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행 리더는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

paxlee 2012. 6. 22. 23:14

“산행 리더는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8,000m 14좌 등반의 목표를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 했다. 산악인 장봉완(張奉完·60)은 누구보다 이 말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30여 차례의 고산원정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중 20여 차례의 원정은 등반대장 혹은 부대장으로 원정대를 이끈 리더였다. 그는 리더로 원정대를 이끌면서 대원을 잃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20회 넘게 원정대를 이끌면서 대원을 잃은 적이 없다는 건 눈에 띄진 않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다.


그렇다고 그동안 등반이 수월한 산을 찾았던 건 아니다. 1983년 틸리초피크(7,134m)를 동계 등정했으며 1984년 아콩가구아(6,959m)를 올랐다. 1986년 부대장으로 K2(8,611m)를 올랐고 1988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1989년 안나푸르나 원정대장, 1991년 시샤팡마-초오유 등반대장, 1992년 낭가파르바트 등반대장, 1993년 매킨리 원정대장, 1994년 매킨리-헌터 원정대장, 1995년 가셔브룸1봉 원정대장, 1996년 옥주봉(6,178m) 부대장, 2000년 남극 빈슨 매시프 원정대장 등 소위 험봉이라 불리는 어려운 원정대의 리더를 맡아 왔다.


장봉완 대장은 원정에서 리더의 역할로 “모두의 만족도가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등정을 하면 좋겠지만 그보다 대원 간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정을 가면 높은 고도에서 장기간 함께 생활해야 하기에 대원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누가 밥을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 게 얄밉고, 적게 먹으면 그게 얄미운 것이 해외원정이다. 리더는 그런 상황에서 대원들 사이에 완충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원들 성격을 미리 파악해서 이럴 땐 달랠 것인지, 윽박지를 것인지 하는 걸 판단해야 한다.


“같은 산악회 선후배와 가면 위계질서가 있으니 원정이 편하거든요. 근데 저는 전국의 시도연맹에서 선발된 대원들이 연합해서 가는 원정대를 자주 맡았어요. 각 연맹에서 온 사람들이다 보니 성격도 강하고, 개성도 강해서 대장 역할이 쉽지 않았어요. 그럴때 항상 하는 말이 ‘남을 배려하라’는 거죠. 물론 저도 남을 배려하는 건 잘 못하지만 그걸 계속 세뇌시키는 거예요.”


전국시도연맹에서 연합으로 가는 원정대는 위계질서를 잡는 것도 쉽지 않다. 그는 우선 여권을 다 가져오라고 해서 나이순으로 무조건 형아우를 정했다. 이 과정에서 평소 선후배 사이가 뒤바뀌기도 했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것인데 이런 식으로 너무 강하게 몰아붙인 것이 요즘 생각해보면 후회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명의 대원이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원정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정 방법이 없을 때는 짐 싸서 홀로 귀국시킨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리더의 역할로 솔선수범을 꼽는다. 그가 등반대장이나 부대장으로 가면 베이스캠프에만 있지 않고 나서서 등반을 많이 했다. 직접 가봐야 현장 상황 파악이 되고, 그래야 대원들에게 합리적인 지시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산을 오를 때도 위험한 건 선배가 우선적으로 해야 후배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1995년 가셔브룸1봉을 대장으로 갔을 때는 2캠프에 올라 텐트를 쳐놓고 돌아오기도 했다. 고소적응이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도 있는데, 그는 비교적 고소적응이 빨라 등반시간 단축을 위해 홀로 2캠프를 구축하고 내려왔다. 그는 “날씨가 좋을때 하나라도 더 옮겨두면 등반이 빨라진다”고 설명한다.


