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7) *-

paxlee 2005. 6. 9. 22:58

 

                                               *  서 울 예 찬 *

 

                             

서울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처음 고향마을을 등지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을 때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짜릿한 두려움과 불뚝불뚝 야무지게 일던 희망의 기억은 아직도 바다에서 막 건져 낸 생선처럼 펄떡이며 생생하다.

정말이지 서울은 최고의 고지였고 최후의 도전지였다. 어머니가 전학문제로 빠진 이처럼 나만 쏙 빼놓고 어쩔 수 없이 조르르 동생들만 데리고 서울로 떠나고 나서, 나는 전학이 될 때까지의 그 남은 일년을 신작로 끝으로 사라지는 서울행 직행버스 꽁무니만 바라보며 터질 듯한 그리움으로 서울을 기다렸다.

저 버스만 타면 서울로 갈 수 있다, 서울로 갈 수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시외버스 터미널 앞 오래된 화장품가게 유리문에 붙어있던 사진 속의 연예인들이 사는 곳,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 수 있고, 국회에서 결정되는 사안이 가장 빠르게 펼쳐지는 곳 서울.

풍부한 기회가 도사리고 있는 역동의 바다, 정체되지 않고 솜털 하나까지 생기 도는 삶. 그 동경과 그리움은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나의 무의식 켜켜이 재워져 서울톨게이트에 붙어있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문구만 봐도 안심 안 되는 아이 떼어놓고 먼 길 가 듯 가슴이 저려오고,

서둘러 귀향하면서 ‘안녕하세요, 서울입니다’ 표지만 눈에 띄어도 그 순간부터 감미로운 안심으로, 눈물 나도록 그리움에 사무쳤던 연인의 옷자락을 잡아챈 듯 안온한 기쁨에 눈물이 핑 돈다. 나에게 그토록 절대적 애정으로 자리매김 된 서울은 지리산 골짜기 산골아이를 그렇게 손잡아 이끌어주었다.

처음 서울에 도착해서 살았던 곳은 전신 말죽거리인 양재동이다. 미루나무가 신작로 끝까지 이어지던 길을 따라 20여분을 걸어 들어가면 아담하게 지어진 양옥집 지하에 우리의 첫 서울살림을 시작했었다. 물론 마루에서 내려 댓돌을 밟고 마당에서 뛰놀던 우리에게 서너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여는 지하방이 몇 해가 지나도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2층 주인집 아이들의 흉내 낼 수 없는 세련됨과 뽀얀 물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만 봐도 침이 꼴딱 넘어갈 만큼 부러워서 나도 조금만 더 서울에서 살다 보면 완벽한 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땅글 한 희망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도곡동에 있는 여자중학교로 배정을 받았던 나에게 타 학교보다 더 유복한 집 여식들로 중 무장된 집단에서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온통 구릿빛으로 누덕누덕한 시골아이에게 누구 하나 따스한 시선을 넘겨주진 않았다. 그 낭패감이란. 아무튼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생긴 것은. 학교 앞길만 건너면 배꽃이 핀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동네 이름은 개포동이었고 그 배 밭 군데군데 포크레인이 밀고 당기며 개발이 이제 막 이루어지던 흙먼지 사이를 지나 야트막한 산등성이 꼭대기 한옥 집에 살던 아이였는데 쓱 나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정말이지 하늘을 양쪽으로 쪽 찢어 그 사이로 뛰어 오르고 싶을 만큼 행복 했던 날이었다.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개포동 그 아이 집으로 가서 함께 배 밭을 걸으며 등교할 때 그 아이 말하는 입 모양만 뚫어지게 보며 속으로 무수히 연습하던 서울말. 으 와 어 발음이 신기하게도 혀끝에서 찐득거리며 헷갈리던 그 때,

산골마을이지만 늘 전체 일등만 하던 나에게 감히 넘볼 수도 없던 서울아이들의 성적은 기가 막혀 허탈한 웃음만 삐죽삐죽 나오게 할 정도로 박탈감을 건네주었지만, 나의 유년시절은 서울아이들의 몸에 흠뻑 밴 달콤한 서울말 배우기가 더 급급했다.

