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532.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paxlee 2022. 6. 26. 07:53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키 150센티미터의 커피나무 한 그루가 프랑스와 유럽사를 바꾸었다. ‘루이 14세의 커피나무’로, 171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루이 14세의 커피나무’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이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 근무 경험이 있는 해군대위 출신 가브리엘 드 클리외였다. 어렵게 커피나무 한 그루를 구한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그 나무를 마르티니크로 가져가 심게 했고,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하며 몇십 년 후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나폴레옹은 커피를 군대에 맨 처음 보급한 인물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 애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발명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의 혁신은 그 열매인 셈이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음료’ 커피는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18세기 이후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

커피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을까? 이 책은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서 커피가 홍차에게 밀려난 원인이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일혁명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 커피였다는데?’ 등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로 마시던 ‘검은 음료’가 역설적으로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검은 욕망’을 자극하며 아라비아와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제패한 이야기를 다룬다.

 

한데 여기에는 사실 약간 번거로운 문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 세계가 와인을 비롯한 모든 주류를 철저히 금지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혹시라도 커피가 와인의 일종으로 판명되는 날엔 커피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가 정당성을 확보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 커피를 옹호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 즉 수피교 수도사였다. 우리는 이슬람 문화와 그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수피즘이라는 신비주의 사상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아니, 사상 전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커피와 관련된 부분만이라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커피의 어원이 되는 ‘카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커피는 별난 음료다. 사실 대체로 몸에 나쁜 편이다. 마시면 쉬이 흥분하게 되고 잠들기 어려워진다. 식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런 커피의 부정적인 특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전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 바로 수피교 수도사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식욕을 줄이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 본문 「‘커피는 본래 와인이었다’라는 말의 숨은 의미는?」 중에서 (41~42p.)

그 밖에 다른 문제도 있다. 커피 무역에 뛰어든 유럽 상인은 카이로 상인이라면 겪을 일이 없는 전혀 다른 문제를 맞닥뜨렸다. 아라비아에서 구매한 커피를 유럽에 가져다 팔 때 특히 그렇다. 아무리 가격 차이가 크다고 해도 유럽인에게는 커피 자체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상품이라 커피에 대한 수요가 제로에 가까웠다. 심지어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 이웃 주민이 커피하우스에서 나는 ‘악마의 냄새’를 적절히 조치해줄 것을 요구하며 상부에 고발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아로마가 어떻고 하는 식의 문화 수준이나 국민성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상품이 유럽에서 판로를 개척하려면 유럽인 사이에서 커피의 사용가치가 통용되어야 했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자연적, 물질적 특성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자연적, 정신적 욕구가 그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말이 쉽지, 인간의 내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인간개조’를 의미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커피에는 ‘상용성’이 있었다. 어떻게든 일단 몇 번 마시게 하면 자연스럽게 내적욕구로 자리 잡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입에 발린 말로 속인다 해도 유럽에서는 이슬람 세계처럼 커피의 상품 이미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아라비아의 ‘검은 잠잠성수’에 필적하는, 영혼의 저 깊은 곳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했다. 커피에 얽힌 관념은 유럽 각국에 이미 존재하던, 혹은 새롭게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 급속하고도 왕성하게 결합하며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상품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커피는 각 나라의 관념 안에서 주어진 위치를 차지해나갔는데 ‘이성의 리큐어’ 혹은 ‘안티 알코올’ 등이 대표적 예다. 그 관념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커피라는 새로운 상품의 사용가치가 인간의 내적 욕구로 자리 잡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 이는 상업자본가들이었다. - 본문 「17~18세기, 유럽의 상업자본가들은 왜 그토록 커피의 ‘상품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골몰했을까」 중에서 (87~88pp.)

한편 커피하우스가 클럽으로 바뀌어가던 그 시점에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차’의 등장이다. 사람들이 커피와 차츰 멀어지면서 찾기 시작한 것이 바로 홍차다. “왜 영국인이 정열적인 홍차 마니아인가는 그들의 커피를 마셔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커피가 맛이 없다는 것이 변화의 본질적인 원인일 리는 없다. 게다가 영국인은 ‘맛있는 차를 맛없게 마시는 국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시아에서 차를 생산하는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이 산업정책상 자국 내에 홍차 판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의구심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영국이 네덜란드와 함께 전 세계 커피 무역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을 때 전 유럽에 대량의 커피를 공급하면서도 정작 영국인 자신은 커피를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국인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한 것일까?

 

이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자료가 있다. 1674년, 남편이 허구한 날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것을 애태우던 아내들이 커피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낸 진귀한 팸플릿이다. 정식 제목은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 사막처럼 메마르고 쇠약하게 만드는 음료의 과도한 섭취로 인해 여성의 섹스에 야기된 심각한 불편을 공공에 호소한다〉다. - 본문 「무엇이 영국인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했나」 중에서 (127~128pp.)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모순된 면이 많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묘한 남자였다. 우선 그는 계몽된 전제군주의 정체성과 위상을 몸소 구현하며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또 그는 플루트 곡집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고, 여자와의 ‘전쟁’에 질린 남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포츠담에 지은 상수시 궁전에서 잘 때는 늘 애견하고만 동침했다. 이런 타입의 남자가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마시는 커피도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한가.