이때 고비를 맞기도 했는데 눈사태가 어찌나 크게 났는지 봉우리를 하나 넘어 1캠프까지 덮쳤다고 한다. 평소 눈사태 안전지역이었기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으나 6명의 대원이 두 개의 텐트에 나눠 들어가 텐트채로 나뒹굴며 밀렸지만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때 텐트 안에서 구르며 손가락을 다쳐 이후부터는 벽을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정상 올랐다’는 무전 받으면 눈물이 주르르

 

그는 산악계에서 카리스마가 강한 대장으로 통한다. 한 번 원정을 가면 모든 대원들에게 명령에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며 냉철한 결단력으로 대원들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그는 숱한 원정등반에서 대원들이 살아 돌아온 원동력에 대해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라 말한다.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를 잘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등반을 잘하는 최강의 팀이라도 운 때가 안 맞으면 안 되는 겁니다. 산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돌아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등산 자체가 일종의 무리수이기에 과감함이 필요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은 그에게 산이 받아주지 않는 등반이었다. 고정로프를 고생고생해서 다 깔았으나 정작 그 줄을 잡고 다른 팀은 올라가는 데 그의 원정대는 못 갔다. 무전기 5대를 주문했는데 4대밖에 없어 소통에 문제가 있어 캠프 간 고생했다. 4캠프에서 설맹에 걸린 대원을 구조해서 겨우 3캠프에 데려다 놓고 다시 정상을 향해 가니 위에 있던 대원들이 등반 못 하겠다고 내려와서 함께 3캠프로 왔다. 3캠프에선 인계한 인원들이 아직도 하산을 못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장씨의 발은 동상으로 까맣게 변했고 베이스캠프에 와선 다섯 명이 링거 꽂고 눕게 되었다. 이후 낙석을 맞은 대원 한 명이 추가되었고 얼마 안 가 쓰레기를 태우다 함께 넣은 건전지가 폭발해 화상 입은 대원이 생겼다.


정상을 앞에 두고 후퇴를 결정할 때는 대장으로서 정말 힘들다

 

“냉정하게 돌이켜봐서 산과 우리를 파악한 다음, 승산이 없다고 보이면 바로 물러섭니다. 후퇴 명령을 내리면 대원들 중에는 갈 수 있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지만 설득해서 내려오게 합니다. 저라고 속이 안 쓰리겠습니까. 막대한 스폰서 받고 온 거랑 도와준 지인들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니 속이 쓰리죠. 하지만 생사를 건 문제이기에 더 이상의 고민은 없습니다.” 


막상 정상에 올라서면 감격해서 눈물이 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허기와 고통만이 느껴지고 어떻게 안전하게 내려 갈 것인가를 걱정한다고 한다. 반면 대장으로 베이스캠프에서 등정 소식을 무전으로 들을 땐 감격스럽다.


“정상을 직접 올랐을 때는 아무 생각 없지만 ‘정상입니다!’ 무전을 받을 땐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대장을 해본 사람은 다 그런 경험이 있을거예요. 대장에겐 등반보다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의 원정에서 대원이 한 명도 죽지 않았던 데는 철저한 훈련의 힘이 크다. 그는 경험으로 산의 위험을 알기에 이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훈련을 한다. 가령 겨울 한라산 강풍 심한 곳에서 텐트치기, 장갑 끼고 아이젠 끼고 벗기, 12발 아이젠 신고 설악산 비선대에서 대청봉 올라가기 등등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대처하도록 끝없이 훈련을 한다. 또한 모든 원정은 정보를 공유해야 하며 사고가 났을수록 더 공유해서 향후 사고를 예방하는 척도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손가락, 발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이후 등반을 못 할 수 있으니 대원들의 몸관리도 리더가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한다. 돈이 좀 들더라도 카트만두에 체류할 때는 음료수를 먹게 하고 음식을 조심시켜 대원들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한다. 예초에 원정의 자금을 분류할 때 이런 배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원정에서 사고는 없을 수 없지만 운이 좋아서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대장으로 원정을 갔을 때는 거의 등정을 못 했다고 한다. “등정에는 운이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아무리 막강한 팀을 꾸려가도 날씨나 모든 제반여건이 안 되서 등정을 못 하고 등정 가능성이 낮았던 어설픈 팀은 등정하기도 하는 것이 원정이라고 한다.


