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숨은 산악인' 홍성택

paxlee 2013. 7. 14. 22:18

 

      '5극지(極地)' 탐험기를 펴낸… '숨은 산악인' 홍성택

 

"가야 할 길"가야 할 길이면 열어 주시고… 제게 두려움 이길 강한 심장을 주소서"
"생존 욕구로 봉지를 물어뜯습니다 凍傷(동상) 걸린 입술딱지서 피가 뚝뚝…
 하얀 설원에 빨간 눈꽃이 핍니다"
"등반 사고로 돌아오지 못해도 슬퍼하거나 애석해 말기를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니"

 

 

무더운 날 '아무도 밟지 않은 땅, 5극지(極地)'라는 책을 읽고는 얼음 구덩이 속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남극점·에베레스트봉·북극점·그린란드·베링해협을 탐험한 산악인 홍성택(47)씨 자신의 얘기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용인대(유도학과) 산악부 출신, 가늘게 찢어진 눈, 힘 좋은 충직함, 말술(斗酒) 등의 이미지로만 내게 남아 있었다.

"지난날 원정을 어떻게 이처럼 생생하게 쓸 수 있었소?"

"원정을 가면 밤마다 텐트 안에서 꼭 일기를 썼습니다. 보관된 일기장이 열댓 권 됐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겪은 제 시련의 추억들을 세상과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조명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스타 산악인인 허영호·엄홍길·박영석 원정대의 대원으로서 이들의 성공에 일조했다. 그렇게 20대 중반부터 '보조 역할'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원정들이 자신의 성공 기록으로 남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설상 내가 등반이나 탐험을 하다가 어떤 사고로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친구나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내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애석해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다시 탐험기에 대한 감동과 의문을 표시했다.

―외모와 다르게 이렇게 섬세할 줄 몰랐소. 극지 원정 때는 피곤해 모든 게 귀찮았을 텐데 일기를 써왔다니.

"남극점 도보 탐험(1994년) 때 허영호형이 매일 기록하는 것을 봤어요. 그걸 보고 배웠습니다. 극한의 추위에는 볼펜도 얼어붙어 연필로 썼습니다."

―허영호 대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1992년 첫 해외 등반으로 중앙아시아의 칸뎅그리봉(7010m)에 갔습니다. 그때 정상에 올랐더니 '무식하게 체력 좋고 등반 잘한다'는 소문이 났어요. 이듬해 허영호형이 에베레스트봉 원정을 꾸리면서 대원으로 참가하라고 제게 연락을 했어요. 영호형은 그때 최고 산악인이었지요. 신이 나서 원정대의 막내로서 뒤치다꺼리 일을 다 했지요. 그 원정에서 영호형이 등정에 성공했어요. 그런 인연으로 1994년 남극 원정에 참가하게 됐던 거죠."


 


―남극 원정에서 식량과 장비를 실은 160㎏ 썰매를 끌면서 "내가 소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끌고 가란 말인가"라고 내심 불평했다면서요.

"그때까지 수직 등반을 해왔지, 극지 탐험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어요. 등반이 3000m 달리기라면 극지 탐험은 마라톤입니다. 등반 준비를 할 때면 살을 빼고 폐활량을 늘리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추위 속에서 계속 걸어야 하는 극지 탐험은 반대로 살을 찌워야 합니다. 이걸 모르고 갔으니 남극에 도착해서는 몹시 겁을 집어먹었어요."

―원정을 떠나기 전에는 고상한 열망으로 불타오르지만 막상 문명 세계와 격리된 상황에 놓이면 머릿속에는 원초적인 생존 욕망, 온통 먹는 생각뿐이라고 했소?

