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553. <외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

paxlee 2022. 7. 6. 08:05

“외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 그 1만1000권에 매혹됐죠”

 

역사 에세이 ‘1만 1천 권의 조선’ 펴낸 소설가 김인숙


‘명지-LG한국학자료관’의 책… 3년간 거의 매일 출근하며 탐닉.
“학술 목적으로만 공개되는 희한하고 희귀한, 황홀한 책들 일반인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소설가 김인숙이 ‘명지-LG한국학자료관’ 책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욕심 같으면

이 책들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모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읽히는 책이 아니라, 이곳의 책들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 글은 보탤 뿐이죠.”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 인문캠퍼스 ‘명지-LG한국학자료관’에서 만난 소설가 김인숙(59)은 신작 역사에세이 ‘1만 1천권의 조선’(은행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명지대학교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부터 수집한 해외 고서(古書) 1만1000여 권과 2만500여 종의 마이크로필름, 지도, 영상기록 등을 모아놓은 곳이다. 서양인이 쓴 책과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한국학 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국에 관한 저술들이다. 대부분 해외 고서상과 경매, 인터넷 서점,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수집했다.

 

김인숙은 2018년 12월 자료관에 처음 초대되던 날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창문이 거의 없어 어둡고 고즈넉한 장소에, 책들이 우뚝 솟아 나를 바라보고 있더라”고 말했다. 학술 연구 목적 등이 아니면 드나들기도 힘든 이곳을 반드시 독자들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책은 이야기를 담은 몸이다.

그 몸에 묻은 얼룩, 낙서, 흉터,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질 때 책은 몸과 정신으로 완성된다”(17쪽)

 

스무 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돼,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황순원문학상 등 대부분의 큰 상을 받았고, 올해로 등단 39년의 중견 작가. 이번 작업에선 이곳에 모여 있는 책 자체의 몸[肉]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이곳에서 숨 쉬고 있는 책의 표지, 내부 등을 촬영한 사진 120여 장이 들어간 이유.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쉬울 뿐이죠.”

 

책은 주로 외국인이 쓴 고서를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처음엔 조선에 대한 외국인들의 오해와 편견이 담긴 책들을 보여주고, 뒤로 갈수록 우리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낸다. 미국성서공회의 ‘선교 안내 목록’ 속 지도 등 당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들도 있다. 1909년 고종이 베푼 연회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이 한 구절씩 읊어 완성한 ‘함녕전 시첩’에는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지난 3년간 매일같이 자료관에 나와 책들을 탐닉했다. 1만1000여 권의 책들을 꼼꼼히 살펴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적 가치, 책 자체의 가치를 기준으로 46권을 추렸다. 목차 정리에만 거의 2년이 걸린 작업. 한 권씩 꺼내 책의 특징을 메모와 표로 기록했다. 그가 만든 표에는 책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 생생히 살아 있다. 그가 보여준 메모장에는 ‘이쁨, 거의 찢어질 듯, 깔끔한 서명, 생생한 사진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희귀한 책들과의 황홀한 만남의 기록. 그는 “라틴어, 불어 등은 특징을 파악하고 영어 번역본과의 차이를 비교하고, 논문뿐 아니라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추려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천주교 탄압사에 관한 기록들은 미처 책에 넣지 못해 정말 죄송한 마음까지도 들어요.”

 

김인숙에게 이 책들은 ‘시간’이다. “내가 작가로서 살아온 시간들하고 중첩이 되는 것 같아요. 작가로 40년 살았는데 마냥 행복했겠어요? 책들을 펼쳤는데 어떤 건 찢겨 있고, 어떤 건 새 책이고. 새 책은 어쩌다 내게 새 걸로 왔을까 이런 걸 생각해보고. 그러다 갑자기 ‘내 책은 몇십년이나 살아남겠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이 책들과 자료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해냈겠냐”며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번 신작은 소설가가 아닌 ‘부캐(부캐릭터)’인 김인숙이 진심을 담아 쓴 책이다. “역사 에세이다 보니, ‘소설가’라는 저자 설명이 안 들어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는 “역사는 항상 나를 흥미롭게 만든다”며 “역사를 보며 ‘그 시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았나’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오늘날의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는 3년의 여정을 끝냈지만, 자료관에 오는 건 무뎌지지 않는다고 했다. “1년이면 뚝딱 쓰겠거니 했는데, 3년이나 걸릴 줄 몰랐죠. 오늘 책 낸 다음 오랜만에 왔는데, 너무 많이 봐서 더 안 봐도 되겠지 했는데 올 때마다 좋네요. 그리울 것 같아…”

 

이영관 기자.  조선일보 /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