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기는 글쓰기』
"죽어서 육신이 썩자마자 사람들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든지,
글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라."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저자 : 매슈 배틀스(Matthew Battles)는 글쓰기와 도서관에 관해 쓰는 작가이자 예술가.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를 비롯한 여섯 권의 책을 썼다. 하버드대학교 버크먼인터넷과사회센터의 실
험적 강의.연구실인 메타랩을 이끌고 있다.
‘글’이 사라져가는 시대, 글쓰기와 인간 지성의 관계를 묻다
글은 지배적인 정보전달 매체라는 지위에서 급격히 밀려나고 있는 듯 보인다. 10대는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뒤적이는 대신 유튜브 검색창에 타이핑한다. 많은 이들이 일찍부터 스마트폰에 노출된
아이들의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며 우려한다. 책과 독서가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지, 또는
꼭 존재해야 하는지를 두고 끊임없이 논의가 오가고 있다.
이처럼 글이 위기에 처했다면, 글쓰기라는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될까? 디지털 시대에 글쓰기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에게 앞으로도 글쓰기가 필요할까? 하버드대학교 메타랩을 이끌
고 있는 작가이자 연구자 매슈 배틀스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쓰기가 지나온 오래된 진화의
여정 속으로 뛰어든다. 글쓰기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작용을 해왔으며 인류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막연한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배틀스는 글쓰기의 진화를 들여다보기 위해 ‘팰림프세스트’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팰림프세스트는
고대에 이루어진 양피지의 재활용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원본 글이 삭제되거나 일부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글을 적어 넣은 표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글쓰기는 이 팰림프세스트
처럼 언제나 이전의 흔적을 남기면서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류의 법, 종교, 역사에도
글쓰기의 흔적들이 새겨졌다. 배틀스는 한자가 서양 시학에 미친 영향, 필사 행위가 만들어낸 공동
체 의식, 인쇄술의 발전이 독서하는 뇌에 가져온 변화 등의 다양한 사례를 가로지르며 글쓰기가 이
후의 글쓰기에, 또 인간 지성과 문명에 남겨온 흔적들을 살펴본다.
중학생 시절에 벌써 컴퓨터라는 것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느 겨울 학기가 되자 비어 있
던 교실에 베이지색 애플 II 컴퓨터 한 무더기가 자리를 잡았다. 반짝이는 작은 사각형 커서에서 이
상야릇한 초록색 글자가 쏟아져 나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 글자들은 무언가를 할 수 있
는 글자, 만들어낼 수 있는 글자였다. 모니터 위의 글자들은 페이지 위의 글자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
으로 자신들의 힘과 기능을 취사선택하는 것 같았다. 이 글자들은 상징도 하인도 아니었고, 스크린
이라는 공간을 메우고 전기와 블랙박스에 담긴 시스템의 본질을 향해 자기 몫의 삶을 요구하는 동료
들 같았다.(p11)
우리가 하는 글쓰기에서-적어도 내가 매일 하는 글쓰기에서-글쓰기의 양식과 재료는 서로 겹쳐지고
뒤섞인 채로 중첩되어 있다. 내 손가락에는 아직도 연필을 너무 세게 쥐어서 생긴 굳은살이 솟아나
있고, 맥북 에어의 자판을 부드럽게 두드릴 때도 무의식중에 타자기의 탁탁거리는 노랫소리가 떠오
른다. 감각과 방식의 질감은 마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 한꺼번에 다가온다. 그러나 고대의
경제를 향한 실용적인 찬사가 ‘팰림프세스트’가 가지는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확장된 용례’에 따르면 팰림프세스트는 “특히 예전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재사용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면과 엇비슷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p12~13)
인간은 다양한 시공간에서 글쓰기 기술을 새로운 형태적 발전 없이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보수적인 문화는 말하자면 펜을 가까이 두고 문자를 예술, 종교, 일상생활에 대한
제한적인 침투로만 허용했다. 그러나 글쓰기는 문화 갈등이 일어나거나 종교가 만개하는 시기 또는
경제적 변화가 생산적으로 요동치는 가운데 개방된 경계, 즉 점이지대를 찾아 새로운 형태와 종을 헤
치며 활로를 찾는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면 오래된 형태는 변형되고 적응해 새로운 틈새를
메운다. 영어의 필사본(manuscript)이라는 단어는 인쇄술의 영향력이 대중의 삶 속에 속속들이 배어든
뒤에야 생겨났다.(p33)
우리가 현대 컴퓨터 기술의 편재성을 글쓰기에 대한 방해나 반란이 아닌 갱신이자 부활로 보고, 무엇
보다도 글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새로운 버전으로 볼 때 정보 기술에 대한 신선하
고 새로운 이해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p242)
어쩌면 페이스북이 핵심을 찌른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아를 글로 쓰는 것에 대해선 책보다 담벼락
이 더 적합한 은유일 테니까. 전자 텍스트를 책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는 대신 우리는
벽과 로켓과 인방을 찾는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는 블로그와 피드(feed), 모바일 디바이스, 그리고 어
디에나 존재하는 터치스크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p281)
글이 쓰이는 표면은 변화했지만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성격을 정하는 것은 우리 독자, 사상
가, 작가 모두가 맺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학교의 위계가 있고 서예가와 학생 사이에 지
도 관계가 있고 작가와 발행인 사이에 간결한 계약이 있었듯, 이제 이 관계들은 코드가 되고 소프트
웨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글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우리가 맺는
관계다. (p331)
문자의 탄생에서 골든 레코드까지 종횡무진 누비는 사색적이고도 시적인 지적 모험이 글로 표현된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책이지만,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는 단순히 글쓰기의 역사만을 시간 순으로 서
술한 책이 아니다. 『서재 결혼시키기』의 저자 앤 패디먼은 이 책을 두고 “백과사전식 연대기가 아닌,
수 세기를 우아하게 가로지르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는 자리마다 머무는 에세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은 글쓰기가 지나온 수천 년의 생애로부터 길어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들로 가득하다.
