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악인 노산(鷺山) 이은상 *-

paxlee 2013. 1. 10. 10:46

 

 

              해오라기 나는 산, 그 그림자를 돌아본다

 

노산(鷺山) 이은상이 서거한지 올해로 30주년이다. 그가 12년 동안 최장수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며 ‘노산시대’를 이끌어 온 일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산악운동을 펼쳐온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도 여러 산악인들에게 회자되는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를 작사한 장본인이 노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않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100자로 제정된 이 선서는 1967년 노산이 한국산악회장 취임 첫해에 제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조시인이자 사학자로서의 노산을 기억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전통이 오래된 한국산악회의 수장으로서의 노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노산하면 연상되는 것은 온 국민이 애창하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바위고개’ ‘사우’ ‘봄 처녀’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으로,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것만을 기억 할 뿐이다. 그의 시가 한국민의 애창가곡으로 작사된 것은 이밖에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노산은 시조시인으로 생전에 약 2000여 수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고유한 전통의 시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 그의 시가 가곡의 가사로 쓰여 우리문화사에 남다른 위치를 가진다.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 남긴 노산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분단의 아픔, 통일염원, 우국지사추모 등 사회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있다. 사학자요 수필가인 그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설악행각’ ‘묘향산기행’ ‘한라산등척기’ ‘해외 산악계 순방기’와 같은 기행문학의 압권이라 할 만한 글들을 남겼다. 이렇듯 국토순례기행문과 이충무공 일대기와 같은 선열의 전기를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노산의 일부작품들은 노산의 산시(山詩)에 매료된 스위스 문필가 쎄화가 불어로 번역을 하고 영국인 뺀느가 ‘천왕봉 찬가(the song of Chun Wang)외 여러 편의 시를 영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인으로서의 노산이 남긴 업적은 필자의 졸견으로 평가하기엔 그 세계가 너무나 깊고 넓다. 그는 일제수난기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한글사랑 때문에 조선어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죄 아닌 죄 값을 치루며 옥고를 겪었다. 그가 옥중생활 중에 들려준 구수한 음담패설은 동료들의 지루한 옥중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한다.
그는 암울한 일제치하와 격변하는 해방정국. 6.25전란. 5.16혁명 등 격동의  시대를 문인으로 살았지만 군사독재정권 협력이 흠이 되기도 했다. 그의 고향 경남마산에서 과거사의 시비가 일어 ‘노산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어찌 한 점 그늘이 없겠는가.


그의 말년은 한국등산계의 발전을 위해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방점을 찍는다. 지난해 필자는 노산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한국산악회의 ‘노산 산악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필자는 그분 재임 중 회지편집위원을 맡아 일한 것이 인연의 끈이 되었다.
그분의 등산관은 요산요수에 바탕을 둔 자연애호가 중심이었다. 시인 묵객들의 자연관을 지닌 그는 산을 사랑하는 자연탐사적인 성격의 등산관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 근대등산의 바탕이 된 알피니즘의 행동양식인 눈과 얼음이 덮인 고봉의 곤란성에 도전하는 서구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 한국근대등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김정태는 그의 자서전<등산50년(登山50年)>에서, 민세 안재홍의<백두산 등척기(白頭山 登陟記)>.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와<조선의 산수(朝鮮의 山水)>. 노산의<묘향산 유기(妙香山 遊記)>와 <설악행각(雪嶽行脚)>. <한라산 등척기(漢拏山 登陟記)> 등은 조선시대의 유산기와 달리 우리의 명산을 구석구석 탐사하는 학술적 구명의 탐사등산기라고 평했다. 산과 관련된 답사기는 등산의 대중보급에 기여를 했으니, 이런 형태의 등산을 한국근대등산을 발아시킨 등산의 선구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알프스 고봉에서 본격적인 등산 활동이 시작되기 전 알피니즘의 여명기에 자연과학자인 아가시, 포브스, 틴들과 같은 학자들이 빙하와 지질연구를 위해 탐사활동을 하며 산에 올랐고, 과학자뿐만 아니라 괴테, 바이런, 워즈워스, 러스킨, 쉘리, 레슬리 스티븐과 같은 문인들이 알프스의 산들을 답사하며 산을 찬미하는 저술을 펴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한다.
몽블랑등정을 제안 근대등산의 계기를 마련했던 소쉬르와 같은 학자도<알프스여행기>를 펴내 사람들의 관심을 산으로 끌어드린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성인 영국의 스티븐은 <유럽의 놀이터(The playground of Europe)>와 같은 명저를 저술하여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고봉으로 몰려오게 한다.

