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그들의 죽음은 운명인가, 확률인가 *-

paxlee 2013. 1. 12. 13:18

 

그들의 죽음은 운명인가, 확률인가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북벽 6개를 꼽는다면 아이거, 마터호른(Matterhorn·4477m),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4208m), 드류(Dru·3754m),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2998m), 피츠 바딜레(Piz Badile·3308m) 북벽을 들수 있다. 이 여섯 중 가장 악명 높은 벽이 아이거 북벽(Eiger Nord Want)이다.


아이거(3970m)는 그 이름이 도깨비를 뜻하는 ‘오우거(Ogre)’에서왔다. 알프스의 미봉(美峰) 마터호른과는 달리 오지에 있지도 않고 관광지 가까이에 위치해있으며, 묀히(Monch·4107m)나 융프라우(Jungfrau·4158m)와 같이 우아하거나 고귀한 자태와는 거리가 먼 도깨비 같이 못생긴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거는 그 모양이 볼품없고 4000m가 채 안 되는 산이지만 움푹 파인 지형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 어둡고 침침하며,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공포감마저 자아낸다.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의 푸른 초원 위로 무려 1800m나 솟아 있는 노르드 반트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정도로 위협적이지만, 이점이 산악인을 북벽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낙석과 낙빙, 신설이 내린 뒤 쏟아지는 눈사태와 눈 녹은 물이 폭포처럼 흐르고, 예측불허의 벼락과 폭풍우, 추위 등이 등반의 변수로 작용한다. 등반가들은 이런 갖가지 위험요소를 극복해야 정상을 얻을 수 있다.  아이거 북벽은 1935년 막스 세들마이어와 칼 메링거가 첫 희생자가 되면서 비극의 서막이 열린다. 이후 수많은 등반가가 희생되면서 아이거 살인 벽(Mord Want) 또는 아이거 공동묘지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생겨났고, 숱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평균연령 58세였던 대원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최난의 거벽을 올랐다. 특히 허욱은 아이거북벽 한국초등 33년만에 재등에 성공했다.

 

첫 희생자인 칼 메링거의 시체는 27년 뒤 완전히 건조된 채로 발견된다. 그 후 사람들은 그가 최후를 맞은 현장을 ‘죽음의 비박지’로 명명한다. 아이거는 1938년 초 등반이후 7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등반가들의 영광과 비극이 점철된 무대가 된다. 아이거의 비극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은 1936년에 있었던 토니 쿠르츠의 죽음이다. 쿠르츠가 추락하여 자일에 매어달린 지점은 구조대와 장대 하나 만큼인 5m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쿠르츠는 탈출을 위해 하강하던 중 자일의 매듭에 하강용 카라비너가 끼어 멈춘 상태에서 더 내려가지 못한 채 구조대의 피켈이 쿠르츠의 아이젠 발톱을 겨우 건드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탈진하여 사망했다.

 

결국 5m라는 짧은 거리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운명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시체는 구조대가 긴 막대에 칼을 묶어 자일을 끊어 북벽 밑으로 떨어트려 회수한다. 추락자의 시체가 2년 동안 북벽의 로프에 매어달린 채 방치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볼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1957년 북벽 하얀 거미의 좌측 상단부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마지막 등반자인 롱히가 오버행 밑으로 추락한다. 그는 두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생의 마지막 밤을 자일에 매달린 채 고통과 추위, 굶주림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 후 2년동안 롱히의 시체는 처음자리에서 미끄러진 채 5m 아래의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2년 후인 1959년에 회수된다.


아이거 북벽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 중 가장 미스터리 했던 사건은 북벽에서 디렛티시마(direttissima climbing)의 첫 막을 연 1966년 3월에 일어났다. 아이거 북벽에서 직등루트를 시도하던 영미합동대와 독일등반대가 등반을 하던 중이었다. 독일의 로젠조프가 막 ‘거미’로 올라가려 할 때 누군가 옆을 스치며 떨어졌다. 이때 아이거 기슭에 위치한 관광지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서 망원경으로 아이거 북벽을 지켜보던 영국 기자 피터 질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란다. 아이거 북벽 중앙 필라에서 빨간 물체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다.


 

잠시 후 북벽 밑 고정자일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구조대가 접근해 확인한 결과 그것은 존 할린의 시체였다. 존 할린은 아이거에서 직등루트를 시도하다 고정로프가 끓어지며 1000여 미터를 추락한 것이다. 이날 5명이 같은 로프를 사용하면서 올라갔다. 다섯 번째 등반자 존 할린이 같은 로프에 주마를 써서 하얀 거미를 향해 오르던 중 로프가 예리한 바위 모서리에 쓸려 끊어지면서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로프를 사용한 네 명은  무사했고 뒤에 오른 한사람은 로프가 끊어져 목숨을 잃은 것이다. 

 
금년 8월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한국대 두 팀이 북벽을 오르면서도 희비가 엇갈리는 일이 일어났다. 1979년 한국인 최초로 윤대표와 함께 아이거를 오른 허욱(60). 한국산악계에 허욱이라는 본명 보다 ‘까욱’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그는 시퍼런 나이 스물일곱에 이 벽을 오른 후 33년 만에 북벽 재등에 성공했다. 이들은 등반 중에 신들의 트래버스에서 최고령 대원 유 동진(65·코오롱 등산학교 동문)이 낙석에 맞아 10미터를 추락하면서 부상을 당해 등반속도가 늦어졌고, 2박 3일 동안 비좁은 비박사이트에서 폭포와 같은 물벼락을 맞으며 온밤을 추위에 떨며 선채로 비박을 했다. 식량마저 떨어져 굶주린 상태에서 투혼을 발휘해 정상에 섰고 무사히 귀환했다.

