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579.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paxlee 2022. 7. 17. 06:09

포퓰리즘·신자유주의… 당신은 본래 의미 알고 비난하나

 

정치적 목적 따라 비틀린 개념, 프린스턴대 교수가 설명하는 책 정치권 동네북 된 ‘포퓰리스트’
“대중의 편에 선 자신은 善, 남은 惡으로 몰아 이익 꾀해” 보수 때리는 단어 ‘신자유주의’
“20세기 초 전체주의에 반발해 시장 개방성을 유지하려 탄생”

해롤드 제임스 지음|안세민 옮김|앤의서재|512쪽|2만2000원

 

‘임대차 3법’ ‘긴급재난 지원금’ ‘도어스테핑 회견’… 근 몇 년 동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꼬리표가 완제품의 라벨처럼 따라붙는다. 포퓰리즘은 여당과 야당 상관없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가장 즐겨 쓰는 ‘언어 폭탄’이다. 정치학자들은 ‘대중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지킬 수 없는 공약을 하는 사람’ 등으로 포퓰리스트를 정의한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무릇 주민 전체를 대변한다고 말해야 하고, 때론 지킬 수 없는 공약도 해야 하는 법. 그러면 모든 정치인이 포퓰리스트인가? 도대체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프린스턴대 교수인 저자는 다음과 같은 언행을 하는 사람들이 포퓰리스트라고 말한다. “지난 선거에서 대중은 선과 악을 가려냈다” “우리가 대중인데, 당신은 누구인가?” 포퓰리스트는 대중을 대변하는 자신을 ‘선’으로 그 외를 ‘악’으로 양분하고, 둘 사이 갈등에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담은 개념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됐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되짚으며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알리는 데 집중한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글로벌리즘’ ‘파시즘’... 정치 영역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 말들이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사람은 드물다. 저자는 “우리가 겪는 정치 경제적 혼란 중 많은 부분이 이러한 관념어들의 오남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말들이 단어에 대한 오해를 덧씌우는 경우가 많다. 포퓰리즘 역시 본래의 의미는 흐려진 채 비난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사례. 포퓰리즘은 본래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를 등한시했던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정치 스타일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오늘날 자신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신자유주의가 능력주의를 지나치게 신봉하고, 분배에는 무신경한 사람을 비난하는 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어느 순간 ‘비난을 위한 언어’가 된 것이 오히려 경제 문제 논의를 어렵게 한다고 지적한다. 20세기 초 전체주의에 반발해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개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상이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금융시장 규제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신자유주의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국가·시민사회 간 균형을 맞추고 독점을 방지하자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진보 진영의 주장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영논리에 휩쓸려 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 ‘포퓰리즘’ ‘신자유주의’ 같은 개념어들은 때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된다. 저자는 우리가 겪는 사회적 혼란 중 대부분이 위와 같은 개념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온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비난에 사용되던 용어가 칭찬의 언어로 바뀌기도 한다. ‘세계화’는 단어가 겪는 부침을 잘 보여주는 사례. 1990년대 다국적기업의 활동이 본격화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세계화는 주로 불평등을 확대시킨다는 비판적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신흥 국가들이 성장하고 세계의 빈곤율이 감소하자, 세계화는 한동안 빈곤과 기후변화 등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번 선거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입니다. 아메리칸드림을 구할지, 아니면 ‘사회주의자의 어젠다’가 우리 운명을 파괴할지 결정할 것입니다.” 2020년 8월,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를 ‘사회주의 세력의 트로이 목마’로 지칭하며 맹공을 퍼부었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바이든 후보가 왜 사회주의자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분배를 강조한 바이든 후보의 경제정책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뜻하는 사회주의로 치환시켜며 ‘악’으로 규정한 것. 연설 이후 남은 것은 ‘사회주의자 바이든’이라는 단어뿐.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에 대한 적대감과 이질감을 키우게 됐다.

 

책은 단어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이 책의 요지가 담겨 있다. 저자는 주로 영미권의 시각에서 이데올로기의 오남용이 어떻게 사회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있지만,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특히 자신과 상대 세력을 선과 악으로 구분지어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포퓰리스트의 선동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은 한국의 현실과도 놀랍도록 닮아있다. 관념어가 많은 번역서라 단숨에 읽히진 않는다. 하지만 글로벌리즘, 헤게모니, 테크노크라시 등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주요 이데올로기들을 충실히 설명한 안내서다.

 

[원제 The War of Words] 윤상진 기자 202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