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8] *-

paxlee 2012. 5. 10. 21:59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명등반가들]

 

고미영의 매니저로서 14좌 완등한 김재수

경남 김해 태생인 김재수(51·대한산악연맹 이사)는 1991년 시샤팡마 남서벽 등반 당시 엄홍길을 비롯해 막강한 클라이머들을 물리치고 김창선과 함께 남서벽 등정조로 뽑혔다. 1996년에는 엄홍길과 함께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최단시간 등하산을 해낸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산 속도 등반가였다. 그러나 그가 14좌 완등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1990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1년 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시작한 신문배달을 통해 하체를 강하게 다진 그는 암벽등반 강습회나 다른 사람의 등반을 곁눈질해 가면서 등반을 익히고, 부산 금정산에서 사귄 클라이머들과 함께 기량을 키워 나갔다.

1987년 말, 제대 직후 다니기 시작한 회사를 그만두고 신발 안창 회사인 백산실업을 차린 그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자 곧바로 히말라야로 달려간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곤 이듬해 한-일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으로 등반에 나서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아침저녁 20km씩 달렸을 정도로 강한 훈련을 견뎌낸 김재수는 1991년 대한산악연맹 원정에서 김창선과 함께 남서벽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나서 시샤팡마 정상에 올라 등반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92년 로부제 동벽, 1993년 캉텐그리, 초오유 단독등정, 1994년 포베다 단독등정, 199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로체 서벽 등반, 1996년 아콩카구아 최단시간 등하산, 1997·1998년 엘부르즈 등반, 1999년 가셔브룸4봉 등반으로 이어지는 열정적으로 펼친다.

그러나 이후 그는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서 회사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장기간의 원정을 자제하고 매킨리나 십튼스파이어 등 한 달 남짓한 원정에 한해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 2002년 일본산악인들의 청소등반에 참가했다가 로체 등정에 성공한 그는 2007년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마음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을 꾸린다.

거기서 그는 고미영과 인연을 맺는다. 이미 에베레스트 등정을 한 번 실패한 바 있는 고미영은 북릉~북동릉 루트로 정상까지 올라가는 사이 김재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해 여름 브로드피크 원정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김재수는 딱 한 번만이란 전제로 등반에 참가했으나 브로드피크로 향하는 사이 고미영의 14좌 완등에 대한 꿈을 듣고 매니저 역할을 맡기로 약속한다.

김재수는 고미영과 함께 브로드피크와 시샤팡마를 등정하고, 이듬해 2008년 로체, K2, 마나슬루 3개봉 등정에 이어 2009년에는 봄시즌 마칼루,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3개 고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고미영은 낭가파르바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에 실족사한다.

김재수에게는 K2 원정 때 경남 지역 후배 산악인 3명이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틀넥 일원에서 세락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극도 견디기 힘든 사고였지만 2년 반 동안 10개 고봉을 함께 등정하며 히말라야에 대한 꿈을 나누고 키운 고미영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무리한 등반을 자제시키지 못했다는 책임까지 그에게 얹어져 한동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재수는 고미영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산악인으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머지 고미영이 오르지 못한 나머지 3개 고봉 등정 길에 나선다. 그리 하여 2010년 여름 가셔브룸1, 2봉 등정에 이어 2011년 봄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고, 같은 해 가을 1993년 불법월경 등반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초오유 정상에 올라 8,000m급 14개 고봉 등정 레이스의 종지부를 찍는다.

 

▲ 지현옥

 

설산에서 맹위 떨친 여성산악인 지현옥

남자 산악인들에 비해 수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몇몇 여성산악인의 활동은 남자 산악인들을 능가했다. 그중 지현옥(1961년생)은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한 대모(大母)로 꼽힐 만한 여성산악인이다.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를 등정하고 하산 중 실종한 지현옥은 한국 여성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지현옥이 실종되기 이전까지 국내 여성산악인 가운데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고산 등반을 해본 사람은 있지만, 그녀처럼 지속적으로 고산 등반을 추구해 온 여성산악인은 없었다.

서원대 산악부 시절부터 독종으로 꼽혀온 지현옥은 원정을 앞두곤 하루종일 훈련에 몰두할 만큼 준비에 철저했다. 1988년 매킨리(6,194m)를 시작으로 1989년 안나푸르나, 1990년 캉첸중가 원정에 참가한 바 있는 지현옥은 남자 후배들로 구성된 서원대 산악부를 이끌고 중국 고봉 무즈타그아타 등정에 성공하면서 대장의 자질을 인정받고, 그로 인해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을 맡는다. 대산련 집행진과의 갈등으로 무산될 위기도 있었으나 지현옥은 꿋꿋하게 견뎌내고 후배 두 명과 함께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선다.

