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헌인릉(獻仁陵)

paxlee 2015. 3. 12. 09:53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헌인릉(獻仁陵)

 

헌인릉은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에 있다.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 1367~1422)과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의 능이며, 인릉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능이다. 조선왕릉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헌인릉의 경우 즉위 시기가 4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두 왕의 왕릉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헌릉(獻陵)

 

헌릉(獻陵),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쌍릉

 

 

태종은 태조(太祖, 1335∼1408)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아버지를 도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냉혹한 왕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雙陵)으로 규모가 크다. 다른 조선왕릉과 비교했을 때 석물(石物)의 수도 두 배 더 많다. 무덤 주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방위를 나타내는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 혼유석의 받침돌이 5개인 점, 지방(紙榜, 제사를 모시는 분을 상징하는 종이)을 불사르는 시설인 소전대(燒錢臺) 등은 조선 초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세종(世宗, 1397~1450)이 세운 것이고, 하나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글씨가 마모되자 숙종(肅宗, 1661~1720)이 다시 세운 것이다.

 

 

홍살문과 헌릉

 

헌릉의 비각과 정자각

 

헌릉의 정자각

 

헌릉입구의 울창한 숲 길

 

 

혼유석이 하나뿐인 인릉(仁陵)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合葬陵, 부부를 함께 묻은 능)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증조할머니가 왕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하고, 이후에는 장인의 안동 김씨 집안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순조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힘 없는 왕이었다. 능 앞에 놓인 네모난 돌을 혼유석(魂遊石)이라 한다. 혼령이 쉬는 곳이므로 합장릉이라도 왕과 왕비의 것이 따로 있기 마련인데 인릉에는 하나 밖에 없다. 순조는 죽어서도 영혼이 쉴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 셈이다.

 

인릉(仁陵)과 홍살문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

 

인릉의 비각

 

인릉을 오르는 계단 길가 소나무 숲

 

인릉(仁陵),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合葬陵)

 

인릉(仁陵),

 

헌릉과 인릉 뒤편으로 걷기 좋은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 왕릉에는 소나무를 비롯해 나무를 잘 가꾸어 놓았다. 특히 입구에 있는 오리나무숲은 서울시가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해 특별관리하고 있다. 오리나무는 옛날에 도로의 오리(五里)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헌인릉으로 가는 길 좌측에 입구에서 100m정도 떨어진 주차장 맞은편에 재실(齋室. 능을 관리하기 위한 건물)이 있다.

 

 

헌릉, 인릉 봉향회(奉香會)

 

헌릉, 인릉, 재실(齋室)

 

 

헌릉(獻陵)의 주인 태종은 조선을 건국한 이태조의 다섯번째 아들로 일등공신 이면서도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이복 동생인 방석에게 세자자리를 빼앗기고 숨을 죽이고 있다가 결국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장악한 군주이다. 세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왕이 몇 분이 있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렇고, 연산군을 밀어내고 오른 중종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오른 인조와 철종 등이 그렇다. 중국의 고대사를 살펴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왕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은 아버지와 형제를 죽이면서 까지 왕에 오른 임금은 수 없이 많다.

 

 

태종의 헌릉은 대모산 넘어 내곡동과 세곡동 사이의 산 기슭에 있어 지금은 서울 강남구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외진곳이라 일반인들은 잘 다니지 않는 지역이다. 양제역에서 성남으로 이어지는 길이 연결된다. 조선의 왕릉은 어디를 가 봐도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져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진 임금은 태종이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가 아니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백성의 신뢰와 믿음을 얻기위해 국정과 국방을 튼튼히 할 수 밖에 없어 조선의 정치적 안정을 확립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중국의 당 태종도 당나라를 건국하면서 아버지 고조를 도와 당나라를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둘째라는 서열 때문에 형이 세자가 되었다. 당 태종 이세민도 현무문의 변으로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임금에 오른 것을 보면서,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당 나라 태종 이세민을 많이 비교하여 보게 된다. 그 둘은 공통점이 닮은데가 너무 많다. 당 태종도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정통성 때문에 치적에 열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까지 같다. 그래서 당 태종은 정관의 치라는 선정을 배풀었다. 태종 이세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역사가 오긍이 저술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전 10권, 40편으로 된 정치백서는 오늘날에도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읽히고 있다.

 

 

천하의 조선의 태종도 태자 양영대군의 행실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걸어온 전철을 밟지 않고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지만, 세자의 타고난 성격 때문에 결국 세자를 박탈하고 셋째인 충녕이 세자에 올라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종도 세자가 아니었다가 어부지리로 세자가 되어 왕위에 오른 그 명분 때문에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국정을 논하는 그의 열정이 우리의 글 한글을 창제하게 하였고, 북쪽의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대마도까지 정벌하는 업적을 쌓았고, 다 방면의 과학이 발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태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충녕대군을 왕위에 올려 세종으로 대를 이은 결정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