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백수의 일상 - 191. <산촌에서 서울가는 길>

paxlee 2021. 6. 1. 06:46

산촌에서 서울가는 길!

 

꽃양비가 예쁘게 피어있다.

 

깊은 산촌이라 아직 작약꽃이 피어있다.

 

위에 으아리꽃과 아래 꽃이 진후에 달린 수술이 대조적이다.

 

산촌의 산 능선은 생동감으로 말한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위에는 동물의 왕래를 위해 비조령 터널이 있다.

 

산촌의 소나무 숲길, 소나무 숲 아래는 백문동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문장대입구 표지판!

 

도창의 대장 이강년 선생 묘소 입구 안내 표지석.

 

나무와 숲과 하늘이 전부다.

 

묘소를 오르는 계단 길!

 

묘소가 잘 갖추어져 있다.

 

도체찰사 이강년선생 묘소(都體察使 李康年先生 墓所)

이강년선생은 효령대군 18세손으로 철종 1959년에 탄생하시어 무과에 올랐으나, 국정이 물란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894년동학혁명군을 지휘하여 탐관오리를 무력화 하였다.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1905년 갑오년 일본과 을사조역이 체결되자 군사를 모집하여 영춘과 단양의 왜적을 격파하니 백남

규, 감상태,, 하한서, 윤기영, 신석돌 등이 합류하여 정미팔월에 관군이 해산되었는데, 그 무리를 양주

에 모아 선생과 민긍호, 허위, 박정무, 권중휘, 방인헌, 전봉준등을 각 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서울의 일제 통감부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선생은 강원도 일대의 왜적을 토벌하다가

1908년 7월2일 제천 청풍 금수산 기슭에서 적의 총탄에 발목 부상을 입고 체포 되었다가 10월 13일

50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왜놈들이 선생의 처형으로 인하여 후사에 봉기가 두려워 비밀로서 시신을 충북 제천 모 지역에 유기

하였다. 1944년 상주 화북 출신인 부하 이원재, 이성범 등이 유기된 시신을 거두어 죽음을 각오하고

여러날 동안 낮에 숨고 밤으로 이동하여 이곳 상주 화북에 안장하였다. 이듬해 8.15 광복이 되었다.

1962년국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1970년 석물(碑)은 대통령 하사로 세웠다.

관리는 이곳 화북 명륜회가 맡고 있으며 매년 3.1절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친구가 이곳을 지날때쯤 조금 피로하다며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하여

친구는 눈을 붙이고, 이곳을 지날때마다 궁금하던 곳을 참배하는 시간을 가졌다.)

 

묘소 옆에도 질레꽃이 피어 고유의 향기을 진하게 전하고 있다.

 

숲길이 정감이 있어 걸어 올라갔드니, 창고같은 건물이 하나있다.

 

이곳을 다녀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지방도 옆에도 멋있는 건물의 휴게소가 있다.

 

중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 표지판이다.

 

쌍곡계곡으로 갈수있는 갈림길이다.

 

산촌가는 길옆에 '여름'이라는 커피집이 있어 가끔 들려가는 곳이다.

 

중부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교차지점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터널을 지나야 한다.

 

남안성 IC에서 용인쪽으로 내려서 다시 국도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