그러나 귀국 후 대산련 집행진과의 갈등뿐 아니라 원정 중 있었던 대원들 간의 불화가 불거져 나오면서 지현옥은 산악계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산과 멀리 떨어져 지낸다. 그러나 산을 향한 지현옥의 열정을 사그라지지 않고 다시 활활 타올랐다. 대신 여러 명의 원정을 홀로 준비하고 현지인들을 고용해 등반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1997년 가셔브룸1봉에 이어 1998년 가셔브룸2봉을 등정하고, 이듬해 1999년 선배인 엄홍길씨의 제의로 안나푸르나 원정에 동참했으나 안타깝게도 등정 후 하산길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고미영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 등반가로 변신한 고미영

2009년 11번째 8,000m 거봉인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 후 하산길에 사고를 당한 고미영(1967년생)은 후배 산악인들에게 의지의 표상이었다. 그녀에게 산은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자 자기 계발을 위한 장이었다. 고미영은 특히 스포츠클라이머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무엇보다 변신과 도전을 거듭하면서도 단 한 번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는 후배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스포츠클라이머로서 산악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등반경기대회 9연패를 달성하고, 아시아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도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여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대륙은 그녀에게 좁았다. 세계 제패를 위해 달렸다. 그로 인해 2000년 월드컵 랭킹 6위에 이어 2001년에는 5위에 입상했다. 스포츠클라이밍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1999년 빙벽등반을 배운 지 3년 만인 2002년 세계 선수권대회 4위에 오르고, 이듬해 2003년 월드컵 랭킹 5위에 올랐다.

이렇게 스포츠클라이머로서 명성을 쌓아올린 고미영의 꿈이 하얀 산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첫 번째 대상은 파키스탄의 드리피카(6,447m)였다. 거기서 그녀는 등정 길에서 60m나 추락하는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했다. 그 꿈은 이듬해 세계 최고봉 도전에서 꺾이는 듯했으나 이를 쓴약으로 삼고 와신상담, 이듬해 2007년 봄 에베레스트 재도전에 성공했다. 이후 불과 2년 2개월 만에 8,000m급 11개 거봉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미영의 멈추지 않을 듯했던 고봉 등정 행렬은 11번째 거봉인 낭가파르바트 등정 소식이 TV를 통해 전해진 지 하루 뒤인 7월 11일 오후 7시경 추락 사고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 오은선

 

14좌 완등 공표했으나 캉첸중가 등정 의혹에 시달린 오은선

오은선(46·블랙야크)은 2010년 4월 27일 KBS의 위성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게 안나푸르나 등정 과정이 방영되면서 14좌 등정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한 여성산악인이다.

수원대 산악부 출신인 오은선은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멤버로 히말라야 등반에 데뷔한다. 그 등반에서 눈에 띌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고산 등반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고 1997년 대학산악연맹 원정대에 합류해 가셔브룸2봉 등정에 성공한다. 오은선은 이후 박영석 원정대 대원으로서 활동, 19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2001년에는 K2 원정에 동행했으나, 등반마다 한 명씩 목숨을 잃는 사고만 겪고 등정은 하지 못한다.

오은선의 두 번째 고봉 등정은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이루어진다. 14좌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도 멀고 힘든 일이라 판단하고 7대륙 최고봉 완등의 일환으로 나선 원정이었다. 오은선은 그 등반에서 세계 최고봉 등정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전날 정상에 올랐다 하산길에서 설맹에 의한 탈진사고를 당한 동갑내기 산꾼 박무택의 주검을 목격하고도 그냥 정상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5년 스키를 타다가 정강이가 복합골절되는 부상으로 한 해 동안 등반을 중단했던 오은선은 2006년 시샤팡마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 봄 초오유 등정을 해낸 데에 이어 여름시즌 K2 재도전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K2 등정에 성공한다.

이후 오은선의 꿈은 14좌 완등으로 커졌다. 이어 2008년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2009년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낭가파르바트, 그리고 가셔브룸1봉 등 2년 연속 한 해 4개 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이렇듯 오은선이 한 해 4개씩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엄홍길과 박영석이 그랬듯이 바싹 좇아오는 고미영의 추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낭가파르바트 등정 이틀 뒤 고미영이 사고를 당했을 때는 고산 등반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오은선은 2010년 4월 27일 위성생중계를 통해 정상에 올라서는 과정이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감격 속에서 14좌 등정 페이스를 마무리 지었으나, 그 한 해 전 올랐다고 발표한 캉첸중가 등정 사진이 불확실하고 등반 과정에 대해 정확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아 아직도 한국 산악들 사이에서 14좌 완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급 고봉에서 난도 알파인 등반 추구하는 유학재

한국 히말라야 등반을 대표하는 산악인은 8,000m급 고봉에서만 탄생한 것은 아니다. 6,000~7,000m대 고봉에서 신 루트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멋지게 구사한 클라이머들도 여럿이다.

그중 유학재(51·필라스포츠 고문)는 대표적인 알파인 거벽 등반가다. 1988년 한국 최대 빙폭인 토왕성빙폭을 1시간38분 만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 유학재는 러시아의 코뮤니즘(7,445m) 등정을 시작으로 1992년 알래스카의 키차트나스파이어 동벽 신 루트 등반에 이어 1994년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 등반을 해낸 다음인 1995년 히말라야 고봉에 첫 진출한다. 대상은 카라코룸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거벽인 ‘빛나는 벽’ 가셔브룸4봉(7,925m) 서벽이었다.

