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안나푸르나 고산병 정복기

paxlee 2013. 5. 10. 13:05

                                      안나푸르나 고산병 정복기

 

▲ 원정대 일행이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로 이동하고 있다. 가운데 솟은 봉우리는 안나푸르나 남봉(7219m).
좋아하는 영어 관용구 중에 ‘now or never’라는 말이 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살다 보면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 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 말을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와 연결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히말라야! 나에겐 히말라야가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젊은 시절부터 죽이 맞는 벗들에게 틈만 나면 “우리 말이야, 죽기 전에 히말라야는 꼭 한번 가 보자”고 떠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라는 사람들 모두 목구멍은 포도청이었고, 민생고에 매여 살다 보니 10년, 20년이 지나도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런 히말라야가 우연처럼 다가왔다. 간절히 소망하면 꿈이 이루어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지난해 12월 ‘절친’인 서울아산병원 신경외과의 전상용 교수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같은 병원 신장내과의 김순배 교수가 고산병과 관련한 임상시험을 위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일행이 40~50명이 되는데 대부분 일면식이 없다는 점, 두 번째는 올 들어 새로운 인생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8~9일 전화기 끄고 나가 있어도 되는지였다. 하지만 모두 기우였다. 면식이 없어 서로 서먹한 것은 출발 한 달 전 설악산 전지훈련을 함께 하면서, 중요한 시기 며칠 자리를 비우는 데 따른 걱정은 마음을 비움으로써 모두 해결했다. now or never. 오직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드디어 지난 2월 22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를 거쳐 우리 일행은 프로펠러 네팔 국내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안나푸르나(네팔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의 빙하가 흘러내려 도달하는 거점 도시이자 전 세계 배낭 여행객들의 집결지인 포카라. 카트만두에서 200㎞ 떨어진 포카라로 가는 동안 오른쪽 창밖으로는 비행기와 비슷한 고도의 히말라야 영봉들이 우리를 반겼다.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설산들. 며칠 후면 그 바로 아래 품속까지 가 볼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이 밀려왔다.
   
   “나마스테!” 통상 “안녕하세요”로 통용되는 네팔 인사다. 원래 뜻은 ‘당신을 존중한다. 나의 영혼과 당신의 영혼은 통한다’라고 했다. 이곳 사람들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인사말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사계절을 경험한다. 복장부터가 그렇다. 여름용 옷을 입고 출발해서, 봄·가을용으로 갈아입고, 최종 베이스캠프 부근부터는 눈·코·입 등 얼굴까지 다 가린 겨울 설산 복장이다. 모든 일정은 6, 7, 8이다. 즉 오전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다. 깊은 계곡 길 왕복 100여㎞를 하루 평균 8시간씩 4일 동안 오르고, 이틀 만에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동행한 전문 가이드 말로는 결코 쉽지 않은 중급 코스란다.
   
   포카라만 해도 해발이 870m이다. 사람 살기 좋다는 강원도 평창(700m)보다 높고 북한산 백운대(836m)보다도 조금 더 높다. 낮에는 여름, 밤과 새벽에는 좀 서늘한 날씨다. 아열대기후이기 때문이다.
   
   트레킹 첫날, 일행은 호텔에서 차량으로 1시간30분 이동해 출발지인 칸데에 도착했다. 1770m. 해발고도로만 따지면 설악산 대청봉(1708m)이다. 농담 삼아, 여기서는 2000m 정도는 산으로 쳐주지 않는단다. 그냥 마을이고 동산(?)이지.
   
   포카라 같은 도시에서 보이는 히말라야 설산들은 그냥 산이 아니다. 분명히 높은 산들이 있고 그 위로 구름과 하늘이 있는데, 그 하늘 위에 하얀 궁전들이 있는 것 같다. 구름 위 하늘의 신전이다. 오랜 세월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당연히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들이 사는 곳, 자신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곳,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계단식 다랑이논·밭이 있는 고산 마을들과 롯지(숙소 및 식당)들을 지나면서 가파른 길들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가끔씩 양떼나 당나귀 같은 가축들이 지나갈 때면 길 안쪽으로 피하며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그렇게 란드렁이란 곳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합판으로 벽을 만든 2인 혹은 다인 1실의 방에서 침낭을 이용해 잠을 잔다. 별도의 난방시설이 없기 때문에 추위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둘째 날부터는 좀 더 고된 산행으로 이어졌다. 란드렁에서 지누단다(1780m)와 촘롱(2170m)을 거쳐 시노아(2340m)까지 가는 코스인데, 종일 비가 내렸다.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었다. 산행을 얘기할 때 종종 “경치를 보는 눈은 천국이요, 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한다. 깊은 계곡, 고산준령 사이로 힐끗 힐끗 보이는 안나푸르나 준봉(峻峰)들은 계속되는 산행에 지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좋은 풍광들은 뿌연 안개와 구름으로 이내 사라져버렸다. 판초와 비옷은 땀을 배출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입고 있는 옷은 안팎으로 흠뻑 젖었다. 문제는 기온. 고도를 높일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두 번째 숙소인 시노아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젖은 옷을 말릴 수도 없었고, 난방도 없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감기는 고산병과 직결되는데,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조건들이었다.
   
