냥한 시샤팡마-초오유 연속등정 시도는 시샤팡마 등정에 그쳤다. 이미 1988년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동시 등정한 바 있는 대산련으로서는 한 시즌에 두 봉을 한꺼번에 겨냥해 절반의 성과를 거둔다. 같은 시기 한국 히말라얀클럽대도 순서만 바뀐 초오유-시샤팡마에 등반한다.

이때부터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두 봉우리의 장점을 이용해 대개 능력 있는 팀들은 두 봉우리 동시에 연속등정을 겨냥하는 추세가 나타난다. 시샤팡마-초오유는 단골메뉴가 되고, 다울라기리1봉-안나푸르나1봉, 파키스탄의 K2-브로드피크, 가셔브룸1봉-2봉이 주 대상이 된다.

1992년 가을 남선우·김영태에 의해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 첫 연속 등정에 성공하게 되고, 1993년 엄홍길·민경태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이 두 팀 모두 시샤팡마 주봉이 아닌 시샤팡마 중앙봉(8,008m)을 오른 것으로 기록됐다.

▲ 박영석 원정대가 2009년 세번 도전에서 개척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아 루트
1996년 한국히말라얀클럽은 다울라기리1봉-안나푸르나1봉 등정에 성공하고, 2000년 이후에 14좌 완등을 목표로 했던 많은 팀들은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더블 헤더(Double Header), 심지어 한 시즌에 세 봉우리를 오르는 트리플 헤더(Double Header)까지 행한다. 특히 부산희망원정대는 2007년 K2-브로드피크, 2008년 마칼루-로체, 2009년 마나슬루-다울라기리1봉, 2011년 가셔브룸1봉-2봉을 올라 단일팀 세계 최단기간인 5년4개월 만에 14좌를 완등하는 데 이 방식이 주효했다. 한국에서 트리플 헤더 첫 기록은 2009년 봄 김재수와 고미영이 헬기를 이용해 베이스캠프를 이동하며 네팔의 마칼루-캉첸중가-다울라기리1봉을 등정한 원정이다.

원정대 파견대 수의 양적 증가는 다양한 등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히말라야 등반은 다변화한다. 그중 하나가 횡단등반이다. 1993년 히말라얀클럽대(대장 오인환)의 허영호가 티베트의 노스콜로 올라 네팔의 사우스콜로 하산한다. 네팔 입경으로 불법월경이 문제가 되고 하산루트에 다른 한국대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등반은 분명 높은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2006년 박영석이 같은 루트를 통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횡단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성공한다. 두 팀 모두 이 기록으로 ‘세계 최초’를 들먹이는 것은 외국등반가의 기록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다. 2005년 한국 루팔벽 원정대(이성원 대장)는 횡단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남벽을 올라 서벽으로 하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3년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한국 최초의 여성 8,000m급 원정대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원정대장 지현옥과 최오순, 김순주가 등정한다. 이 원정은 등정이라는 업적 이외에도 전국의 여성산악인을 고루 선발해 훈련함으로써 여성산악인의 저변확대에 큰 몫을 했다.

이 원정대에 참여했던 여성산악인들은 이후 좋은 성과를 거둔다. 먼저 1991년 중국의 무즈타그아타(7,546m) 한국 초등을 이룩해 냈던 지현옥은 1997년 가셔브룸2봉, 1998년 가셔브룸1봉 등,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열정적인 등반을 펼쳐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산악인으로 자리를 굳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9년 안나푸르나 1봉을 등정하고 하산 도중 추락사한다. 그녀는 8,000m급 4개봉을 등정한 첫 한국 여성산악인이다.

지현옥의 이름이 잊혀갈 때 즈음 한국에는 신세대 여성산악인이 새롭게 대를 잇는다. 2000년대 8,000m 14좌 여성 세계 최초 등정 레이스에 뛰어든 오은선과 고미영이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려는 여성산악인은 두 명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텐부룬너, 이탈리아의 니베스 메로이 등이 봉우리 등정 수에서는 앞서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11번째 봉우리였던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고 하산하던 고미영이 실족사한다.

고미영의 슬픔 뒤에 곧 바로 오은선이 2010년 안나푸르나1봉을 끝으로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등자의 기쁨을 한국에 안겨준다. 그런데 한국산악계에 1984년 김영자의 안나푸르나1봉 동계 세계 초등정 의혹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오은선의 14좌 완등에 2009년 캉첸중가 등정의혹이 터져 나왔고 끝내 세계 산악계뿐만 아니라 국내 산악계도 다수가 부정적 시각을 가지게 됐다.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최오순, 김순주는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계속 등반활동을 펼쳐 최오순이 5대륙 최고봉에 오른다. 또 2006년 변미정의 초오유, 2006년는 곽정혜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김영미는 2008년 에베레스트를 올라 7대륙 최고봉에 완등한다. 이외에도 김점숙·이명선·이명희·채미선·한미선 등이 높이는 낮지만 고난도 등반을 펼쳤다.

