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7] *-

paxlee 2012. 5. 8. 22:02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명등반가들]

 

‘8,000m 14좌 + 위성봉 2개봉’ 세계 첫 등정한 엄홍길

김창선의 등반이 도드라지던 시절, 엄홍길(52·밀레 고문)은 조연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샤팡마 원정 때는 루트 개척과 짐 수송을 앞장서 했음에도 정작 정상 공격조에 끼지 못해 서운함이 컸다. 알파인스타일 속공 등반 능력이 김창선이나 김재수보다 못하다는 대장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은 뒤에 쓴약이 돼 주었다. 엄홍길이 이를 악물고 산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보약’이었다.

엄홍길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도봉산 망월사계곡에서 생활했기에 도봉산은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산이다. 그는 양주고 시절 바위꾼을 만나며 본격적인 산꾼이 되어갔고, 1979년 고교 졸업 후에는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서 2년간 지내며 30~40kg 무게의 물품을 지어 날라주기도 하고 설악산 골짜기를 누비는 꿈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특수부대인 해군 수중폭파대(UDT)에 입대해 매일 혹독한 훈련이 연속되는 수중폭파대원 생활 3년을 거치며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은 1985년 세계 최고봉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에베레스트 하나가 목표였다. 그러다 1988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서고 이후 고봉을 하나씩 오르는 사이 세계적인 산악인이나 가능하리라 여겼던 8,000m 14좌도 해볼 만하다 싶어졌다. 그리고 2000년 K2 등정으로 목표가 달성되자(해외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는 2001년 가을 시샤팡마 등정으로 14좌 완등 인정) 그 꿈을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더하는 ‘8,000m 14좌 + 2개 위성봉 등정’으로 키워 나갔다.

2007년 봄 로체샤르 등정으로 꿈을 달성한 이듬해인 2008년 5월 설립된 엄홍길휴먼재단(www.uhf.or.kr)을 통해 네팔 히말라야에 학교 세우기 사업을 펼치고 있는 엄홍길은 지난 2월 말 안나푸르나 트레킹 기점인 비레탄티마을에 네 번째 학교 기공식을 가졌다. 엄홍길은 “꼭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산에 다녔지만 나를 살려둔 건 분명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라는 산의 메시지일 것”이라며 “이제는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내 인생의 산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산악그랜드슬램 +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 등반 성공한 박영석

지난해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중 신동민, 강기석 대원과 함께 사고를 당한 박영석(1963년생·동국대 OB)은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을 일컫는 산악그랜드슬램을 2005년 봄 해낸 데에 이어 2009년 봄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 루트를 뚫은 산악인이었다.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서는 박영석을 아시아 최초의 14좌 완등자로 기록하고 있다.

엄홍길이 앞장서 길을 뚫는 스타일의 저돌적인 클라이머라면 박영석은 팀 운영을 통해 등정을 이끌어내는 전략가 스타일이었다. 1989년 동국대산악부 팀을 이끌고 랑탕리(7,025m) 동계 세계 초등으로 히말라야에 화려하게 데뷔한 박영석은 1993년 남서벽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오르려던 계획이 남동릉 노멀루트로 바뀌었으나 대신 ‘무산소 등정’이라는, 아직도 국내에 없는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선다.

박영석은 1997년 다울라기리(8,167m), 가셔브룸1봉(8,068m)·2봉, 초오유(8,201m) 등 한 해 4개 봉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 1998년에도 시샤팡마 중앙봉(8,012m), 낭가파르바트, 마칼루, 마나슬루(8,163·동계) 등정에 성공하면서 한 발 앞서 14좌 완등을 향해 등반을 펼치던 엄홍길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99년 봄시즌에는 캉첸중가(8,586m) 등정에 성공하면서 박영석이 엄홍길을 추월하리라는 예상도 됐다.

