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김영도대장 회고기 [2] *-

paxlee 2012. 6. 21. 22:03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김영도대장 회고기

 

나이케가 임금 들고 내빼자 포터들도 뿔뿔이 흩어져


 

원정대는 장기영 회장의 급서로 예비비 1,000만 원도 준비 못 한 채 출국했는데, 네팔을 떠날 때 현지 대사가 원정 성공 후 파티비용을 내놓고 가라고 해서 화를 낸 적이 있다. 위험지대로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대들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니까, 대사는 축하비용을 외무부로부터 받았다고 알려와서 한편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KBS가 지원을 거절하면서 슬그머니 취재기자를 보내서 출국 후 방콕에서 만난 나는 놀랐다. 그 일을 알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나한테 그 특파원을 받아들였다고 항의전화를 했다. 한국일보로서는 원정뉴스를 독점하려던 참이니 화도 날만 했겠지만, 난들 어찌 할 것인가. 헌법에 취재·보도의 자유로 돼 있으니. 이번엔 내가 화가 나서 “그런 문제는 한국일보가 KBS에 항의할 것이지 원정길에 있는 대장에게 무슨 소리냐?”고 대들었다.


KBS 특파원은 남산도 오른 적이 없다고 실토하더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심한 탈홍 증세로 쓰러져 죽는 줄 알았다. 의무대원 말로는 1주일 내 돌아가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고까지 했었다.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제일 고생한 것은 포터들 도망 사건이었다. 그들은 카트만두에서 영국인 마이크 체니가 차출한 것인데 인부들은 나이케라는 일종의 십장을 보스로 하고 있는 조직들로서, 이 십장이 부하들의 돈을 가지고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주인을 잃은 인부들이 도망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짐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주변에서 일손을 그때 그때 구해서 뒤늦게 짐을 날랐다. 원정이 끝나고 카트만두에서 그 영국인을 만나 포터 도망사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더니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신사라는 영국인에게 6·25 때 일선에서 미국 장교들과 살면서 배운 욕을 퍼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등정을 끝내고 베이스캠프에 내려오자, 캐나다 푸모리 원정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포터들이 장비를 훔쳐 달아났다”며, 원정이 끝난 한국대의 장비를 양보해 주었으면 했다. 마침 예비품들이 있어 주었더니, 그 값을 카트만두 영국인에게 받으라고 지불증서를 서명해서 주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마이크 체니여서 증서를 보였더니 자기는 그런 돈 맡은 적이 없다고 했다. 사인으로 통하는 그들 문명사회가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귀국 후 캐나다에 연락해서 그제야 그 문제를 결말지었다.


고상돈의 성공은 박상열의 실패의 덕이 아닐지도 모를 일

 

원정대가 네팔로 출국할 때(1977년 7월 2일), 국회에서 나더러 9월 20일 국회 개원일까지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대원들에게 원정대를 장문삼 대장에게 맡긴다고 했더니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 대장은 지난날, 로체샤르 원정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산악계를 떠나 있다가 최수남이 가고 나서 하는 수 없이 원정대 일을 같이 하자고 부탁해서 결국 뒤늦게 참가한 편이다.


그러나 장 대장은 2차 정찰대에서 미국대를 만나 산소통을 교섭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나는 하여간 이러저러 경험이 많은 장문삼 등반대장을 나 대신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떠났다가 기회를 봐서 국회 말대로 일찍 혼자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1차 공격에서 박상열 공격조가 8,700m 죽음의 지대에서 고립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사회가 온통 에베레스트에 쏠리게 됐다. 사실 우리가 서울을 떠날 때 국내에서는 거의 무관심했었는데, 이 소식에 국회가 놀라, 현지에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격려의 전보를 보내왔다.


▲ 1 1차 공격에 실패 후 8700m 고소에서 비박한 박상열 대원이 펨바 라마 셰르파의 부축을 받으며 캠프로 돌아오고 있다. 2 2차 공격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고 고상돈 대원.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1차 공격조의 박상열 부대장의 실패가 없이 그것으로 등정이 끝났더라면 우리 사회는 에베레스트 원정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거나 그토록 환성을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터지는 가운데도 머리를 쓰게 되는 것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성공적으로 무사히 오르는 일이다. 어느 원정대건 그 생각이 제일 앞서고 가장 중요하겠지만, 사실 대원들 가운데 누구를 공격조로 내세울 것인지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절대로 남과 의논할 수 없어 나는 그 기회만 보고 있었다.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서 행동에 들어가면서 대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무척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 선봉은 언제나 대구 출신 박상열이었다. 그는 지난날 로체샤르 멤버이기도 했지만 평소 말이 없고 조금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셰르파 우두머리 사다인 라크바 텐징에 물어보니, 셰르파들도 대원 중 박상열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나는 어느 날 조대행 의무대원에게 박상열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폐활량이 6,000cc라고 했다. 보통 4,000cc인데, 박은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베테랑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그가 언제나 선봉에 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이스캠프(5,400m)에서 ABC(C2·6,500m)로 올라가 장문삼 대장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박상열을 1차 공격조로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9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역사적인 등정을 기록할 생각을 했다. 나는 박상열에게 새삼 부탁할 이야기도 없고 다만 산소를 취침시에 잘 마시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1차 공격조의 진출은 순조로웠다. 드디어 C4 최종캠프까지 무사히 진출해서 새벽 2시에 깨워줄 테니 일찍 자도록 했다. 우리는 그날 밤 ABC에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새벽 2시가 되자 무전기를 들었다. 그러자 컨디션이 어떤가 묻기도 전에 박은 간밤에 산소를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힘이 들어도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기는 해발 8,500m 고지다. 간밤에 눈이 많이 왔다. 박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고 내리는 시간대는 낮 12시에서 늦어도 오후 2시 사이다. 공격조는 지금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 무전기가 울렸는데 그것은 박이 아니고 같이 간 셰르파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다급히 묻자, “노 악시전( No Oxygen)! 나는 죽는다!” 하고, 이 두 마디에 나는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죽는다!”고 소리 질렀다. 무전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가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8,700m 죽음의 지대를 생각했다. 걸친 방한복 외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오직 죽음의 비박! 그렇다고 구조대가 갈 수도 없다.
이것으로 기대했던 1차 공격은 무(無)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저 고마운 것은 다음날 그들이 살아 내려왔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었다. 동상으로 수족을 절단하는 일도 없었으니까.


