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6] *-

paxlee 2012. 5. 4. 21:38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명등반가들]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줄줄이 탄생한 명클라이머들
 
    6,000m급 알파인 거벽 등반 스타도 여럿 배출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 한국 히말라야 등반도 소수의 산악인들에 의해 부각되고, 또한 맥을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록 상 첫 한국 히말라야 등반은 1962년 경희대산악부의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등반이지만 히말라야 등반이 일반 등산인들과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김정섭 형제의 마나슬루 도전이다.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1971년(1명 추락사), 1972년(15명 눈사태 사고) 두 차례 원정에서 친동생 2명을 포함해 대원 7명(일본인 1명 포함)과 셰르파 10명 등 무려 16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준 히말라야 원정은 1977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세계 최고봉 등정의 쾌거로서 큰 기쁨을 주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직후 무전을 통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소감을 밝힌 인물이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1948년생)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당시,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민 모두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준 메시지였다.


▲ 고상돈 귀국 환영 카프레이드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정으로 우리 사회에 등산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히말라야 등반의 활성화에 기폭제 역할을 해 낸 고상돈은 1965년 충북산악회 회원으로 산에 입문했다. 충북 일원의 바위에서 전문등반을 배우며 기량을 닦아온 고상돈이 에베레스트 훈련대에 합류한 것은 1975년 2차 훈련 때였다.

고상돈은 체력과 체격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일에 충실한 데다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어 훈련 때부터 김영도 대장에게 인정을 받아왔고, 1975년 1차 정찰등반 때부터 7명의 대원 가운데 항상 앞장서 오르는 등 고소 적응 면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1977년 본 원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영도 대장은 “단지 ‘시골 출신’이란 핸디캡 때문에 다른 대원들과 융화가 잘 되지 않는 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고 회고한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당시 1차 공격 대원은 박상열 부대장이었다. 1971년 로체샤르(8,400m) 등반 당시 해발 6,700m까지 오른 경험이 있고, 정상인의 1.5배에 해당하는 폐활량(6,000cc)을 자랑하는 박상열 부대장은 함께 등반한 셰르파들에게서도 최고의 대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 부대장은 앙 푸르바 셰르파와 둘이서 나선 정상공격에서 남봉(8,750m)을 넘어 힐러리스텝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산소통 안의 산소가 떨어지는 바람에 정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에서 되돌아선 다음 해발 8,700m 높이 고도에서 영하 40℃의 혹한 속에서 셰르파와 부둥켜안은 채 비박 후 생환해야 했고, 그로 인해 한국 초등의 기회는 고상돈에게 돌아갔다.

당시 고상돈은 선배인 한정수 대원과 함께 2차 공격조로 내정돼 있었으나, 2차 공격 이후 사용할 예비산소가 없는 상황에서 등정 확률을 높이려는 김영도 대장과 장문삼 등반대장의 의지에 따라 펨바 노르부 셰르파와 둘이서 등정길에 나서 19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의 영예를 차지한다.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시골 산꾼’에서 산악 영웅으로 변신했으나, 이태 뒤인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원정에 나섰다가 5월 29일 등정 후 하산 길에 동료 대원 두 명과 함께 약 1,800m 아래 설원으로 떨어지면서 이일교 대원과 함께 사망했다.

제주도는 2010년 2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상돈의 기념동상이 서 있는 한라산 1100도로 일부 구간을 ‘고상돈로’로 명명했고, 그에 앞서 제주 산악인들은 고상돈기념사업회(회장 박훈규)를 통해 고인의 산악 정신을 기리고 있다. 고인의 아내인 이희수 여사는 에베레스트 초등을 기념해 정해진 산악인의 날(매년 9월 15일) 행사 때 고상돈특별상을 수여하고 있다.


▲ 허영호(우측)·허재석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과 횡단 등반 해낸 허영호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6,000~7,000m급 봉에서 이루어지던 한국 히말라야 원정은 1982년 한국산악회 학술원정대의 마칼루(8,463m·제6위 고봉) 등정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한다. 그 원정의 주인공이 제천 산악인 허영호(58·드림앤어드벤처 대표)였다.

허영호는 마칼루 원정에 참가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천 촌놈’이라 불릴 만큼 산악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대원들 가운데 공격조로 선발되어 마칼루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에는 마나슬루 단독등정에 성공한 다음 1985년 3월 투쿠체(6,920m), 1986년 1월 타우체(6,501m)에 이어 그해 여름 알스프 아이거 북벽 등반을 통해 등반력을 보여준다.