8,000m급 14좌 완등 레이스를 통해 산악 스타 탄생

14개 거봉 한국 초등이 달성된 1995년부터 1990년대 후반에는 국가나 단체의 기록보다 개인의 기록을 따지게 되고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언론과 방송의 관심으로 한국은 새로운 산악 스타들이 탄생한다. 무엇보다 14개 거봉 완등을 꿈꾸는 한국 산악계의 엄홍길이다. 엄홍길은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이렇다 할 고산 등정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특히 1977년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고상돈과 3극점(에베레스트, 남극점, 북극점)7대륙 최고봉 완등을 눈앞에 둔 허영호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산악인들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그러던 그는 1993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 연속 등정에 성공하고, 1995년 마칼루·브로드피크·로체 3개 거봉 등정으로 한국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등극하면서 14개 거봉 완등에 대한 기대를 걸게 한다.

▲ 2009년 김형일 대장팀이 개척한 스판틱 골든필라 신루트

이렇게 여러 기록이 이루어진 1995년 이후 2001년까지 근 7년간은 14개 거봉 완등 레이스를 펼친 엄홍길과 박영석 두 등반가들이 히말라야 거봉 등반을 주도하며 레이스가 펼쳐진다. 결국 세계 7번째이자 2000년 K2 정상에 올라선 엄홍길이, 이듬해 박영석 역시 K2 정상에서 14개 거봉을 마무리 지으면서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그러나 한국 내의 기록과는 상이하게 세계 기록에는 박영석이 2001년 여름 K2 등정으로 8번째로, 엄홍길이 2001년 가을 시샤팡마를 끝으로 9번째로 기록됐다).

이어 한왕용이 2003년 브로드피크 정상에서 14개 거봉 완등의 종지부를 찍어 11번째로, 오은선은 1997년 가셔브룸 2봉을 시작으로 2010년 봄시즌 안나푸르나 1봉을 올라 21번째로, 김재수가 1990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2011년 가을 초오유를 마지막으로 28번째로 기록돼 한국은 5명의 8,000m급 완등자를 배출한다. 이러한 개인 14좌 등정기록은 금년까지 김창호가 무산소로 13좌 등정, 서성호가 12좌, 김미곤이 8좌, 장애우 김홍빈이 6좌를 등정하며 뒤를 잇고 있다.

8,000m급 14좌 완등 후 엄홍길은 ‘히말라야 14+2좌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2004년 얄룽캉(8,505m)을, 2007년 로체샤르(8,400m) 포함 16좌 등정 후 고산등반에서 은퇴한다. 현재 그는 평소 존경하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업적을 따라 엄홍길휴먼재단을 운영하며 네팔 오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히말라야 원주민들의 교육과 복지에 힘쓰고 있다.

한왕용은 14좌 등정 후  자신이 올랐던 8,000m급 14좌 ‘클린 마운틴 원정대’를 꾸려 베이스캠프와 고소캠프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친환경 활동을 펼쳐 산악인으로 물론, 일반인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반면 박영석은 현역에 남는다. 이후 그는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고 극지로 탐험 영역을 넓혀 2004년 남극점, 2005년 북극점 탐험을 했다. 8,000m 14좌 등정,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 3극점을 2005년에 모두 정복해 인류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이후 진정한 그의 내면의 부름을 좇아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신 루트를 개척하고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1봉 남벽을 신 루트를 시도하다 신동민·강기석과 함께 실종사한다.

한편 경남산악연맹 팀은 히말라야 8,000m급 3대 남벽 등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1994년 안나푸르나1봉 남벽에 성공하고 1995년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돌파한 해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한국 산악계로서는 7번째 도전에서 성공한 쾌거로, 한국산악계가 등정주의를 탈피해 등로주의로 임하는 표상이 된다. 그와 더불어 박정헌이라는 히말라야 거벽 등반가가 탄생한다. 박정헌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은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른 지 한 해 뒤에 이룩해 낸 것이기에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인정받을 만했다.

박정헌은 그후 2000년 K2 남남동릉 무산소, 2002년 시샤팡마 남벽, 가셔브룸2봉 남릉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높이는 낮지만 고난이도를 요하는 벽등반과 알파인스타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첫 도전이었던 촐라체 북벽에 성공하고 하산 길에 후배인 최강식과 조난·생존했으나 손가락을 대부분 잃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 무대를 찾았고 2011년 히말라야를 패러글라이딩으로 횡단한다.