나는 장문삼 대장과 2차 공격조를 검토했다. 원래는 고상돈·한정수로 했던 것이 마음이 안 놓여, 셰르파를 동행케 했다. 한 대원에게는 못할 짓을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저 한정수가 원정대를 위해 조용히 물러나주어 그저 고마웠다.


고상돈은 선배의 실패 원인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주의하거나 강조할 것도 없었다. 다만 정상에 중공대(中共隊)가 남긴 철의 삼각대가 있으니 꼭 사진에 넣으라고만 했다.


고상돈의 진출은 순조로웠다. 다행히 날씨도 좋았다. 이제 산소는 여기서 끝이니 이번에 성공 못 하면 우리 원정은 끝이었다. 그 엄연한 사실을 고상돈은 알고도 남았을 것이라 본다. 그는 자기에게 원정대의, 그리고 국민의 눈이 모두 쏠린 것에 힘입고 장도에 올랐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가 정상에 선 것은 9월 15일 12시50분. 그는 두 평도 안 되는 설봉에 삼각대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손발로 눈을 헤쳤다고 한다.


▲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 서울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김영도 대장과 장문삼 등반대장.

 

그리고 그의 첫마디,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에 우리는 ABC에서 순간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눈물이 났다. 그때 한정수가 “우리는 8,849m에 올랐다!”고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인가? 눈이 1m 더 높았다는 괴변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1년 뒤 메스너 등정기에서 확인했다. 고상돈 사진에는 그가 우뚝 선 발밑에 삼각대가 약간 보였으나, 메스너는 1m나 설상에 나온 삼각대 옆에 앉아 있었다.


박상열은 8,000m 고소 사우스콜을 지나 로체 페이스를 내려오며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는 무전이 왔다. 나는 옆에 셰르파를 바꾸라고 하고, 박을 침낭에 넣고 끌고 내려오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날 밤 ABC에서는 모두 울었다. 박상열은 발뒤축이 시커멓게 동상을 입고 있었다. 조대행 의무대원이 식염수 주사를 밤새도록 놓았는데, 나는 그만큼 이야기한 산소를 자며 마시지 않은 박상열의 뚝심에 화가 나서 그의 병상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원정이란 무엇이며, 원정대 운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필경은 인간의 모임의 소산인가? 고상돈은 혼자 올라 원정대의 생명과 명예를 살렸지만, 캠프를 철수하며 외톨이가 되어 나와 장문삼과 셋이서 맨 뒤에서 말없이 천천히 그 먼 길을 내려오고 또 내려갔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고상돈의 성공은 박상열의 실패의 덕인 아닌가 하는 역설이었다.


특수 세계에서 개화하고 결실한 계기돼준 원정

 

인간은 남의 비운에 동정하고, 역경을 이기고 넘어섰을 때 감격한다. 우리의 에베레스트 원정이 이렇다 할 두드러진 기록도 없었는데 당시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전국이 환영일색으로 우리를 맞아준 데는 또 다른 사회적·정치적 분위기가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소위 미국에서 벌어진 박동선 로비 사건이었다. 그 국가적 치부가 빈곤하고 무력한 한국이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는 사실로 상대적으로 상쇄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 에베레스트 원정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정도였는데, 1977년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니까 마침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바로 일본의 경우를 생각했다. 패전에서 겨우 고개를 든 일본이, 마나슬루(8,163m)를 초등했을 때 그들의 수출이 100억 달러였다. 나는 대원정과 국력의 함수관계를 본다.


나는 후기 인생 30여 년을 산악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실은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제대로 모르면서 느닷없이 에베레스트로 비상하게 된 묘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이 세계 최고봉에 이어 북극권 그린란드까지 체험하며 수직과 수평의 세계를 알게 되고 남달리 대자연의 특수성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산보다 책으로 그 특수 세계에 들어가서 비로소 개화하고 결실했으며, 그것도 에베레스트가 계기가 됐다.


        - 글·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