허영호는 1987년 12월 22일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으로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1989년 가을 가족과 함께 나선 원정에서 성공했다고 공표한 로체(8,516m) 단독 등정이 의혹에 휩싸이면서 산악계를 멀리하게 된다. 허영호의 로체 등반은 일반적인 고산등반과 달리 등·하산이 모두 밤에 이루어졌다는 점, 정상 사진이 없다는 점 등의 이유로 지금까지 등정 의혹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남극과 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하는가 하면 1993년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과 2007년 에베레스트 남동릉 루트 등정, 그리고 2010년에는 제천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으로서 아들 재석군과 정상에 올라 국내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여주~제주 성산읍 단독 왕복비행, 독도 단독 왕복비행 등 초경량비행기를 이용한 탐험활동을 펼치고 있다.


▲ 장봉완

대장 카리스마 넘치는 장봉완

고상돈이나 허영호처럼 대중에게 국내 최고의 히말라야니스트라고 각인돼 있지는 않더라도 전문산악인들 사이에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고산등반가로 인정받는 산악인이 장봉완과 김창선이다.

장봉완(60·한국등산학교 교장)은 죽음의 지대에서 30차례 가까이 살아난 산악인이다. 그는  1983년 12월 국내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꼽히는 틸리초피크(7,134m) 등반에서 등정 후 하산길에 추락해 발목 골절상을 입고 고통 속에서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했고, 알프스 마터호른(4,478m) 북벽과 에베레스트(8,848m) 서릉 원정 때에는 극심한 위경련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때마다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며 위기에서 벗어난 그는 1986년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로 꼽힌 김창선(52·성균관대 OB), 장병호(51·대구등산학교 교장)와 함께 K2(8,611m) 정상을 밟고, 1988년에는 대산련 원정대 등반대장으로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다.

장봉완은 어려웠던 시절 히말라야 고산을 등반하기 위해 선후배들과 함께 알파인프로가이드협회를 창립해 국내 최초 프로 등반가 길을 걸었다. 1983년 틸리초피크 등반은 상업등반으로 이루어진 등반이었다. 그는 탁월한 대장이기도 했다. 1989년 안나푸르나, 1991년 시샤팡마-초오유, 1992년 낭가파르바트, 1995년 가셔브룸1봉, 1996년 옥주봉, 충모강리 등 그가 대장으로서 이끈 원정대는 20여 개 팀에 이른다. 장봉완은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강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대장으로 꼽힌다. 그는 산과 등반대를 냉정하게 파악한 다음 승산이 없다 판단되면 가차 없이 등반을 접어버린다. 이 때문에 실패한 원정도 더러 있지만 단 한 건의 인명 사고 없이 원정을 이끌어 왔다.

 

꾼들 사이에서 1980년대 최고의 등반가로 꼽힌 김창선

장봉완과 함께 K2 정상을 밟고, 1992년 남서벽 신 루트로 시샤팡마 정상에 올라선 김창선은 지금까지도 ‘국내 최고의 고산등반가’라는 평을 받는 산악인이다. 그는 1979년 성균관대학 산악부 입회 이태 뒤인 1981년 스무 살 나이에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다.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등반이었다. 거기서 그는 고소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정상에 올라 함께 등반한 선배들을 놀라게 한다.

그의 고산 적응력은 1986년 여름 K2(8,611m)로 이어지고 그 등반에서도 당대 최고 고산 등반가인 장봉완, 장병호와 함께 세계 제2위 고봉을 올라선다. 마지막 캠프 출발 이후 다른 대원들이 분당 4리터의 인공산소를 마셔야 했으나 그는 그 반 정도의 양으로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1988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에 참가해 에베레스트 정상마저 밟지만 이후 1989년 성균관대 가셔브룸2봉(8,035m) 원정과 1990년 대한산악연맹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 원정에서는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그의 등반력은 1991년 다시 돋보인다. 여름시즌 대학산악부 선후배들과 함께 재도전한 가셔브룸2봉 정상에 올라서는가 하면, 그해 가을 당대 최고의 등반가들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원으로서 시샤팡마(8,046m) 한국 초등을 이룩한다. 당시 남서벽 등반은 두 차례의 비박 후 정상을 올려친 알파인스타일 등반이었다. 이 등반은 김창선에게 그간 해온 등로주의 방식을 벗어나 좀더 진보적인 히말라야 등반을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후 김창선은 소규모 등반대로서 난도 높은 등반을 추구하겠다고 마음먹고 이듬해 1992년 여름 ‘플라잉 키위’ 원정대 등반대장으로서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 도전한다. 오랜 세월 꿈꿔온 알파인스타일의 등로주의 등반을 실현한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등반은 악천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고, 이후 김창선은 결혼과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 (왼)김창선 / (오)엄홍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