수직 탐험은 수평으로 이어져 세계적인 탐험가도 여럿 탄생한다. 1995년 여름 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한 허영호가 12월 12일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마저 등정, 남극·북극점과 에베레스트 정상을 일컫는 3극점과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또 박영석은 산악그랜드슬램으로 한국 극지탐험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의 자일파트너 오희준은 2004년 남극, 2005년 북극, 2006년 북극 등 3극점 성공은 물론 8,000급 10좌를 등정했으나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 등반 중 이현조와 추락사하는 비운을 맞는다.

홍성택은 1994년 남극점, 1995년 에베레스트, 2005년 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하고 2012년 베링해협 도보 횡단에 성공해 차세대 한국을 대표할 탐험가로 부상한다.

14좌 완등 레이스 펼쳐지는 사이 등로주의 추구하는 등반도 활발

엄·박·한 세 산악인이 14개 완등을 목표로 질주하는 사이 등로주의를 추구하는 산악인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1997년 말 밀어닥친 IMF 외환위기 여파로 잠시 침체되는 듯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1997년 한국산악회팀은 카라코룸을 대표하는 고난도 거벽인 가셔브룸4봉(7,925m) 서벽 중앙립에 신 루트를 남긴다. 1995년에 이어 재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 등반은 1988년 대전쟈일클럽의 갸충캉(7,952m) 남서벽 변형루트, 1998년 한국 공가 원정대(대장 김재명)의 중국 미냐콘카(7,587m) 북동릉 개척에 이은 7,000m급에 신 루트를 연 쾌거였다. 또 2007년 강원대학교 안나푸르나 팡(7,647m) 원정대는 1991년과 1997년의 실패를 딛고 동벽~남릉 신 루트를 개척해 한 봉우리 최장기간 도전해 성공한다.

이후에도 한국산악회는 고산거벽 신 루트 개척에 꾸준히 나서 1999년 아민브락(5,900m) 서벽 등반과 2000년 그레이트타워 등반, 2005년 로부제 서봉(6,145m) 남서벽, 2008년 CAC Sar(5,942m)와 Corean Sar(약 6,000m), 2009년 우준브락(6,422m)을 등반한다.

높이는 해발 6,000m 안팎에 불과하지만, 수직고 1,000m가 넘는 고난도 거벽을 향한 젊은 한국산악인들의 도전은 인도 히말라야에서 파키스탄, 네팔 히말라야에서 이루어진다. 1997년 최승철·김형진·신윤정 혼성 3인조팀은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암탑인 그레이트 트랑고타워(6,283m) 하단벽에 신 루트를 뚫고 정상에 올라서고, 최승철은 하산길에 패러글라이딩으로 해발 5,200m까지 활강하는 모험적인 등반도 펼친다. 이 등반은 1989년 광운대의 바기라티3봉(6,454m), 1992년 남가주한인산악회대의 네임리스타워(6,239m), 그리고 1993년 서울시립대의 그레이트 트랑고타워(6,286m)의 성공적인 등반에 잇는 성과였다.

이후 이런 류의 등반은 큰 매력을 품어 특히 카라코룸의 암탑에서 많은 팀이 도전해 2005년에는 네임리스타워 남동벽에 크럭스 존(The Crux Zone)과 2008년 아딜피크(5,300m)에 신 루트가 개척된다.


▲ 2011년 박영석 대장팀이 알파인스타일로 시도하다 실종사한 안나푸르나 1봉 남벽
국내 에이드클라이밍(Aid Climbing)은 주영-정승권에 이어 최승철·김형진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이들은 1998년에 알파인 등반에 경험 많은 선배등반가 신상만과 함께 줄을 묶는다. 목표는 1993년 이후 한국팀의 7번째 도전에서 인도 히말라야의 난제로 꼽히던 탈라이사가르(6,904m)의 수직고 1,500m 높이의 북벽이다. 원정대는 어려운 구간의 루트를 완등하나 정상 설원에서 추락사하는 비극을 맞는다. 결국 이 북벽은 2006년 네파팀이 등정에 성공한다.

최승철·김형진의 뒤를 그들의 동문들이 이어 2008년 익스트림라이더(대장 김세준)팀의 메루 피크(6,660m) 북벽 신 루트 개척으로 한국 히말라야 대암벽등반에 큰 획을 긋는다. 이미 이 팀은 2003년 나와즈브락(5,800m), 2004년 캐나다 배핀섬에서 신 루트를 개척한 경험을 메루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 최승철·김형진이 설립한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는 대암벽 등반가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출신 동문들은 그들의 유지를 이어 지구상 오지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중심에 김세준이 있다.

