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5] *-

paxlee 2012. 5. 2. 21:45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인터뷰]

“히말라야는 무궁무진합니다, 광대무변입니다”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 박철암 옹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최초의 원정대인 다울라기리2봉 정찰대 박철암 대장. 미수의 고령에도 등반 열정을 가지고 있는 박 대장은 “산악정신의 근본인 진취적인 기상을 배우려면 무조건 미답봉을 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도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게 다울라기리2봉 원정입니다.” 1962년,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인 경희대 다울라기리2봉 정찰대 박철암(朴鐵岩·88·경희대 명예교수) 대장은 중국문학과 전임강사 시절인 1950년대 말부터 히말라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당신, 히말라야 가면 뼈도 못 추려요”

그가 즐겨 읽던 일본의 산악전문지 <산과 계곡>에는 1950년 프랑스가 인류 최초로 8,000m 고봉인 안나푸르나(8,091m)를 초등하고, 1953년 영국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르는 과정이 생생하게 나오곤 했다. 세계열강들이 히말라야 8,000m 고봉 등정에 열중한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웃나라 일본이 마나슬루 초등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을 뒤흔들어놓았다.

“나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던 터에 1958년 겨울 설악산을 다녀와서 타 대학산악부원들과 얘기하던 끝에 8,000m급 고봉 가운데 다울리기리(8,167m)가 아직 등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마저도 1960년 5월 스위스 원정대가 정상에 올라섰지 뭐예요. 그래서 아직 등정되지 않은 2봉을 택한 거예요.”

다울라기리2봉(7,751m)은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한 처녀봉 중 가장 높은 봉이라는 게 무엇보다 매력이었다. 마음은 먹었지만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어렵던 시절에 히말라야 원정이란 말처럼 행동에 옮기기 쉽지 않은 거사(巨事)였다.

“문교부에 히말라야 원정을 가겠다고 신청하니까 차관이란 사람이 ‘당신은 히말라야에 가면 뼈도 못 찾을 거야’, 하는 거예요. 히말라야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였던 거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산악인들도 침묵했다. 딱 한 사람이 편을 들어주었다. 여행가 김찬삼 선생이었다. 그는 “등산의 성패를 어찌 이 자리에서 논할 수 있겠느냐, 히말라야에 가겠다는 의지만 해도 가상한 것 아니냐”며 우군이 돼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해외여행 허가는 내려졌지만 조건이 따라붙었다. 정찰등반에 한해서였다.

“막상 허가가 떨어지고 나니까 돈이 문제더군요. 경희대산악부와 후원 언론사인 동아일보에서 도와주고 대원 분담금으로 25만 원씩 거뒀는데도 모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 부근에 있던 집을 팔았어요. 거기서 나온 100만 원을 보태서 원정을 떠난 거죠. 다섯 달 지나 집으로 돌아오니까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일본에서 구입한 장비와 식량 등 3톤의 짐은 배로 먼저 보냈다. 그리고 8월 15일 광복절에 출국, 인도의 캘커타에서 짐을 찾아 대륙횡단 열차에 싣고 인도 북부 국경도시 파트나까지 간 다음 다시 항공편으로 카트만두로 갔다. 그리곤 포카라에서 시작한 캐러밴은 베이스캠프까지 19일이나 걸렸다.

“히말라야가 초행인 대원 4명이 셰르파의 말만 믿고 걸었어요. 마양디강을 건너고 정글을 헤치고 또 협곡을 몇 차례나 건넜는지 몰라요. 몬순이 끝나기 전이었으니 비오는 날이 많았어요. 해발 4,6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보니 식량도 거의 다 젖어 있고, 그 많은 성냥 중 쓸 수 있는 게 19개피밖에 되지 않았어요. 셰르파들에게 나무를 해오라 하여 불을 피웠어요. 불씨를 절대 못 꺼뜨리게 했죠. 꺼지는 순간 불을 피우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베이스캠프까지는 현지인들의 안내로 잘 찾아갈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쉽게 구하리라 믿었던 지형도는 일본에도 없었다. 겨우 구한 게 삼각형으로 봉우리 표시가 돼 있는 개념도 한 장이었다.