그러나 1999년 여름 브로드피크(8,047m)는 함께 등반했던 타 대학 팀 대원 1명이 실족사하고, 가을시즌을 맞아 세 번째 도전한 시샤팡마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중앙봉에 머무는가 하면 두 번째 도전인 마칼루(8,463m) 역시 셰르파가 낙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를 당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박영석은 2000년 들어 피치를 올린다. 봄시즌 마칼루, 여름시즌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하고, 가을시즌에는 네 번째 도전에서 남서벽을 통해 시샤팡마 주봉에 올라선다. 그리고 2001년 봄 1998년 정상 직전 동상으로 인해 포기한 로체(8,516m)를 오르고, 이어 여름에 K2를 오름으로써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박영석은 이후 200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2005년 북극점 도보탐험 성공으로 산악그랜드슬램을 이룩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젊은 날 꿈꿔 왔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에 도전한다. 2007년 봄 첫 도전에서 친동생 같은 후배 오희준·이현조를 잃고, 2008년 가을 두 번째 도전에서 또다시 실패했으나 박영석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도전해 2008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새 길을 뚫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4개 고봉에 새로운 길을 내겠다는 목표 하에 안나푸르나 남벽 신 루트 등반에 나섰으나 2011년 가을 재도전에서 후배인 신동석, 강기석 대원과 함께 눈사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 (왼)박영석 / (오)한왕용

 

14좌 완등 후 청소 등반가로 변신한 한왕용

국내에서 세 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한왕용(46·신발끈여행사 이사)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다. 전주 우석대 산악부 출신인 한왕용은 박영석 사단의 멤버로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했다. 1994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 1995년 에베레스트, 1997년 로체, 가셔브룸1봉은 모두 박영석과 함께 일궈낸 등정이었다. 이후 그는 독자적인 등반대를 꾸리면서도 1998년 안나푸르나와 2000년 K2는 엄홍길 등반대 대원으로서 등정에 성공한다.

한왕용은 2001년 박영석이 K2 등정으로 14좌 완등을 마무리 지은 뒤 잠시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1등만이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2년 캉첸중가 등정을 마치고 2003년 마지막 남은 가셔브룸2봉과 브로드피크 원정에 나설 때에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이 마지막’이라 마음먹었다.

그 마지막 원정에서 히말라야는 그를 제물 삼으려는지 순간순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셔브룸2봉 등정에 성공하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설 때에는 크레바스에 빠져 30분간 헤매다 동료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나오고, 브로드피크 또한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제3캠프(7,400m)에서 내려서던 중 아이젠이 바지를 걸려 넘어지는 순간 1,000m 아래 빙하로 추락할 뻔한 위기의 상황도 맞는다. 무의식중에 휘두른 피켈이 눈에 박히면서 추락이 멈추고 허겁지겁 안전지대로 벗어났으나 이번에는 갑자기 몰려온 안개에 사방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다시 C3로 올라서는 것이었고, 그의 판단이 맞아떨어져 결국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4좌 완등 후 다시 14좌를 찾았다. 이번에는 청소등반이었다. 각 고산의 베이스캠프뿐 아니라 에베레스트 사우스콜과 K2 제3캠프에서도 이루어진 그의 청소등반은 해외 산악계에서도 선행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 박정헌

난이도 추구하다 촐라체 사고 이후 창공의 조인으로 변신한 박정헌

촐라체 북벽 등반 후 조난을 당한 다음 극적인 구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생환기 <끈>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박정헌(41·노스페이스)은 첫 히말라야 원정부터 난이도를 추구하는 등반을 펼쳤다.

고교시절 전국암벽등반대회 고등부에서 4위에 입상했을 만큼 암벽등반 기량이 뛰어나고, 인수봉 연장등반에 토왕성빙폭을 선등해 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박정헌이 18세 어린 나이에 삼천포산악회 원정대 대원으로서 도전한 봉이 히말라야 고봉에서도 난이도가 높고 험하다는 초오유 남동벽이었다.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능력은 높이 사졌고 그로 인해 1994년 제대 직후 경남연맹 원정대 대원으로서 히말라야 3대 난벽(難壁) 중 하나인 안나푸르나 남벽에 참가한 그는 그 등반에서 대원 중 홀로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전적으로 셰르파들에 의존한 등반이었다며 박정헌은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더 나은 등반을 위해 몸부림친 박정헌은 결국 이듬해 한국 산악인들이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보닝턴 루트 등반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1996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을 등정하고 1997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2000년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을 기록하고, 2002년에는 시샤팡마 남서벽에서 오랫동안 꿈꿔오던 8,000m급 고봉 신 루트 등반에 성공한다.

