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3] *-

paxlee 2012. 4. 26. 21:39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현주소]

 
한국 히말라야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 
‘세계적 산악국가’ 성취했으나 등반스타일의 과감한 변화 필요

 

한국산악인이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아니, 불과 50년밖에 안 됐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이룬 업적은 가히 놀랄 만하다. 다양한 등반경험의 축적, 노하우 등 우리는 어느새 산악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끼었다. 참 대단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속도가 그러하듯이 한국 산악인들의 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잠시 더듬어보자. 우리의 1962년은 가난했다.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고작 20달러일 때니 얼마나 살기 어려웠을까. 군사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막 출범했다. 이 암울한 시절 히말라야로 향한 분들은 분명 선각자였다. 모두들 가면 죽는다고 말렸지만 박철암 대장은 자택을 팔았다. 최선을 대해 성실히 정찰활동을 폈다. 또 돈이 없어 배 타고 귀국했지만 보고서 ‘다울라기리산군의 탐사기’를 펴냈다. 시작이 참 순수했다.


거짓등정으로, 인명사고로 초장엔 침체 분위기

그러나 당시 대원이던 김정섭씨가 1970년 추렌히말(7,371m)에 도전해 세계 초등했다고 거짓 발표했으나(1988년 중동산악회가 이들이 거짓임을 입증함) 일본대에 의해 등정의혹이 제기됐고, 1971년 마나슬루(8,163m)에선 대원 1명이 추락사했으며, 1972년 재도전 때는 대원 5명과 셰르파 10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고, 세 번째는 대원들 간의 불화로 등반을 포기했다. 고용인들의 임금체불 등 김씨는 여러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선례를 남겼고, 이러한 영향으로 국내의 해외원정 분위기는 초장부터 다소 침체됐다.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쾌거였다. 4년에 걸쳐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로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에 힘입어 1980년대에 들어 히말라야 원정은 서서히 불이 붙었다. 1980년 동국대 팀이 단일산악회로는 처음 8,000m 등정의 개가를 올리더니 1981년에는 악우회가 카라코룸의 문을 열었다. 1982년에는 부산학생산악연맹과 대전자일클럽이 한 달 차이로 7,000m급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지방산악회의 히말라야 막을 열었다. 대전 팀은 세계초등정도 이룩했다. 이 해 선경여자산악회의 람중히말(6,986m) 등정도 있었고, 양정산악회가 7,000m급 동계등정의 막을 열었다. 1983년에 제천산악회의 8,000m 단독등정이 있었고, 1984년에는 한국외국어대 팀이 등로주의의 막을 열었다. 이 해부터 매년 10여 팀이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바야흐로 히말라야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앞서가는 산악인들이 선진국 대열의 기록을 세우기 시작하자 상당수의 대학과 일반산악회가 너도나도 히말라야로 방향을 잡았다. 산의 높이와 루트, 도전시기, 팀의 규모 등이 점차 다양해져 갔다. 1988년 대한산악연맹 팀은 최초로 8,000m 급 2개봉을 이어 두 자리 수의 등정자를 배출했고, 울산 팀은 6,000~7,000m 급 3개봉을 연속 등정했다.

세계적인 기록도 제법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현지적응력 미숙으로 인한 셰르파의 높은 의존도, 거짓등정 발표와 등정의혹의 불신도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원정비용 마련을 위해 네팔 경제사범의 우를 범하는 팀도 있었다.

