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625. <『그녀와 그』>

paxlee 2022. 8. 1. 08:11

『그녀와 그』

 

 

음악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을 비롯해 일평생 수많은 남자와 경계 없이 교류하며 ‘사랑의 화신’이라 불린 조르주 상드와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천재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 국내 초역. 상드와 뮈세는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그녀를 다시 만나서 저는 비로소, 그렇게 오랫동안 부서졌던 그녀의 영혼도 여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고통받고 혹은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지요. 친애하는 로랑, 테레즈가 테레즈일 수 있도록 애써주세요. 그녀가 쟁취해낸 것은 그녀 자신이니까 말입니다!”(88쪽)

“제게 당신의 마음을 조금만 주세요. 그리고 제 마음을 모두 가지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받아주세요.”(103쪽)

“온화한 감정들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해주는 건 아니야. 인생의 강도를 느끼려면, 강렬하고 끔찍한 것들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지.”(126쪽)

예술가들은 서로를 풍자하는 데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테레즈 역시 자신을 풍자하는 걸 재미있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쉽사리, 마음먹은 대로 펜 끝을 놀릴 수 있었음에도 테레즈는 절대로 로랑을 풍자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그날 밤의 장면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스케치하고 있는 로랑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 영혼의 어떤 고통은 그녀에게는 절대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비쳤다.(131쪽)

아마도 거기에 인생의 모든 비밀이 있을 거야. 변화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 새로워지는 거야. 변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유로워지는 거야.(143∼144쪽)

“저의 정신적인 자유는 신성한 것이고, 그래서 제 허락 없이 누구도 제게서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자유를 당신에게 맡긴 것이지, 드린 게 아닙니다. 이 자유를 잘 사용해서 저를 행복하게 할 방법을 찾아내어야 했던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160쪽)

창백해지고 씁쓸해하던 로랑이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고, 셔츠는 찢기고, 이마는 벌겋게 달아올라 점점 더 빈정대며 화를 내자, 테레즈는 그를 보는 것도 그의 말을 듣는 것도 너무 소름 끼쳤고, 그녀의 사랑이 모조리 혐오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162쪽)

그것은 마치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그녀가 상상해왔던 한밤중에 비친 한 줄기 햇살과도 같았다. 억울해하고 절망적이었던 그녀가 사랑을 저주하려 했던 순간,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믿으라고, 그녀의 재앙을 하늘이 그녀에게 보상하려는 우연한 사고처럼 바라보라고 강요했다.(176∼177쪽)

꽃이 만발한 봄이야. 사랑의 계절이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239쪽)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그러니 우리 헤어지자. 고통을 주는 것 외에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329쪽)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만큼 우스운 다짐이 또 있을까. 파리에서 활동하는 화가(동시에 상드와 뮈세를 각각 연기하는) ‘테레즈 자크’와 ‘로랑 드 포벨’은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고,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테레즈는 과거 사랑의 상처 탓에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 지 오래고,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로랑은 테레즈를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정, 동료애, 연민 같은 단어로 서로의 주변부를 맴돌던 두 사람 앞에 미국인 남성 ‘파머’가 등장한다. 로랑에게 초상화를 맡기며 로랑과 테레즈를 지켜보던 파머는, 초상화가 완성된 날 로랑을 불러 말한다. “당신은 자크 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고는 베일에 싸인 테레즈의 과거를 이야기해준다. 사생아로 태어난 것, 감쪽같이 속아 유부남과 결혼한 것,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키우다 빼앗긴 것……. 파머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로랑은 테레즈에게 편지를 써 사랑을 고백한다.

저는 오로지 사랑이 삶이 될 거라는 것, 그리고 좋건 나쁘건, 제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93쪽)

테레즈는 로랑의 고백을 “새로운 불행에 대한 예언”으로 느끼고 로랑을 밀어내지만, 로랑을 향한 모성애적 사랑을 끝내 거부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사랑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환희를 맛보지만, 이내 상반되는 성향으로 인해 삐걱댄다. 게다가 테레즈는 방탕하기로 유명한 로랑과 어울려 다니며 평판이 나빠지고, 규칙적이고 계획적이었던 본래 삶이 흔들리며 경제적 어려움을 맞는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서로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요!”(159쪽)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좇는 로랑에게 테레즈는 자신을 구속하는 답답한 존재였고, 테레즈는 그런 로랑을 자신이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둘은 이별하지만, 연애의 끝이 사랑의 끝은 아니어서일까, 여전히 우정이나 연민 같은 말들로 서로의 곁을 맴돈다. 로랑은 뒤늦게 후회하고, 둘 사이가 회복될 수 없음을 아는 테레즈는 로랑을 다독이지만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관계는 끈질기게 계속된다.