그는 등로주의를 추구했다. 때문에 8,000m급 고봉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2004년 가셔브룸2봉 등반을 마친 이듬해 1월 후배 최강식과 둘이서 촐라체(6,440m) 북벽에 도전한다. 수직고 1,500m 높이의 촐라체 북벽 등반 사상 최초의 동계 알파인스타일 등반에서 뜻을 이룬 뒤 그는 하산길에 후배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어렵사리 두 사람 모두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왔지만 후배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박정헌은 손가락 8개를 잘라내는 아픔을 겪었다.

이렇게 엄청난 사고를 당했음에도 그는 모험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수직의 세계’를 추구하는 등반가에서 MTB 라이더로 변신해 사고 이듬해인 2006년 유라시아 실크로드 자전거 투어를 해내고, 그 뒤를 이어 ‘창공의 조인’으로 탈바꿈해 오랜 세월 꿈꿔온 히말라야 하늘을 날았다. 초오유 6,500m 높이에서, 가셔브룸2봉 7,400m 높이에서의 활공을 경험 삼고, 3,4년 동안 히말라야 활공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를 밑바탕 삼아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초에 이르기까지 6개월 동안 히말라야 2,400km 패러 횡단을 해냈다.

한국 최초의 14좌 무산소 등정 기대주 김창호

김창호(43·몽벨 자문역·월간山 기획위원)는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탐험가로 통한다. 그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1,700여 일 동안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탐사했다.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눈사태가 덮치는 순간 그의 존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험난함에, 고독과 공포에 떨기도 했다. 귓가에 총알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새로운 봉우리와 빙하를 보고픈 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삶은 미지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출신인 김창호의 히말라야 등반은 대학시절 파키스탄의 대암탑 트랑고타워(6,283m)에서 시작되었다. 어렵사리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를 감동케 한 것은 등정의 기쁨이 아니라 발아래 펼쳐진 길고 긴 빙하였다. 때문에 그 빙하의 끝을 찾아 오랜 세월 탐험을 했던 것이다.

탐험 도중 그는 수많은 미등봉을 관심 깊게 바라보고 엉성한 지형도에 꼼꼼히 집어넣었다. 그리곤 2001년 멀티4원정대에 참가해 카체블랑사(5,600m) 세계 초등에 이어 혼보로(5,500m)와 시카리(5,928m)에 새로운 길을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창호의 등반력은 2003년 딜리상샤르 등 6,000m급 4개봉 세계 초등정을 기록하고 2004년 로체 남벽 등반에 참가한 이후 나타난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 직등루트를 1975년 매스너의 초등 이후 두 번째로 오르고 반대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하는 횡단등반에 성공하고, 2006년에는 가셔브룸2봉과 1봉 연속 등정을 해낸다.

이후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에 합류한 김창호는 2007년 K2, 브로드피크 연속등정, 2008년 마칼루 등정에 이어 로체 최단시간 등정을 이룩한 데 이어 서울시립대 원정대원으로서 당시 가장 높은 미등정봉인 바투라2봉(7,762m) 등정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부산 희망원정대의 주력대원으로서 파트너인 서성호 대원과 함께 2009년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2010년 캉첸중가·낭가파르바트·시샤팡마 등정에 성공하고, 2011년 봄 2009년 가을 실패한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라서는가 하면 여름시즌 가셔브룸1·2봉을 다시 오르고 가을 시즌 초오유를 등정함으로써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14좌 완등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김창호는 올 한 해 등반 휴지기를 가진 다음 내년 봄 시즌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서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 (왼)김창호 / (오)김재수

 

- 글 / 한필석 월간 산 부장 / 월간 산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