   아래쪽에는 비가 내리지만 3500m 이상에서는 눈이 내린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눈사태도 종종 일어난다. 계곡 사이를 가던 중 갑자기 위쪽으로부터 “꽝” 하는 소리를 두어 차례 들었는데, 현지 셰르파족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눈사태가 일어날 때 나는 소리란다.
   
   파란 하늘 아래 설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봉우리를 타고 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구름으로 가려지기 전에 사진을 찍기 위해 급히 배낭을 풀어 사진기를 꺼내면 갑자기 봉우리가 사라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구름에 가려진 것이다. 히말라야는 그렇게 변화무쌍했다. 천국과 지옥이 수시로,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뒤바뀐다는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다.
   
   2505m에 있는 도반까지는 울창한 숲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반을 출발해 해발 3000m 정도에 다다르자 왠지 주변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눈이 쌓인 바위 절벽들이 나타난 것이다. 문득 생명체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엔 독수리 한 마리, 바위틈엔 도마뱀 한 마리가 눈에 띌 뿐이었다. 올려다 보이는 4000m 이상 설산들이 잔뜩 위엄을 지닌 채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마음으로 들리는 경고였다. ‘여기까지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인간들이 올 곳이 못 돼!’
   
   그렇다. 산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해줄 뿐, 인간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달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알 수 없는 경외심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고산병에 대한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때부터 고산병 증세가 살짝 왔던 것 같기도 하다. 본격적인 증상은 다음 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통상 ABC라고 지칭)에서였지만.
   
   당초 내 경우 4000m 정도까지는 고산병 증세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안나푸르나행의 목적이 고산병 예방을 위한 임상시험이었지만, 그 정도 높이에서는 멀쩡할 것이라 자만했었다. 주사를 맞는 시험군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을 추첨을 통해 정할 때도 나는 대조군으로 분류가 됐었다.
   
   3230m 데우랄리까지만 해도 쌩쌩했다. 그러나 3700m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서부터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얼굴이 붓는 것은 기본이다.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필자 홍윤호씨 .
본격적인 고산병 증상은 한마디로 기분을 나쁘게 하는 여러 신체 상황들이다. 머리가 은근히 혹은 멍하게 아프고, 식욕이 떨어지고, 먹으면 토하고 싶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움직임이 무거워지는 증상이다. 심해지면 뇌가 붓고 폐가 붓는다. 대책은 무조건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밤이든 새벽이든, 업히든 뒹굴든,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증상이 약해진다.
   
   사전 교육도 많이 받았다. 3500m 정도 이상에서는 △큰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위 △무언가를 쳐다보기 위해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는 행위 △갑자기 뛰거나 힘을 쓰거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행위 등을 하는 순간, 고산병이 찾아온다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조용조용, 사뿐사뿐, 마치 새색시가 폐백 올리듯 행동하라는 지시였다.
   
   나도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MBC에서 ABC로 가는 눈길에서 페이스를 잃고 난 후 뒷골이 당기고 몸이 축 처지는 고산병 증세가 찾아왔다. 공기 중 산소 농도는 60~70% 정도. 보통이면 한 시간에 갈 거리를 세 시간 동안 걸어야 했다. 대체로 비실거리는 쪽은 나처럼 대조군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많았다. 김순배 교수의 연구 절차에 따라 조치를 받고 온 시험군들은 비교적 쌩쌩해 보였다. 직접 피험자가 되고 히말라야까지 와서 고산병 증상이란 것을 경험하고 나니 김 교수의 연구 결과가 더욱 기대됐다.
   