“1봉부터 5봉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봉이 없었어요. 모두 1,000m가 넘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니까요. 혹시 싶어 미얀디빙하 깊숙이 들어가 봤어요. 10km쯤 들어갔을까요, 미얀디콜이 보이는데 거기서 2봉으로 능선이 이어질 것 같더군요. 6,300m에 캠프3를 치고 능선으로 올라섰는데, 참.”

대원 네 명 중 한 명은 식량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고, 또 한 명은 성냥을 구하러 다니느라 대원 한 명과 둘이서 정상으로 향했다. 능선으로 접어드는 구간에 무너져 내리는 빙탑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올랐다. 그러나 정상부가 보이는 능선에 도달했을 때에는 파란빛을 내는 빙벽이 정상 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렵게 왔는데 등정 실패했다고 생각하자 눈물 펑펑 쏟아져

“등반깨나 했던 송윤일 대원이 갑자기 큰소리로 울지 뭐예요. 셰르파들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저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어떻게 해서 온 원정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도 울음이 터진 거예요. 둘이 부둥켜안고 정말 엉엉 울었어요. 울음을 그친 다음 그냥 갈 수 없어서 바람이 덜 부는 구릉지대로 가서 태극기를 활짝 펴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셰르파에게 높이를 물어보니까 6,700m쯤 된다고 하더군요. 다울라기리2봉 대신 목표로 삼은 무명봉 높이가 해발 6,770m였으니 정상을 70m쯤 남겨놓은 지점이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후회스러워요. 어떻게든 올라보는 건데 말입니다.”

귀국 길도 쉽지 않았다. 돈이 모자라 원웨이 티켓을 끊어 원정을 나섰기에 돌아올 길이 막막했다. 방콕까지 겨우 온 다음 당시 대사였던 유재흥 장군의 연대보증을 통해 구입한 배표로 여객선을 타고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도착해 서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선친의 부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을 만나는 순간 참담했어요. 출국 닷새 후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가족에게 신신당부하셨대요. 절대 알리지 말라고요. 남자가 큰일 하는데 흔들리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면서요. 아내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어요. 어린 애들을 셋씩이나 데리고 이천의 기도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요.”

박철암 대장은 이렇게 혹독한 경험을 했음에도 1971년 또다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선다. 1971년 대한산악연맹 로체샤르 원정이었다. 대원들은 대산련 각 시도연맹에서 선발한 막강한 산악인 11명이었다.

“당시 최고의 미등봉을 오르겠다는 각오로 입산을 신청해 놨는데 출국 1년 전 오스트리아 팀이 초등에 성공했어요.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에 원정을 강행했어요.”

박철암 대장은 로체샤르(8,400m) 원정에서도 등정의 기쁜 순간을 맛보지 못한다. 오히려 초반에 애를 많이 먹었다. 대원 한 명이 해발 5,050m 높이에서 고소증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산소호흡기를 씌워주고 헬기를 불러 카트만두로 후송시키는 등 난리를 쳐야 했다.

“서북능선은 대단했어요. 칼날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성공할 줄 알았어요. 고정로프 1,400m를 깔았는데 모자라지 뭐예요. 안전지대에 설치한 로프 400m를 거둬 위에다 깔았어요. 한데 그 줄로도 모자랐어요. 몬순이 오지만 않았어도 계속 밀어붙였을 텐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워요. 최고도달점 8,000m로 기록돼 있지만 최수남은 정상 350m 못미친 8,150m 지점까지 올랐어요. 아시죠?  ’77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설악골에서 눈사태로 사고당한 최수남 말이에요. 정말 대단한 산꾼이었어요.”

1990년 첫 탐사 때 감동받은 이후 매년 티베트 답사

1924년 평안북도 태생인 박철암 대장은 열여섯 살 때 마을 뒷산인 해발 2,090m 높이의 동백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다. “꼭대기에 배조각이 있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에 솔깃해 오른 산이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면서 정상에 올랐으나 정상 바위가 무너져 내려 기대했던 배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첫 산행이었고 이후 산은 그에게 정신적인 고향이었다. 광복 직후인 1947년에는 세검정에서 출발해 백운대 정상까지 오르는 한국산악회 백운대 등산경기대회에 출전해 4등에 입상하기도 했고, 분단 이후 어수선한 시절이었던 1958년 설악산을 올랐을 만큼 산은 그의 인생 깊숙이 자리잡았다.