"원정에서 짐 무게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량뿐입니다. 에너지 소모는 많고 먹는 양은 늘 부족합니다. 하루 종일 '한국에 돌아가면 무얼 무얼 먹겠다'를 상상하면서 짐썰매를 끌었어요. 운행하다가 간식을 먹을 때면 장갑을 낀 채 비스킷 봉지를 물어뜯습니다. 동상(凍傷)에 걸린 입술 딱지도 같이 뜯겨 피가 뚝뚝 떨어져요. 하얀 설원 위에 빨간 피가 눈꽃처럼 피어납니다. 형들은 간혹 비스킷 조각을 실수로 떨어뜨리는데, 저는 그것을 봐두었다가 눈 속에서 찾아 먹었어요."

―오래전(2003년) 나는 박영석 대장의 북극 원정에 참여했을 때 그런 경험이 있어요. 운행을 마치고 텐트 안에서 꿀꿀이죽을 끓여 같이 먹으면 숟가락이 바쁘게 왔다갔다해요. 순식간에 코펠 바닥이 보일 때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는 게 인격과 수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는 게…, 다 무너졌어요. 저는 저녁밥을 지을 때 열량을 위해 죽에 넣을 생버터를 형들 몰래 한입에 털어놓고 삼켜버린 적도 있었어요.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 같은 것이었지요."

―극한 상황에 처하면 사소한 일에도 대원들 간에 감정과 원망이 싹트게 되죠.

"불신과 적대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걸 바깥으로 표현하는 순간 원정대는 무너집니다. 자제하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죠. 이런 경험으로 저는 후배들에게 '원정 과정에서는 어떤 고통과 불만도 의문 없이 받아들여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갈망했던 원정도 시간이 가면 '괜히 왔구나' 후회를 하게 된다면서요?

"짐썰매를 끌면서 '여기서 끝냈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겪었고 내가 보여줬다'는 마음도 많이 들었어요. 매일 12시간을 걷다 보니 먹은 음식이 모두 에너지로 소모돼 장 속에 찌꺼기만 쌓였는지. 열흘 이상 변을 못 보기도 했죠. 언 손가락으로 항문을 후벼 팠으니까요. 정상적인 생활로부터 가족과 친구에게서 떨어져 이 고생하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죠."

44일 만에 한국인으로서 처음 남극점에 도달했다. 이 원정으로 허영호 대장은 '3극점(에베레스트봉·남극·북극)' 성공 기록을 세웠다.

"귀국하자 기자들이 비행기까지 올라와서 취재했어요. 그때 제게는 '이는 잠시 지나가는 순간이니 착각하지 말자. 본디 모습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홍성택씨는“극한 상황에 놓이면 머릿속에는 원초적인 생존 욕망, 온통 먹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원정하는 동안 '다시는 이런 짓 안 한다'고 다짐을 하고서 막상 귀국하면 다시 짐을 꾸릴 생각을 하지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겁니다. 고향 어른들은 '언제 철이 들래. 이러려고 대학 다녔느냐'고 했어요. 직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떠나고 싶은 열망이 또 꿈틀거렸어요."

그는 이듬해인 1995년 휴가를 내고 박영석 대장의 에베레스트봉 원정대에 참여했다. 정상 공격을 앞두고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가서는 안 될 길이라면 가지 않게 하시고, 가야 할 길이라면 길을 열어 주시고, 시련과 고통은 감수하겠으니 가혹한 위험은 없게 하소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강력한 심장과 지치지 않는 근육을 주시고, 정확히 판단할 능력을 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상을 밟은 뒤 그는 탈진한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무전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때 다른 원정대의 후배는 조난 직전 상황이었다. 한 셰르파는 추락했다. 나중에 그는 "무전도 받지 않고 의리 없는 놈, 어떻게 너만 살려고 내려왔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구차하게 변명하기 싫었어요. 추락사한 셰르파를 생각하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하산 과정에서 저도 미끄러져 추락했어요. 돌출된 바위에 부딪혀 멈췄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살아온 삶도 후회되지 않았고, 남은 삶에도 미련이 없었어요. 의식을 잃었는데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겁니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바람만 불고 있었어요."

