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김영도대장 회고기 [1] *-

paxlee 2012. 6. 20. 23:30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김영도대장 회고기
 
▲ 1974년 첫 훈련등반으로 나선 지리산 칠선계곡을 오르는 김영도 대장. 커다란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는 모습에서 대장으로서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에베레스트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그곳에 다녀온 지 35년이나 되는 지금도 나는 이 문제를 여전히 끼고 살고 있다. 나에게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 최고봉이 아니라 인생의 엄청난 드라마의 무대였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나에게 한꺼번에 닥치고 나는 그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워야 했다.


나는 산악인 이전에 대장이었다. 산도 모르면서 에베레스트 원정을 맡았기 때문이다. 1971년 초의 이야기다.


1970년, 당시 집권당의 선전부장이었을 때, 내가 전국 유명 산에 산장과 대피소 35동을 지었다고 해서 대한산악연맹이 주목하고 느닷없이 나를 부회장으로 끌어갔다. 그 무렵 연맹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인 로체샤르(8,400m)에 도전하며, 그 길에 네팔 행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허가 신청을 냈다. 우리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산련에서 나를 끌어간 것은 이를 테면 눈앞의 로체샤르 원정과 후일의 에베레스트 도전을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회장(국회의원)이 있었지만 연맹에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무렵 나는 직장의 젊은이들과 서울 근교 산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산(遊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사회에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이 있는 줄도 몰랐다.


부회장이 되자 바로 이사회라는 것이 열렸는데, 이때 로체샤르 원정 이야기가 나왔다. 요는 총예산 1,200만 원 중 400만 원밖에 없어 못 떠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당으로 돌아와 대통령께 상신해서 800만 원 지원을 받았다.


이런 처지에 연맹에서 에베레스트를 가겠다고 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맹에도 일리가 있었다. 입산을 신청해도 언제 허가가 날는지 모르니 이 기회에 해둔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신청했던 입산허가는 1973년 늦게 외무부를 통해 통보가 왔는데, 그것도 77년 포스트 몬순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무렵 에베레스트를 포스트 몬순기에 성공한 팀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게 됐다. 당시 에베레스트는 그런 곳이었다.


피켈을 처음 만지는 수준에서 대장 맡아


나는 전국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대원들은 20대, 나는 50대인데 모두 열심이었다. 산을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의 기백은 대단했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피켈을 처음 만지고, 배낭에 달 줄도 몰랐으나 ‘에베레스트라야 별 것이겠는가, 필경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산악계에서 에베레스트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에베레스트 문제를 책으로 접근했다. 지금도 변함없는 것은 산악인은 책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며 내가 놀란 것은 산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빈트얏게(윈드재킷)와 휘테(산장)를 모르며, 5대륙 6대주의 최고봉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 베이스캠프에 모인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영도 대장.

나는 책을 좋아해서 빠른 일본 등산 잡지 <山과 溪谷>, <岳人>, <岩과 雪> 등을 열심히 보았다. 국내에는 초라한 등산잡지가 나오고 있었는데 편집주간 혼자 일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유럽 알프스의 3대 북벽 이야기를 알고 혼자 흥분했으며, 알피니즘이라는 말을 산악계에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대산련의 모처럼의 로체샤르 원정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 원정의 공을 인정하고 싶다. 에베레스트가 그 일로 우리 앞에 다가오기도 했지만, 최수남, 박상열, 장문삼 등 유능한 리더들이 자랐고, 후일 그들이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위한 1차 지리산 훈련은 나의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등산계에 전혀 생소했던 내가 이 젊은이들과 깊이 사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후일 원정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 무렵의 장비란 한결같이 조잡하고 저질일 수밖에 없었으나, 우모복은 구경도 못 할 때였고, 군용 침낭은 지리산 추위에 견디기 어려웠다. 칠선계곡은 특히 설벽과 빙벽이 많았고, 대원들은 잡다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캠프를 전진시키는 훈련에 모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훈련을 통해 대원을 추려내는 일이 대장으로서 마음 아팠다. 그래도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연차 훈련에 지원해서 모여드는 것이 나는 눈물겹도록 기쁘고 고마웠다.


외국 등반 서적 통해 극한의 세계에 대해 공부


그러는 과정에 1976년 2월 16일, 설악산에서 눈사태로 대원들이 희생됐을 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일로 눈사태의 무서움을 비로소 알았지만 산악계가 눈사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외국 등산서적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다. 극한의 세계에서의 눈사태(snow avalanche), 고소적응(acclimatization), 컨디션 저하(deterioration) 등, 특히 히말라야 조건과 관련된 이 특수 용어들을 나는 이때 배웠다.


나는 이것들을 대원들에게 강의했다. 눈이 오면 다음날 절대로 움직이지 말 것, 고도순응 방법과 캠프 전진 때 일어나는 체력소모(하루 450g 체중 감소) 현상 등이 그것이다.