 

“그러니까 다시는 잊지 마, 내 가엾은 아이, 사랑은 발로 밟은 다음 다시 피어나기에는 너무나도 민감한 꽃이라는 걸 알아야지. 더 이상 나와의 사랑을 꿈꾸지 말고, 네가 겪었던 이 슬픈 경험이 네 눈을 뜨게 해주고 네 성격을 바꿔주면,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아봐. 네가 그럴 자격을 갖출 날, 너는 사랑을 발견하게 될 거야.”(187쪽)

《그녀와 그》의 주인공들은 사랑 앞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 처음에는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해 가슴앓이하던 테레즈와 로랑은 이내 상대를 너무 잘 알게 되어 고통받는다. 애정이, 고마움이, 미안함이 그녀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녀와 그》는 사랑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을 읽고 나면 이렇게 다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어김없이,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테다. 또다시 찰나의 기쁨을 맛보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배울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쓰라림 없는 최후의 기록’이자 ‘절대적 사랑에 대한 불가능한 낭만적 탐구’ 이다.

첫 시집으로 푸시킨의 찬사를 받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둔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뮈세는 여섯 살 연상의 상드를 만나 이내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희열에 달뜬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동경해오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기서 뮈세는 방탕한 본래의 기질을 드러내고, 뇌염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된다. 상드는 뮈세를 정성껏 간호하지만, 동시에 뮈세를 치료하던 의사 ‘파젤로’(소설 속 파머의 분신)와 연인 사이가 된다…….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이후 화해하지만, 뮈세는 상드와 겪은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며 《세기아의 고백》을 발표한다.

 

그리고 뮈세가 사망하고 《세기아의 고백》이 출간된 지 스무 해가 더 지나서야, 상드는 두 사람의 관계 주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소문을 뒤늦게라도 잠재우기 위해 《그녀와 그》를 출간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시선에서 새롭게 쓰였다는 점에서 ‘그’의 관점에서 쓰인 《세기아의 고백》과 고스란히 포개지지만, 뮈세와의 사랑과 모험이 좀 더 사실관계에 근거해 그려지고 적극적으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았다는 점은 사뭇 다르다. 《그녀와 그》가 출간된 이후에도 뮈세의 형이 발표한 《그와 그녀》, 시인이자 서간 작가인 루이즈 콜레가 쓴 《그》, 작가이자 역사가인 가스통 라발레가 출간한 《그들》 등 각기 다른 관점에서 둘의 이야기를 다룬 패러디 소설들이 연달아 출간되며 큰 반향을 일으킨다.


‘세기의 연인’이라 부를 만큼 프랑스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들은 사랑에 모든 것을 걸 만큼 무모했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은 지금까지도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감정을 주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그녀와 그》는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으며, 동료 작가들에게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진실과 절제’ 속에서 로랑이 만들어졌고 사실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언급했으며, 티에리 보댕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쓰라림 없는 최후의 기록’이자 ‘절대적 사랑에 대한 불가능한 낭만적 탐구’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이 소설을 두고 “19세기의 사랑과 연애에 관한 여성적 사유의 견본”이자 “소설 형식을 빌린 사랑의 논쟁서”(시인ㆍ소설가 이장욱 추천사)라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저자 :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180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귀족 출신인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가 있는 노앙에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본명은 아망틴 뤼실 오로르 뒤팽. 1822년 지방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두 아이와 함께 노앙을 떠나 파리로 거처를 옮기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가인 쥘 상도를 만나 연인이 되었고, 그의 이름에서 따온 ‘조르주 상드’를 필명으로 삼아 첫 장편소설 《앵디아나》(1832)를 출간했다.

 

남성적인 필명과 더불어 남장을 한 채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며 수많은 예술가와 경계 없이 교류했고, 음악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을 비롯한 수많은 남성과 교제했다. 특히 연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연애는 상당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뮈세와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녀와 그》(1859) 역시 주인공들의 유명세와 오노레 드 발자크 등 동료들의 호평 속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작품에 담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달리 조명한 여타의 작품을 낳았다.

 

일평생 수많은 사람과 솔직하게 교유하며 ‘사랑의 화신’이라 불린 상드의 주요 작품으로는, 사랑의 환멸을 묘사한 《렐리아》(1833), 고아에 대한 부유층의 무관심을 일깨우는 《사생아 프랑수아》(1848), 노년에 쓴 자전소설 《내 인생의 이야기》(1855) 등이 있다. 1876년 노앙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자 : 조재룡은 성균관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 시와사상문학상, 2018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 《잠자는 남자》,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알 수 없는 여인에게》, 《떡갈나무와 개》, 《문체 연습》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번역의 유령들》, 《번역하는 문장들》, 《시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