투박한 내 귀로는 미끌미끌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던 영어발음, 팝송이라는 영어노래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데로 족족 가수가 숨쉬기하는 순간조차 놓치지 않고 똑같이 호흡을 맞추는 그 경이. 아무리 깨끗하게 빨래비누로 문질러 빨아도 서울아이들의 빳빳하게 풀이 먹여지고 눈이 시리도록 뽀얗게 빛나던 그 교복 칼라는 도저히 캐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음모였다.

어디 칼라뿐이랴. 교복은 언제나 칠흙같이 어둔 밤하늘처럼 반듯하게 펴져 있고, 아침이면 삐죽삐죽 삐친 단발머리 때문에 이리 저리 서둘러 핀을 꽂아 등교를 하지만 누구 하나 까만 생머리 찰랑이지 않은 아이들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의 흠집 없는 모습들이 생각날 때면, 강한 열등감으로 다가와 바싹바싹 내 느슨해지는 오기를 부추긴다. 그러나 오히려 주눅들고 기죽기보다 나도 서울 아이들처럼 생기 있게 자신만만할 수 있다는 오기. 그 오기는 도전 정신이었고 그 도전 정신은 나를 담박 왕따, 이방인이 아닌 고집스럽고 진취적인 될성부른 아이로 만들었었다.

아이들 입만 보며 서울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했고 완벽한 발음을 따라 하기 위해 입안의 혀를 도르르 말고 말하는 단어마다 이응 자를 붙여가며 치열한 극성을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아이다운 발상이고 처신이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 그런 모습에 빛도 들지 않는 방 한 쪽에 앉아 종일 저린 발 한번 펴보지 못하고 한복에 수를 놓아 우리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으로써의 어머니 가슴은 얼마나 안타깝고 저렸을까 싶다.

서울살이 열 세 살 나이의 내 사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그 후, 몇 년을 한참 개발 붐이 일던 논현동 언덕배기 허름한 연립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대치동 공사현장에서 밥집을 하기도, 가락동에 있는 지하 중국집에서 기름에 손 데어가며 이 갈고 모은 알토란같은 쌈지 돈으로 어머니는 가락동에 있는 작은 시영아파트를 융자를 얹고 사셨다. 열세 평 아파트. 그 곳은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집주인이 시끄럽다고 눈치를 주지도 않고, 전기세 수도세를 부당하게 더 내지 않아도 되고 마당이 아닌 뒤 곁으로 돌아 다녀야하는 가슴 시린 기억도 다 뭍을 수 있을 만큼 좋았던 우리 집. 시골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강한 성취감으로 우리 가족 모두 빛나던 때였다.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이 생기기 전, 우리 네 자매는 조르르 탄천으로 쑥을 캐러 갔다가 어둠 이 어둑어둑 하게 내리면 뚝방길을 막내 손 그네를 태워주며 집으로 오고, 한 달에 한번 어머니가 과일장사를 쉬는 날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찬합에 담고 계란 후라이를 오랜만에 식구수대로 준비한 다음 신 김치를 유리병에 담고는 한강으로 나들이도 갔었다.

잘 정돈 된 나무, 까실까실 기분 좋던 잔디, 바람이 불 때마다 이랑이랑 반짝이던 한강은 무너지지 말고, 열심히 살라며 서울이 우리에게 준 선물 같았다. 조깅을 하는 사람, 연인의 손을 잡고 부푼 희망으로 온 세상이 내 것으로 보일 것 같던 연인,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을 나온 아들, 아이들의 뜀박질에 걸음을 맞추고 함께 보드랍게 발맞추던 할아버지,

벤치에 앉아 책을 보던 학생 그 모든 것들은 분수에 맞게 계획을 세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서울의 모습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싸온 음식을 맛나게 먹고 강가에 조르르 앉아 어머니와 동생들의 정겹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던 그 때, 난 바로 이게 행복이구나 처 음으로 정신 번쩍 들게 깨달았다.