 

그는 커피에 샴페인을 넣어 같이 끓인 뒤 마지막에 후춧가루를 뿌려 마셨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계몽적 이성으로는 왜 위대한 프로이센의 국민이 이런 음료를 마시는지, 그리고 결국 매년 70만 탈러의 막대한 자금이 네덜란드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의사들에게 명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한 것이다.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 효과는 제로에 가까웠다. 이유가 뭘까?

 

일반 서민들이 ‘커피가 무서워서 감자를 먹으랴’ 하는 심정으로 그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가 독성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감자가 지닌 몇 가지 탁월한 장점(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재배하기 쉽고 소출량이 많은 데다 쌀ㆍ밀 등의 주식 대체용으로도 손색없다는 점 등)도 간파하고 있었기에 장차 독일의 고질적 식량난을 해결해줄 미래형 주식으로 만들기 위해 감자 재배를 장려했다. - 본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사들에게 명령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한 까닭은?」 중에서 (219~220p.)

드디어 본격적으로 커피 폐기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양의 커피가 소각되거나 배의 갑판 위에서 바다로 버려졌다. 커피대국 브라질의 파탄은 결코 한 국가의 파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식민지로 출발한 브라질은 노예무역과 이민 등을 통해 집요하게 커피 공급기지로의 변신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1929년 이후 대공황 시기에는 유럽 근대 시민사회에 ‘검은 혈액’을 흐르게 한 순환구조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었다.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는 그 처참한 광경을 찍은 수많은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독일의 각 신문도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32년 3월에 발행된 한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브라질의 커피 폐기를 전하는 보도사진이다.


사진에는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증기기관차 위에 네 명의 남자가 서 있다. 두 명은 어이없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띠고 있고, 나머지 두 명은 얼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한 사람이 석탄을 갑으로 퍼서 기관실로 보낸다. 아니, 자세히 보니 석탄으로 보였던 그 물질은 ‘커피콩’이었다. 커피콩을 에너지원으로, 구수한 아로마를 퍼뜨리며 브라질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증기기관차…….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이유는 옛날(‘옛날’이라고 말은 했지만, 불과 400여 년 전의 일이다)에 이슬람 세계에 홀연히 나타난 카와가 『꾸란』이 먹을 수 없다고 금지한 석탄인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은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커피콩이 석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논쟁은 왜 필요했을까? 카와라는 새롭고 독특한 음료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커피가 세계교역의 대표 상품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00년 지난 시점에 전 세계가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시대가 된 상황에서 커피의 ‘순환’을 책임지는 운전자이자 심장격인 브라질에서 ‘커피는 석탄이다’ 하고 선명한 사진과 함께 선언해버린 셈이었다.
- 본문 「전 세계 커피 총생산량 4분의 3 이상을 담당하고 국민 90퍼센트가 커피 생산에 종사하던 커피 대국 브라질이 1930년대에 엄청난 양의 커피를 바다에 버리거나 소각한 이유는?」 중에서 (305~308p.)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 커피를 군대에 보급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노력이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세계사를 바꾸다

“나는 귀하의 나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오스트리아 정부 사절단을 향해 한 말이다. 이는 1797년의 일로, 나폴레옹은 동쪽의 맹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해 사지로 몰아넣은 뒤 강화조약을 거부하는 사절단에게 엄포를 놓았다. 커피를 보면 국가 존망 위기를 떠올리는 나쁜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조약에 응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곧바로 조각난 커피잔 같은 처지가 된 신성로마제국을 빗자루로 쓸어 담듯 공략하며 해체해버렸다. 1804년의 일이다. 이후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선포해 대륙을 봉쇄했다(여기서 ‘대륙봉쇄’는 대륙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봉쇄한다는 의미다). 이는 강대국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무릎을 꿇은 상황에서 대서양과 지중해에 이어 발트해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천재 전략가 나폴레옹이 단행한 해상봉쇄조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안이 봉쇄되면 커피도 봉쇄된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커피를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식용음료로 군대에 커피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대량의 커피를 보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자신의 명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군대에 막대한 양의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대단한 추진력과 실행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 여러 분야의 발명과 기술 개발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독특한 음료 커피는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바꾸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18세기 ‘산업혁명’ 하면 영국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당대 프랑스의 발전상과 기여도는 영국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한 노력이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 산업 구조를 혁명적으로 뒤바꿔놓는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커피나무 한 그루가 커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18세기, 네덜란드는 커피 재배에 관한 한 유럽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저자 : 우스이 류이치로는 도쿄대학 명예교수. 194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1972년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도쿄대학 교양학부(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 전공) 교수, 테이쿄대학 외국어학부 교수를 지낸 후 2014년에 퇴임했다. 지은 책에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나 제거스로』『바하오펜론집성』『빵과 와인이 돌고 신화가 돌고』『말라버린 나무의 언어』『기억과 기록』『고해정토론』『카를 슈미트와 현대』『아유슈비츠의 커피』등이 있다.

역자 : 김수경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에이전트로 근무하다 지금은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공저로 『잘나가는 회사는 왜 나를 선택했나』가 있고, 옮긴 책에『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랑과 욕망 세계사』『기획서는 한 줄』『청춘이란』『마두금 이야기』『조금 다를 뿐이야』『여자 나이』『듣기: 직원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소통의 기술』『준비된 습관』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