1980년대 초의 세계 초등정 등반 후 잠잠하던 세계 산악계에 다시 봉우리 초등을 겨냥해 한국 초등봉도 다수 나온다. 1996년 대한산악연맹팀의 충모강리(7,048m)-룽보강리(7,095m) 원정과 2001년 봄시즌 전남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재명)의 중국 대설산맥의 아이더자(6,618m), 2003년 포스코팀의 시모캉리(7,204m) 등정, 2003년 김창호가 파미르의 딜리상 사르(6,225m) 힌두라지의 아타르 코르(6,189m)와 하이즈 코르(6,105m) 카라코룸의 박마 브락(6,150m) 등 4개봉을 한 시즌에 단독 세계 초등정을 이룩한다. 그리고 그가 이끈 2008년 서울시립대 원정대는 당시 히말라야에 남겨진 가장 높은 미등정 봉우리였던 바투라-Ⅱ(7,762m)에 최석문과 함께 세계 초등정한다.

로체 남벽 등반에 성공해 히말라야 8,000m급 3대 남벽을 마무리 짓겠다는 한국산악인들의 의지도 식지 않았다. 1999년 합동대와 2004년 한국도로공사 팀이 도전했으나, 낙석 등의 위험과 악천후로 인해 7,550m를 최고 도달점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멈추지 않는 거벽 등반의 열정은 2005년 낭가파르바트 등정으로 이어진다. 2005 한국 낭가파르바트 루팔대장벽 원정대(이성원 대장)의 김창호·이현조 2인조는 표고차 4,500m의 루팔벽 직등루트로 정상에 오른 다음 반대쪽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하는 횡단 등반에도 성공한다(이 등반은 국내의 반응과 달리 유럽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아 변형 신 루트 개척으로 기록됐다).

2011년은 한국 산악계에 비운의 해

밀레니엄 이후, 한국 산악계의 히말라야 진출 양상은 그 색깔이 두드러진다. 8,000m급 14좌 한국 최초가 끝나면서 식을 줄 알았던 유행은 여전했고 개인 또는 5개 정도의 대산련 각 시도연맹이 매진 중이며 7대륙 최고봉 또는 5대륙 최고봉 목표 등의 붐이 일고, 어려운 루트와 초등을 좇는가 하면 초경량 속공 등반법인 ‘알파인스타일(Alpine Style)’을 추구한 팀과 등반가들이 등장한다.

언급된 14좌 후의 박영석의 8,000m급에서의 행보와 또 한 명은 7,000m급에서의 김형일이다. 김형일은 탈레이사가르에서 추락사한 고 김형진의 친형으로 늦게 등반에 입문했으나 빠르게 굵직한 경력을 쌓는다. 2001년과 2006년 로체 남벽 등반, 2005년 트랑고타워 크럭스 존 개척, 2008년 아딜피크 신 루트를 개척을 필두로 2009년 스판틱(7,027m) 골든필라 신 루트를 알파인스타일로 개척해 국내 산악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그는 히말라야 거벽에 알파인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하겠다는 익스트림 프로젝트(Extreme Project)를 계획한다. 2010년 가셔브룸5봉(7,321m) 북서벽과 2011년 자누(7,719m) 동벽에 도전하고 그해 가을 시즌 장지명 대원과 함께 촐라체(6,440m) 북벽을 오르던 중 추락사한다.

이러한 알파인스타일은 1980년대 초반부터 시도되었는데 2007년 청죽산악회가 비록 신 루트는 아니지만 힌두쿠시의 가르무쉬(6,244m)를 등정해 아시아 황금피켈상(Piolets D’or Asia)을 수상해 큰 자극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11년은 한국산악계에 비운의 한 해였다. 안나푸르나1봉의 고 박영석·신동민·강기석과 촐라체의 김형일·장지명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을 잃었다. 어찌 이들뿐이랴. 1962년 첫 진출 이래 반세기 동안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사이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80여 명이 넘고, 한국대에 고용된 현지 고용인까지 포함한다면 120여 명에 달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두려웠을 죽음 앞에 기꺼이 섰던 이들. 이 위대한 죽음의 승리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대망과 그 정신은 앞으로 한국 히말라야 등반 반세기를 이어갈 ‘바람의 말’, 룽타가 되어 후대들의 길을 인도할 것이다.
 
    - 글·/ 김창호 기획위원·서울시립대OB / 사진 원정대  / 월간 산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