 

한국근대등산의 발아가 된 노산의 산행기들


노산은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척박한 산악문화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산악도서출간에 힘을 기울였다. 1968년 월보 <산>을 창간하여 현재 지령 44년 통권225호를 기록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산악문고> 6권을 문고판으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산악도서가 없던 시절 국내 산악인들의 지적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한국산악문고>는 <노산 산행기(鷺山 山行記)>(이은상·1975년). <별빛과 폭풍설>(가스통 레뷔파·김경호역·1975년). <산악소사전(山岳小事典)>(김원모·1975년>의 발간에 이어, <등산50년(登山 50年)>(김정태·1976년). <8000m의 위와 아래>(헬만 불·이종호역·1976년). <암벽등반기술>(백영웅·1976년).  <산정수정(山情水情)>(이영희·1977년) 등이 나왔다.


그는 1969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등산전문지<등산>(현 월간 산)이 재정난으로 폐간위기를 맞자 그와 친교가 돈독한 사회명사들의 모임인 ‘신우회(信友會)’가 인수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 잡지는 조선일보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69년 2월에 있었다. 해외원정 등반훈련대의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발생한 국내최초의 눈사태 사고다.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는다. 현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도 훈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사람이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를 했지만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된다.
같은 해 노산은 한국산악회의 국제적인 위상과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국제산악연맹(UIAA)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여 회원국이 된다. 국제산악연맹 가입은 눈사태사고로 10명의 대원을 잃은 후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국내활동에 한정되었던 산악회의 시각을 국제무대로 확대해 희생자의 유지를 기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구미(歐美) 선진국가의 대표적인 산악회를 탐방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힌다. 회의 운영과 활동상황, 도서출간 현황 등을 살펴보고 정보를 교류한다. 1973년부터 시작된 각국 산악단체 탐방 행보는 프랑스 산악회(1874년 창립)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국립스키 등산학교, 등산의 국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스웨덴산악회(1923년). 정통성과 폐쇄성을 함께 지닌 채 운영되고 있는 영국 알파인클럽(AC. 1857년 세계 최초로 창립)과 영국등반협회(BMC.1946년), 등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아메리칸 알파인클럽(AAC. 1902년)과 ‘미국의 자연은 미국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외치며 환경보존운동을 펼치는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등을 탐방하여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견문을 넓힌다. 당시 그가 각국에서 교환해온 귀중한 자료와 도서들은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선진등산강국의 등반기술을 습득하기위하여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기 등산선진국 프랑스의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에 회원을 파견하여 체계화된 설빙벽 등반기술을 전수받아 국내에 보급한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재임시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에도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여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이어, 1978년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등반은 한국의 히말라야등반 개척기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성과로 기록된다. 당시 이 등반대의 대장을 맡아 등정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현 산악회장 전병구다. 

 

죽는 날까지 산악문화 위해 노력했던 이은상


한국산악회는 1945년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사회단체로는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 단체로 엄연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35년 동안 임의단체 취급을 받아왔다. 조직의 틀을 다지고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해 1980년 사단법인화한다. 당시 단체의 법인화등록이 어려운 시기에 노산 회장의 끈질긴 집념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그는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수년간 지도자급 산악인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한다.

1982년에는 그가 와병 중에 국고지원금을 받아 파견한 마칼루(8463m)학술원정대의 등정 낭보를 병상에서 전해 듣고 기뻐하다가 4개월 후 영면한다. 노산은 회장재임 12년 동안 등산인구 저변확대와 산악지도자 배출을 위한 등산교육, 해외 선진등반기술 도입, 산악문화 활성화를 위한 산악도서 발간, 산악회의 국제기구 가입, 히말라야 고산원정, 산악회의 법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산은 평생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생애의 후반부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학문의 높이만큼 산의 높이를 쌓아나간 세월은 12년(1967~70, 1973~82년)이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산악회 수장으로 만년설에 쌓아올린 성과는 8463m의 마칼루다. 노산은 30년 전에 갔으나,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 성목(成木)으로 자라고 있다.  ⓜ

 

1969년 2월 설악산 10동지 눈사태 조난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눈 쌓인 설악산을 오르던 노산 이은상. ‘해오라기 나는 산’이라는 그의 호처럼 노산은 평생을 고고한 시조시인으로, 산악인으로 살았다.                 - 월간 mount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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