“지금도 홍종인 회장님의 말씀이 귀에 생생합니다. 대회를 마친 다음 선수들을 모아놓고선 ‘여러분은 오늘 힘들게 올라왔지만 이제 내려가야 합니다. 오를 때는 못 보셨을 테지만 내려갈 때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겁니다. 인생은 바로 이렇게 등산과 같습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런 말씀 때문에 더욱 열심히 산에 다니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박철암 옹은 1971년 로체샤르 원정을 끝으로 히말라야 등반은 멈췄다. 대신 1989년 말 중국이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이후 매년 티베트를 찾고 있다.

“인사동에 있던 여초 김응현 선생 서예원에서 박영배라는 산꾼이 ‘티베트가 개방됐어요’ 하는 거예요. 그 다음인 1990년 6월 17일 이후 매년 티베트에 다녀와요. 참 대단했어요. 네팔 국경을 넘어 티베트에 들어가 첫 번째 올라서는 고개가 통라예요. 거기서 보면 정말 광활해요. 감동적이죠. 라사의 포탈라궁은 어떻고요. 지금은 출입이 금지됐지만 개방 초기엔 샅샅이 볼 수 있었어요, 스님들의 의사당인 즈무쎈샤는 석조기둥이 대단해요, 길다랗게 드리워진 타르초와 승천하는 용 그림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였어요. 당태종의 딸 문선 공주의 방은 온통 보석으로 꾸며져 있고요. 문선 공주가 지었다는 조캉 사원도 어마어마하고요….”

“동화의 나라에 들어가 꿈꾸다 나온 기분이었다”고 포탈라궁 첫 방문 소감을 밝힌 박철암 옹은 이후 티베트 마니아가 됐다. 그는 특히 식물에 관심이 많다.

“통라고개를 넘어 풀밭에 앉아 쉬고 있는데 유목민 아가씨가 양떼를 몰고 가다가 빨간 꽃이 핀 풀잎을 뜯어 풀피리를 불었어요. 광활한 고원과 어우러져 황홀했어요. 꿈속 같았으니까요. 아가씨는 ‘파파화’라고 알려줬지만 라사대학의 식물전문가가 학명이 ‘잉카르필레아라’래요. 전에 식물도감을 한 권 냈어요. 요즘 또 한 권을 편집중이에요. 티베트 식물도감으론 세계 최초일 겁니다.”

박 옹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지역도 다녀왔다고 귀띔한다.

“라사대학에서 식물 공부하다 인연 맺은 대학 총장이 티베트 북쪽에 평균고도 4,500m에 면적이 50만㎢인 창탕고원이 있대요. 그러면서 그 위쪽에 있는 무인구(無人區)는 5,000m 높이에 20㎢ 넓이인데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다지 뭐예요. 앞으로 100년 뒤에도 사람이 못 들어간다면서요. 자원이 어마어마해 중국 정부에서 통제하는 지역이죠. 궁금해서 견딜 수 있어야죠. 그래서 5년 전 잠행했어요. 대단했어요.”

“히말라야에서 진취적 기상과 고고한 정신 배워야 해요”

박철암 옹은 이제 등반 대신 티베트 답사에 열중하며 지내지만 히말라야 고산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히말라야에 8,000m 고봉의 주봉은 14개이지만 위성봉까지 합치면 23개이고, 7,000m급 고봉은 주봉 350개에 위성봉은 200개 가까이 된다고 알려준다.

“6,000m급은 아직도 위성봉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어요. 2,400km 길이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봉우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무궁무진해요. 100년, 200년이 지나도 다 못 오를 겁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한 개척자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박철암 옹은 “다른 사람들이 오른 산을 오르는 답습 행위는 산악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산악정신의 근본인 진취적인 기상을 배우려면 무조건 미답봉에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히말라야는 광대무변하고, 봉우리는 무궁무진합니다. 산악인이라면 그 히말라야의 대자연에서 진취적인 기상을 키우고 고고한 정신을 배워야 할 겁니다.” 


 - 글·한필석 부장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