한국산악회 원정대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가셔브룸4봉 서벽 첫 도전은 해발 7,800m 지점에서 끝을 맺었으나 이태 뒤인 1997년 두 번째 도전에서 그는 중앙립 신 루트 개척 등반에 성공한다. 이후 잠잠하게 지내던 유학재는 높이를 더욱 낮춘다.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기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산을 대상으로 하되 대신 난도 높은 암빙설 혼합벽을 택했다.

그는 이후 2001년 콩데리(6,093m) 북동릉 동계등정에 이어 2005년 콩데샤르 동계등정에 성공하고, 2008년에는 한국산악회 후배들과 함께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오지에 솟아 있는 CAC샤르(5,942m)와 코리안샤르(6,000m) 초등에 성공한다. 그리고 2010년 1월 파릴랍체 신 루트 등반에 성공했으나 안타깝게도 황기용 대원이 하산길에서 심한 복통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유학재의 알파인 등반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위)유학재 / (아래)김형일(왼쪽), 장지명

 

동생 형진과 같은 난도 높은 길 좇다 유명 달리한 김형일

지난해 가을 촐라체에서 후배 장지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김형일은 알파인스타일 거벽 등반을 추구하는 등반가였다. 김형일은 동생 형진씨가 1998년 탈레이사가르 북벽에서 추락사한 이후 전문등반에 몰입하기 시작한 클라이머다.

김형일은 1999년 캐나다 부가부 등반으로 혼합 거벽등반을 처음 경험하고 2001년 로체 등반을 통해 해발 7,500m대 고도를 경험해 본 이후 인도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 등반(2004년)과, 파키스탄 네임리스타워(6,239m) 신 루트 등정(2005년)을 해낸 데에 이어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아딜피크(5,300m) 신 루트 등정(2008년)에 성공하고 2009년 파키스탄 스팬틱(7,027m) 신 루트 등정으로 절정에 이룬다.

이러한 등반업적으로 2006년 대한민국산악상 개척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9년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을 받기도 했던 김형일은 2008년 K2 클라이밍 팀장을 맡으면서 더욱 열정인 등반을 펼쳤다. 지난해 가을 촐라체 등반에서 함께 사고를 당한 고 장지명과 등반한 가셔브룸5봉(7,321m) 북서벽(2010년)과 자누(7,719m) 동벽(2011년) 같은 등반은 국내 산악인으로서는 첫 시도였다.

김형일은 거벽등반과 알파인 등반 기술 보급에도 힘썼다. 김형진이 1998년 사고 전 문을 연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로서 거벽등반 기술 전파에 힘쓰는가 하면 2011년 1월에는 설악산에서 개최한 동계산악인 모임에 일본의 세계적인 알파인 등반가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더욱 많은 클라이머 탄생하기를 기대

앞서 거론한 산악인 외에도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를 장식한 산악인들은 무수히 많다. 1998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에 성공하고 정상 설원에서 추락사한 신상만·최승철·김형진 세 악우는 히말라야 혼합 거벽 등반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등정보다는 난도 높은 벽을 도전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었다.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추락사한 오희준과 이현조는 8,000m 고봉을 단지 등정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자기만의 길로 올라가려는 알피니스트 정신을 추구했던 클라이머들이다. 게다가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 기점에서 박영석 대장과 함께 눈사태 사고를 당한 신동민·강기석, 또한 그에 앞서 2009년 가을 히말출리(6,441m) 북벽에서 실종한 민준영과 박종성 역시 머메리즘에 입각해 높이보다 난이도를 추구했던 클라이머들이다.

이들 모두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경험이 많고, 앞으로 더욱 진보적인 첨단등반을 통해 한국 히말라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이들이었기에 많은 산악인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를 장식할 만한 클라이머들로서 현재 히말라야 등반이 진행중인 클라이머도 적지 않다. 13개 고봉 무산소를 기록하고 있는 김창호와 함께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14좌 완등을 향해 레이스를 펼쳐온 서성호는 이제 K2와 브로드피크 2개 고봉만 남겨놓은 상황이다. 양손가락 장애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꿈꾸는 김홍빈(광주 송원대 OB), 역시 14좌 완등을 향해 레이스 중인 김미곤(버그하우스), 요세미티의 거벽에서 기량을 닦은 뒤 히말라야 고봉 거벽에서 멋진 등반을 펼쳐왔고 올 여름 라톡1봉(7,145m) 북벽에 도전하는 거벽등반가 김세준(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과 탈레이사가르 북벽 한국 초등 외에도 8,000m급 3개 봉 등정자인 구은수(서울시재난구조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 클라이머들이다.

올 여름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 50주년을 맞는 8월 15일까지 수많은 히말라야니스트들이 탄생해 왔듯이 앞으로 50년이 지나 한국 히말라야 등반 100주년을 맞는 2062년에는 한 권의 책에 다 적어넣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클라이머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글·/ 한필석 월간 산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