1990년대는 가일층 성숙되어 갔다. 네팔에서 탈피해 인도, 티베트 및 카라코룸, 파미르, 톈산으로 등반대상지가 확산되고, 외국 팀과의 합동등반, 동계 및 거벽등반, 소수정예 등 등반스타일도 폭넓고 빠르게 변천되어갔다. 매년 20개 안팎의 팀이 대거 히말라야로 향하다 보니 실패도 잇달았고 사고도 많이 발생했지만 곳곳에서 ‘코리안루트’가 탄생했다. 난공불락의 거벽에도 한국인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시대적 적응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21세기가 되자 초장부터 8,000m 완등자를 세 명이나 배출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펼친 일대 쾌거로, 본격적인 히말라야 붐이 분 지 불과 10여 년 만의 일이니 세계 산악인이 경악할 수밖에. 여기에 멈추지 않고 경험 많은 선두대열들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거벽등반, 연속등반으로 흐름을 주도해 나가더니 급기야 작년(2011)에 부산시산악연맹 팀이 5년 4개월 만에 알파인스타일로 14개 8,000m봉을 마무리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최고봉 높이가 해발 2,000m도 안 되는 조그만 나라가 불과 50년 짧은 역사에 이처럼 산악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산을 경외하고 산에 의지하며 살아온 산문화 민족이기 때문일까.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과 도전정신이 강해서일까. 둘 다 일까?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분석해 보면 반성해야 할 점도 제법 발견된다. 앞으로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계속 노력해야 하는데 몇 가지 우려도 있다.

아직도 몇 원정대를 제외하곤 셰르파의 의존도가 심하다. 이를 해소하려면 등반스타일의 과감한 변화가 요구된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려는 의지도 많지 않다. 동계, 직등, 단독 등 다소 무리한 도전은 오히려 줄어든 듯싶다. 산정의 수도 중요하겠지만, ‘언제, 어디로, 어떻게’가 더 중요해야 산악선진국이다. 또 무엇보다 히말라야에선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

혹자는 일본보다 우리가 앞섰다고 하는데, 일본에 8,000m 완등자가 없을 뿐이지 등정자 수는 우리의 두 배다. 6,000~7,000m급 등정자 수는 우리보다 몇 배나 많다. 5,000~6,000m급의 미답봉을 찾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훨씬 넘었다. 야마노이 야스시처럼 “등산은 자신의 즐거움이기에 타인의 지원을 받아 산에 갈 수 없다”는 상업주의와 영웅주의를 배제한 순수산악인도 우리에겐 아직 안 보인다.


등산의 내면세계를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격려해야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민스포츠는 등산이다. 1,000만 명 이상이 매달 산에 오르며, 등산의류업체는 매년 호황을 누리고, 일반시민의 아웃도어 패션도 우리만큼 세련된 나라가 없다. 그러나 ‘양(量)에서 질(質)이 나온다’는 진리를 그대로 믿고 있으면 안 된다. 산악인 대부분이 중장년층 이상이기 때문이다.

땀 흘리며 산에 오르는 10대 청소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전국 대부분의 대학산악부가 신입회원이 없어 대가 끊기기 일쑤고 벽 등반 전문산악회도 신입회원 수가 감축일로에 있다. 인천-카트만두 왕복 KAL편이 주 2, 3회에 이를 만큼 히말라야 트레킹은 넘쳐나지만 정작 등반대는 줄어드는 실정이다. 삶이 윤택해질수록 권투, 레슬링 등 헝그리스포츠가 약해진다는데 히말라야 등반도 예외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등반잠재력은 무한하다. 인재도 많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꽃을 피우려면 몇 가지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국제무대에서 아직 약하기에 서둘러 국제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세계화를 통한 진취적이고 가치 높은 문화공유가 필수적이고, 앞서가는 외국 산악인과의 정보교류 및 합동등반은 필연적이다.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체의 범사회적 지원도 절실하다. 다행히 최근 몇 등산장비업체가 전도유망한 젊은 산악인들을 육성하고 있어 참 고무적이다.

등산잡지 등 관련 매스컴들도 적극 동참해야 한다. 제아무리 사회인지도가 높아도 현재 히말라야 도전에서 한 발 물러난 영웅보단 장래가 촉망되거나, 떠오르는 스타를 발굴해 주안점을 맞추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산악인과는 서로를 함께 필요로 하기에 상부상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산악인 스스로가 대자연을 경외하면서 도전정신에 충만해야 한다. 등산의 내면세계를 사랑하되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격려해야 한다.


- 글·김병준 전 대한산악연맹 감사 / 월간 산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