진정한 서울사람은 매끄러운 서울 말씨와 반듯한 옷차림을 가진 겉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과 정의를 나누는 것, 바로 알찬 내실을 기하는 모습, 그것이었다.

논 물 보러 폭우 속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실족하며 죽음의 강으로 쓸려 내려가 영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음을 한탄하며 그 산골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담쌓고 살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땡볕에 축축 늘어지는 엿가락 같은 권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넌 할 수 있어! 네 꿈을 펼쳐봐. 서울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아낌없는 용기를 얹어주고 신나는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곳이야. 그랬다. 서울이 우리를 불렀던 것이다. 얼마나 살 떨리는 고마움인지. 더군다나 서울에서 우린 고마운 사람들도 참 많이 만났었다. 어머니가 고단한 생활 때문에 암에 걸려 투병하실 때도,

나도 살아보려고 때묻은 고향 박차고 서울로 온 사람이라며 아래층 아주머니가 두부 팔아 모은 돈 선뜻 수술비에 보태 주셨고, 영등포 모 대학병원 의사선생님은 항암제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 죽으면 우리 아이들 몽땅 고아 된다며 피마르는 고통을 뒤로 한 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어머니를 존경한다며,

우리들에게 늘 든든한 아버지처럼 의지가 되어주셨다. 병원에서 서둘러 퇴원하신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시장 자리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 자리엔 여전히 과일이 평소처럼 펼쳐져 있었고 길 건너 기름 집 아저씨, 해물 파는 아줌마, 그릇 집 외팔이 허씨 아저씨까지 대신 어머니 과일을 떼어 와 팔아주고 계셨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계속 통원 치료도 받을 수 있으셔서 지금까지 건강하시다. 하지만, 그 때 그 고마운 인정들을 하나도 갚지 못하고 사는 지금 우리 가족은 서울에 빚진 빚쟁이다. 혹 어떤 이는 서울을 빛 한줄기 들지 않는 비정한 도시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속에서 풀꽃 하나 피어나지 못할 만큼 인정이 메말라 죽은 도시라고 말하지만 난 안다.

서울이 얼마나 반듯한 도시인지. 얼마나 겸손함으로 구슬 땀 흘려가며 최선을 다 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도시인지, 왈칵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고 싶도록 사랑스럽고 어머니처럼 인자한 도시인지 나뿐만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수재, 화재, 가난, 병마, 온갖 인재와 천재지변의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정을 멈추지 않는 선한 이웃들이 서울을 보듬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 서울의 미래는 당당하게 밝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안다. 세계 어느 나라 수도와 견주어도 쭈뼛 뒷걸음질치지 않을 만큼 풍부한 문화유산,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는 강인한 민족성과 양질의 두뇌를 가진 인적자원, 튼튼한 인류애, 미래를 위한 아낌없는 지원과 부단한 노력, 순수한 열정이 어우러진 대한민국 서울은 미래 온 세계의 중심도시 서울이 될 것이 자명한 이치임을 2002년 세계 월드컵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루면서 모두 느껴 안다.

처음 내가 서울을 동경하며 서울로 향하는 직행버스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그 때처럼 세계는 서울을 동경하며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한 치 추호도 의심 없이 자신 하며 서울을 예찬한다. 서울에게 사랑을 바친다.

- 제6회 2000년 수필 서울 이야기 이수경님의 글에서 –

유심초-사랑이여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고간 바람처럼 기약없이 멀어져간 내사랑아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라 지지않는 사랑의 꽃으로 다시한번 내가슴에 돌아오라 사랑이여 내사랑아 아~ 사랑은 타버린불꽃 아~ 사랑은 한줄기 바람인것을 아~ 까맣게 잊으려해도 왜 나는 너를 잊지 못하나 오 내사랑! 오 내사랑 영원토록 못잊어 못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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