에베레스트는 대원정의 전형으로 대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원정대의 운용을 더욱 중요시 여겼다. 지난날 로체샤르 원정은 더욱 자금을 어렵게 마련한 처지에 대원이라 할 수 없는 군식구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 진입 과정에서 비행기로 가는 바람에 고소 순응에 지장이 있어, 결국 초반부의 고산병 문제로 원정은 큰 타격을 입었다.


나는 에베레스트에 최수남의 부인이 같이 가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시켰다. 남편이 그토록 좋아하던 히말라야를 그 미망인이 직접 가보려는 심정을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당시 이사들이 자비로 베이스캠프까지 가겠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일로 신경 쓰게 되는 것은 대원들이기 때문이다.

▲ 제 2캠프에서 대원들과 함께 식사준비 중인 김영도 대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나는 에베레스트가 아무리 높아도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다고 보았다. 문제는 아이스폴 돌파인데, 그 루트 공작에 원정대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말로리가 그 옛날 로라 능선에서 처음 내려다보고 “절대 통과 불능”하다고 말했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다리 제작에 신경을 썼다. 당시 국내에는 경금속이 없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물리적 충격 테스트를 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에서는 아이스폴 루트 공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등반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산소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 때 우리는 사다리 100개를 준비했는데, 98개가 사용됐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에베레스트 원정에서는 예외적이고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많았다. 1971년 봄에 신청한 입산허가가 1973년 가을에 나오면서 1977년 가을로 결정되었는가 하면, 1974년 가기로 돼 있는 프랑스 원정대가 준비가 안 됐다며 우리와 바꾸자는 연락이 왔었다. 결국 그 원정대는 그대로 갔다가 로라 능선에서 눈사태로 대장과 셰르파 4명이 희생되고 원정대는 패퇴했다.


우리는 국내에서 도움을 받을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당시 코오롱과 KBS가 지원을 거절했고,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이 혼자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은 국회의원이어서 더욱 손발이 맞았던지, 그때 장 회장이 나더러 정부에서 6,000만 원 지원받고, 자기 쪽에서 6,000만 원 부담하겠다고 했다. 당시 총 예산은 1억3,000만 원이었는데, 나머지 1,000만 원은 산악연맹에서 내라고 하고 대원들이 50만 원씩 냈을 뿐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내가 어쩌다 국회에서 재무위원회 소속이 되어 몹시 불만이었는데 이 때 화가 복이 된 셈이었다. 나는 그 인연으로 경제기획원장관을 알게 되어 바로 내 몫을 지원받았다. 그러자 장기영 회장이 과로로 타계해서 원정대 지원이 어려워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뒤늦게 장비를 일본에서 구입하게 되어 애로가 많았다. 이 때 가스 카트리지 1,500개를 속여서 공수했고, 프랑스 산소 50통이 그쪽 사정으로 서독제로 둔갑하는 바람에 우리가 준비한 레귤레이터와 맞지 않는 사실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비로소 알아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것도 프랑스 사정으로 수송이 뒤늦게 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산소통은 100개를 준비했는데, 1976년 2차 정찰대가 현지에서 미국대를 만나 그들이 비축했던 50통을 인수하고 나머지 50통을 프랑스제로 했던 것이다. 그 50통이 사용 불능케 됐을 때, 우리는 아이스폴에서 프랑스 산소를 13개 발견하는 행운으로 결국 고상돈이 정상에 오르게 됐다. 프랑스 가스 본사는 후일 산소 값 800만 원을 보내왔다.


나는 고산 등반에 담배가 해롭다고 보고 담배와 술을 장비에서 뺐었으나, 담배는 기호품이고 대원들의 기분도 생각해서 부산에서 선적 직전에 그곳 세관에서 프리 오브 택스(free of tax)로 3,000갑을 샀다. 전매청이 재무부 소관이라, 국회 재무위에서 전매청장과 친분이 있었던 덕을 본 셈이다. 한편 술은 대원들이 대장 눈을 피해 적당히 챙겼던 모양인데, 원정이 끝난 후 비로소 알게 되어 모두 웃었다.


대원들이 대장을 어려워해서 가까이 오지 않아 나만 외로웠다. 베이스캠프로 들어서기까지 380km 20여 일을 밤마다 천막에서 혼자 잤다. 원정 기간 중 현지인에게 지불할 돈(지폐)이 큰 가방 두 개였는데, 대원들은 이것을 대장 천막에 보관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며 나한테만 밀어붙였다.

 

▲ 김영도 대장(왼쪽)과 장문삼 등반대장이 수 많은 크레바스와 빙탑이 뒤섞인 아이스폴을 바라보고 있다.

    

- 글·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