   고산병 증세만 빼면 풍광은 지상 낙원이었다. MBC를 떠나 아주 느린 걸음으로 ABC에 가까워 올수록 안나푸르나의 준봉들이 하나둘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멀리 포카라에서도 보이는 마차푸차레(6993m)나 안나푸르나 남봉(7219m), 그 옆으로 히운출리(6441m) 정도가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ABC에 이르자 12개 능선들로 이루어진 안나푸르나 팡, 안나푸르나 1봉(8091m), 그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 3봉(7555m), 4봉(7525m), 2봉(7937m), 마차푸차레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마차푸차레는 알프스의 마테호른(4478m), 히말라야의 아마다블람(6856m)과 함께 세계 3대 미봉(美峰)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멀리서 보이는 모양이 영락없는 물고기 꼬리처럼 생겼다 해서 일명 ‘피시 테일(fish tail)’이라고 불린다. 마차푸차레는 특히 현지인들이 신성시하는 산으로, 지금까지 히말라야에서 유일한 ‘등정 불허’의 산이다.
   
   길은 사방이 눈으로 덮여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푹푹 빠지기 일쑤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위에서 내리쬐고 아래로부터 눈에 반사되는 자외선은 마치 돋보기를 들이댄 것처럼 강렬했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눈부신 파란 하늘과 순백의 설원이 이루는 조화는 순수함을 더해 온몸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ABC 분지 초입에는 ‘케른’이라고 불리는 추모 돌탑이 서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1봉 남벽 어딘가에는 지난해 10월 하산 도중 실종된 박영석 등반대장과 강기석·신동민 대원의 시신이 묻혀 있을 것이었다. 마침 갖고 갔던 안동 하회탈 열쇠고리를 추모 돌탑 한쪽에 놓았다. 당초 두 개를 가져갔는데 하나는 셰르파족 팀장 쿤산에게 선물로 주었다. 12년 전 미국에 갈 때 들고갔다가 남은 하회탈 열쇠고리 두 개가 12년 후 한 개는 히말라야 셰르파족에게, 또 하나는 히말라야의 추모 돌탑에 놓이게 되다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제 주인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묘한 인연의 끈을 생각하며 히말라야의 신께 다시 한 번 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일행.

   최고의 장관(壯觀)은 역시 안나푸르나의 일출이었다. 2월 28일, 그동안 말로만 듣고 상상만 해왔던 히말라야 일출을 그날 직접 눈으로 봤다. 이른 아침 설산 주변으로, 태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빛이 온 사방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해가 올라오면서 동쪽 봉우리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하얀 봉우리 위에 불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서쪽 봉우리로 하나씩 뻗어나갔다. 점등식이다.
   
   히말라야의 일출은 그렇게 화려한 점등식으로 시작된다. 처음엔 노란 백열등처럼 불이 붙은 봉우리들이 어느 순간 붉은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온통 흰 옷으로 갈아입었다.
   
   되돌아오는 길 50여㎞는 이틀 만에 주파했다. 올라갈 때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내려올 때는 보였다. 생각과 상념도 마찬가지였다.
   
   오를 때는 앞길을 모른 채 체력을 조절해가면서 한 발 한 발 전진해 나갈 뿐이었다.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고 경치를 즐길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고산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의지만 강했다. 해발고도 2500m쯤까지 내려오니 비로소 생명의 소리들이 들렸다. 울창한 숲이 나타나고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나비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 네팔 국화인 붉은 장밋빛 랄리구라스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신이 허락한 이곳까지만 생명체가 살라 하고, 더 이상은 오지 말라 했는데, 인간은 왜 자꾸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할까.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도전하고 정복하는 것이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이라지만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도전과 모험, 무모함과 교만에 대해 만감이 교차했다.
   
   올라가는 처음 이틀은 저녁에 술도 한잔씩 했다. 춥고 불편했지만 손발도 씻을 수 있었다. 하지만 2500m가 넘는 도반 정도부터는 어림없는 얘기였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샤워, 머리 감기는 금물이었다. 태양열 온수도 있어 돈만 내면 샤워도 가능했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체온을 빼앗겨 고산병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십상이다. 머리는 다시 내려올 때까지 감지 말아야 하고, 손발은 물휴지로 닦는 수밖에 없었다.
   
   요리는 웬만한 한국 식당보다 맛있었다. 주방장은 한국에서 직접 요리를 배워왔단다. 김치찌개, 된장, 깻잎, 김은 물론이고 닭백숙이나 염소고기도 특식으로 나왔다.
   
   귀국 직후 고교 동창회에 갔더니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치다. 어서 빨리 히말라야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닦달이었다. 마침 앞쪽에 앉은 동창생도 히말라야를 갔다 왔다 하길래, “몇 차례, 어디를 갔다 왔냐”고 물었다. “8000m 이상 정상만 3차례 등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세상엔 고수가 널렸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숨어있는 실력자들이 많다. 히말라야에서 떠올렸던 겸손이란 단어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글 / 홍윤오 현대그룹 홍보실 상무·전 한국일보 기자  / 주간조선 225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