생환한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05년 북극점에 재차 도전하는 박영석 대장의 원정대에 참여했다. 이 원정을 위해 그는 11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저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자신을 얽매고 있는 현실과 손에 쥐고 있는 빵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에게 맞는 일과 사명을 찾아 매진할 때 비로소 행복과 존재 의미, 열정과 보람을 느끼거든요."

북극 원정은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원정으로 남아 있다.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추위와 블리자드, 난빙(얼음 언덕), 리드(얼음 사이 갈라진 틈)가 원정대를 괴롭혔다. 이 원정에서 그는 일곱 번이나 리드에 빠졌다. 두 번은 사신(死神)과 입맞춤한 거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북극 바닷물에 얼굴까지 빨려들고 말았어요.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어도 얼음 두께가 2m나 돼 얼음 위에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한쪽 얼음판이 서서히 움직이며 다가오고 있어 내 몸은 저 엄청난 얼음판 사이에 껴 압사할 것 같았어요. '얼음판에 내장과 심장이 터지는 걸 내 눈으로 뻔히 보면서 숨이 끊어질 것이다. 제기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서 20분 이상 물속에서 돌아다녔어요. 마침내 얇은 얼음판을 찾아서 밖으로 나왔을 때 온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요. 그제야 도착한 대원들이 저를 발견하고 텐트를 치고 버너를 켰습니다."

원정대는 54일 만에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박영석 대장은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남·북극)'의 기록을 달성했다. 경비행기로 철수할 때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서 공수해온 기름기 있는 음식들을 미친 듯이 먹었다. 경비행기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한 대원은 엉덩이 밑에 쇼핑백을 대고 설사를 하는 '기록'을 남겼다.

2007년에는 그는 엄홍길 대장의 로체샤르봉 원정대에 참여했다. 이때 엄홍길은 '히말라야 16좌' 등정 기록을 세웠다.

―산악인으로는 유일하게 허영호·엄홍길·박영석 대장과 원정을 모두 경험했지요. 리더십을 비교하면?

"영호형은 세심하고 전략적입니다. 영석이 형은 카리스마가 있고 후배들을 아껴요. 대장은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고, 대원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뒤로 그도 대장을 맡아 2010년 개썰매로 그린란드를 종단했다. 2012년에는 한국 최초로 베링해협(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있는 대륙 간 해협) 도보 횡단에 성공했다.

"베링해협은 끔찍했습니다. 어둠 속에 블리자드가 불고 얼음판은 태평양을 향해 빠르게 떠내려갔죠. 불과 몇 초 사이에 5m 거리에서 한 대원이 제 눈에서 사라졌어요. 갑자기 제가 서 있는 얼음판도 솟아오르더니 몸은 얼음에 처박히고 다른 얼음 덩어리가 밀려왔어요."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운(運)일까 실력일까요?

"원정을 떠나면 성공할 수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고, 동상(凍傷)으로 신체 일부가 잘릴 수 있고, 아예 못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운인지 실력인지는 모르나 매번 죽음의 지대에서 저는 살아서 돌아왔어요."

그는 '5극지'로 멈출 것 같지 않다. 올가을 '로체봉 남벽(南壁)'을 계획하고 있다.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루트다. 히말라야 14좌를 최초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가 두 번 시도한 적 있다. 세계 두 번째 14좌 완등자인 예지 쿠쿠츠카는 이 로체 남벽에서 추락사했다. 국내에선 여섯 번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욕망은 한계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저는 지금껏 마음속에 오래 꿈꿔왔던 탐험과 등반을 해왔습니다. 이제 로체 남벽만 남았습니다."

―모험의 난이도를 계속 높이면 결국 죽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스키 선수나 카레이서들은 엄청난 빠른 속도로 달립니다. 우리 보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무모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안전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등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면 위험 요소는 많지 않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부인의 견해는?

"아내가 많이 아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고요. 하지만 이번에 아내가 제 책을 보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더군요."


 

[최보식이 만난 사람]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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