배틀스는 통시적 접근을 하는 대신 다양한 측면에서 글쓰기의 본질과 역할을 조명한다. 먼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문자의 탄생이다. 문자의 발전에 대한 재치 있는 접근, 신화 속에서 문자의 탄생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고대 인류의 놀이와 문자의 상관관계 등을 넘나들면서 “변하는 것, 스스로를 부수고
다시 만드는 것”이 왜 글쓰기의 타고난 속성인지 밝힌다. 다음으로 다루는 것은 사물과 글쓰기가 갖는
관계다. 이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문자는 한자다. 한자가 지닌 그림문자이자 표의문자로서의 속성을
뜯어보고, 또 19세기 한자를 접한 서구 사상가들이 한자에 대해 어떤 환상과 이념을 투여했는지를 살펴
보면서 인간의 인지, 추상 능력과 글쓰기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또 하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 글쓰기의 ‘교권’이다. 원래는 신학적 주제에 있어 교회의 가르침이
가지는 권위를 일컫는 이 단어를 배틀스는 “인간의 경험에 글쓰기가 미치는 영향”이라고 정의한다.
배틀스는이를 글쓰기가 권력의 통로로 기능해온 사례들, 예를 들어 제국의 통치에서 글쓰기의 쓰임과
관련 지어 살펴본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혁신을 통해서 글쓰기가 오직 권력의 도구이기만 하
지는 않았고, 쓰기를 통한 해방(젠더화된 교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도 밝힌다.
이야기는 글쓰기의 교권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인 성서로 이어진다. 원본이 불확실하고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번 베껴 쓰이면서 모습을 갖춰온 성서, 그리고 필사라는 문화를 통해 배틀스는 베껴
쓰는 행위의 의미를 조명한다. 베끼고 주석을 달고 논평하면서 생각을 공유하는 사회적 연결망이 탄생
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닿는 곳은 기술 발전과 글쓰기의 관계다. 배틀스는 인쇄술의 탄생으로부터 모스 부호를 지
나,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매리언 울프와 같은 연구자들이 우려한, 디지털화가 읽
기에 미친 영향까지 아우른다. 기술과 매체의 개입으로 글쓰기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핌으로써
읽기와 쓰기의 영역이 디지털화로 인해 축소되지 않았음을, 오히려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마리
를 제시한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야기는 보이저호에 담긴 골든 레코드, 그리고 1만 년 이상 먼
미래에 핵폐기물 저장소를 발견할 이에게 보낼 경고 메시지다. 배틀스는 두 사례를 통해서 인류 문명
(즉 글쓰기)이 지구에 저지른 일들을 과연 글쓰기가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배틀스는 이처럼 여러 대륙과 수 세기에 걸친 무수한 이야기들을 길어내고 또 그것들을 유연하게 연결
짓는 흥미진진한 지적 모험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럼으로써 글쓰기가 지닌 다층적인 의미를 자연스
럽게 이해하고 음미하도록 해준다. 글쓰기와 글 읽기를 아끼고 사랑해온 이라면 누구라도 즐겁게 동행
할 수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쐐기문자에 그 독특한 양식을 부여한 진흙과 점토라는 재료들은 쐐기문자의 쇠퇴 이후로는 글 쓰는 사
람들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메소포타미아의 필경사들이 가졌을, 우리에겐 낯선
감각중추를 분명히 아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공기 중에 진하게 풍기는 흙냄새, 손가락이며 옷에 묻어
마르고 갈라져가는 액화된 점토인 흙물, 필사를 하는 사이사이에 완성되지 않은 글을 싸두던 축축한
리넨의 거칠고 달라붙는 감촉이 애착을 불러오기도 하였다.(p83)
페놀로사 그리고 파운드는 시의 매체로서 한자가 가지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두 글자를 결합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직유, 제유, 심지어 압축된 내러티브를 통해 작동하는 형성자가 존재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마도 파운드가 가장 좋아한 예는 인간을 뜻하는 인(人)이다. 人이 다른 글자
와 합쳐 또다른 글자로 표현될 때는 인(仁)자와 같이 쓰였다는 것이다.
역자 : 송섬별은 영문학을 공부했고, 더 잘 읽고 쓰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다. 주로 여성, 성소수자, 노인
과 청소년을 다루는 책에 관심을 가졌다. 앞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더 많
이 소개하고 싶다. 옮긴 책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여름』, 『당신 엄마 맞아?』, 『애너벨』, 『너를 비밀로』,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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