 

아이거 북벽에서 생명의 줄을 함께 묶었던 이 팀은 네 사람 모두 북벽을 오르기엔 노장에 속하는 실버들이었다. 암으로 대장을 절제하고 2년이 안된 채 장애를 딛고 우뚝 선 허욱, 지병인 당뇨병을 달고 사는 최고령자 유동진. 두달 전 암벽에서 추락, 복숭아 뼈골절로 발목에 쇠못 3개를 박은 채 통증에 시달리며 북벽에 매어달린 한필석(55·월간 산 부장)과 막내 김명식(53). 이 팀은 평균연령 58세의 실버등반대이자, 장애자 등반대였다.

 

정상에서 협찬 깃발을 꺼내 든 진명식씨. 그는 출발부터 등정까지 모두 선등을 맡았다.

 

젊고 시퍼런 청춘들이 할거하는 아이거 북벽에서 이들의 열정은 장애와 연령을 극복한 인간승리였다. 건강한 정상인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을 그들은 열정 하나를 무기삼아 험난한 벽에 도전했고 오르는데 성공했다. 실버들의 투혼에 기립 박수라도 보내야 할 것이다. 다른 한 팀인 ‘2012 알프스원정대’는 정상등정 후 서릉으로 하강 중 공업용 볼트가 빠지면서 700m를 추락, 사망했다. 이들은 두 명의 대원이 먼저 하강했고 하강을 완료했을 무렵 하강지점에서 확보를 하고 있던 정진현(45·열린캠프)이 갑자기 추락했다. 그들이 사용한 볼트는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앞서 이 벽을 오른 허욱 팀 4명이 사용했던 볼트였다. 그 볼트가 빠지기 전에는 이미 6명이 이 볼트를 사용하고 난 후였다.
 

동일한 장소에서 몇 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장비를 사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은 로프가 끊어져 죽고, 어떤 사람은 볼트가 빠져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남는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존 할린과 정진현의 죽음은 러시안 룰렛게임 같은 확률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이거 북벽. 어쩌면 그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더 매혹적인 곳인지 모른다. 저자에게 선물 받은 <영광의 북벽>을 읽고 아이거의 꿈을 키워왔던 정진현을 산으로 유도했던 사람은 직장 선배이기도 했던 정광식(외국어대OB)이다. 그는 1982년 이 죽음의 벽을 남선우(월간 마운틴 대표·중앙대OB), 김정원(한양대OB)과 함께 올랐고, 이벽과 맞섰던 극한의 체험을 <영광의 북벽>이라는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었기에 아이거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출발 전 정진현의 아이거 등반을 강하게 만류했다.


정광식의 아이거 등반기는 마땅히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 한국산악계의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전해준 책이다. 1983년 <영광과 죽음의 벽 아이거>(한국대학산악연맹)라는 제호로 보고서를 냈고, 1989년 <영광의 북벽>(수문출판사)이란 제호를 달고 유가지로서 첫 선을 보인 후 2003년 <아이거 북벽>(경당)으로 재간행됐고, 2011년 이산미디어에서 <영광의 북벽>으로 복간본을 펴낸다. 한권의 산서가 네 번씩이나 복간을 한 일은 한국산서 출판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이 책은 아이거를 오르려는 산악인들에게 지침서이자 필독서였다.

 

아이거 북벽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영광의 북벽’이, 실패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북벽’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등반의 어려움은 죽음으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북벽의 신화들을 극복해야 자유롭게 그곳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는 등반가들 내면의 평정을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북벽은 수많은 등반가들에게 정복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책을 통해 아이거를 간접 경험한 산악인들에게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 아이스호스, 죽음의 비박, 신들의 트래버스, 하얀 거미와 같은 북벽의 지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독일의 한 등산잡지가 세계의 저명 산악인들에게 질문서를 보내 지구상에서 아름다운 산이 어디인가 물었다. 아이거라는 이름은 눈을 씻고 보아도 거론되지 않았다. 알파마요(Alpamayo·5943m), K2(8610m), 마터호른, 피츠로이(Fitz Roy·3441m), 몽블랑(Mont Blanc·4810m). 그랑드 조라스, 시니올츄(Siniolchu·6891m) 순으로 많이 거론된 산은 이것뿐이다. 그럼에도 가장 많은 화제를 뿌린 산은 어김없이 아이거 북벽이 거론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아이거 북벽은 다른 어떤 산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아이거 북벽은 등산가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절대적인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아이거 북벽 등반에 성공한 사람들 조차도 아이거는 다시 오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한 때 알프스 6대 북벽을 주름 잡던 ‘알프스의 별’ 레뷔파는 1952년 아이거 8등에 성공하면서 가장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혐오스런 곳이 아이거 북벽이라고 했다.


적어도 아이거를 오르려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 없이는 아이거의 꿈을 이룰 수 없다. 정광식 또한 아이거 북벽에 출사표를 내면서 어쩌면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비해 책상까지 깨끗이 정돈하고서 북벽을 향해 떠났다. 그도 ‘무서운 계획이란 걸 알면서 성공의 가능성이 희박할수록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클라이머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아이거 북벽을 택하며,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그들이 선택한 문제일 뿐이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 한다”고 한 머메리의 말처럼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산이 지닌 위험성을 예견하면서 산으로 향한다.  ⓜ

 

                         아이거 북벽 정상에 선 한필석, 유동진, 허욱

 

         - 글 이용대 _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 사진 한필석 _ 월간 <산>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