“원정 가면 100%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고 20%밖에 발휘 못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다녀와서 얘기하면 그 사람은 위축이 되고, 점점 원정 갈 기회가 줄어들게 되요. 그래서 다녀와서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 하는 이야기는 못 하게 하죠. 똑같이 자기 역할을 한 걸로 치죠.”


대장은 대원들의 가족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외아들인지, 결혼 했는지, 자녀가 몇 살인지 하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대원 모두 귀한 자식이지만 위험지역을 통과해야 할 경우 아무래도 외아들이고 자녀가 2~3세이면 확보된 상태에서 뒤에 오도록 명령한다. 대장은 그런 부분까지 신경써야 한다는 것이다. 또 꿈자리가 사나운 대원은 그날 등반에서 빼주기도 한다.


외아들에 어린 자녀 있으면 뒤에서 오라고 해

 

원정을 다녀오면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복기를 한다. 그러나 대원들 의 기량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는 리더는 인기를 좇기보다는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철학이 섰다면 원정대를 그 철학대로 끌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수많은 원정에서 대원들을 다치지 않고 돌아오게 할 수 있었던건 그의 등반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1979년과 1980년 알프스등반과 1983년 틸리초피크 등반이 이후 모든 등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경험이 되었다. 당시 어찌나 고생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지금도 회상한다. 


그는 리더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식량, 장비, 의료, 수송 등 대원들의 직책을 알아야 원정대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대상지가 정해지면 분석을 통해 대상지에 맞도록 모든 걸 대장이 맞춰야 한다. 지구력을 요하는 산이면 그에 맞는 대원을 선발하고, 테크닉을 요하면 그에 맞게 뽑는 것이다. 루트에 따라 어떤 위험이 있는지 하는 변수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대원들이 대장을 믿고 따르게 된다. 이런 과정을 훈련으로 반복해 대원들 간에 신뢰가 쌓이도록 해야 한다.


▲ 1988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장봉완. 당시 부대장이었다.

 

원정대의 리더는 셰르파와 포터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1986년 K2를 갈 때는 셰르파와 포터 수가 300명에 이르기도 했다. 현지인 그룹별로 대원 한 명씩 담당하게 해 분쟁을 줄이고 그래도 문제가 있을 땐 대장이 사다(셰르파의 리더)와 이야기해 해결한다는 것이다.


원정이 잘되려면 무엇보다 서로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 원정등반이며 그런 상황에서 대원들이 고통을 즐기도록 자연스럽게 인식시켜줘야 한다. 그 역시 원정에서 숱한 생사의 갈림길을 건넜다. “살아만 돌아간다면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신에게 기도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부터 그는 원정등반 일선에서 물러나 등산교육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 한국등산학교장을 맡고 있다. 히말라야는 기억 속에 있다. 가끔 “산에서의 지독한 고통과 무서움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산에서는 힘들었던 것도 추억이 된다. 그게 산의 매력”이라고 한다.


리더는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리더는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얘기한다. 대장이 지나치게 등정 욕심을 내면 원정대가 흔들릴 수 있다. 1996년 중국 충모강리-옥주봉을 갔을 때는 입산료만 20만 달러였기에 등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당시 그는 마지막 캠프까지 길을 뚫었고 정상은 대원들을 올려보내 등정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오면 버너·텐트 같은 공용장비가 남는데 다 대원들에게 준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개인 버너와 텐트가 없다. 그에게 장비를 빌리러 왔다가 그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필요할 때 대원들에게 얘기하면 바로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는 “좋은 장비를 보면 욕심 나지만 대장으로서절제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버린 욕심은 나중에 자신에게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회가 넘는 해외원정에서 대원을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장봉완 대장.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장으로 간 원정에서 많은 등정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말하지만, 눈앞에 있는 정상보다 그가 더 중요시 여겼던 것은 대원들과 가족들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한다. “대장을 맡으면 대원이 살아 있다는 게 제일 고맙죠.” 

       
 - 글·신준범 조선일보기자 / 사진·염동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