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20) *-

paxlee 2005. 7. 17. 21:30

서울 이야기는 서울의 젖줄인 한강을 먼저 살펴보고,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둘러보았다. 다음은 문화재의 보고인 서울에 산재한 문화재 중에서  먼저 조선조 궁궐에 대하여 일별해 보려고,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운현궁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의 환경과 문화에 대하여 공부를 하여 보자는 의도에서 시작은 하였으나 자료를 찾아서 보고 현지를 둘러보고 확인하는 데는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다. 앞으로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 글 쓰는 타임이 늦어질 것 같다.  

 

 

      -* 경복궁  (사적 제 117호) *-

경복궁 너무나 알려진 조선조의 정궁으로 태조 4(1395)창건되었다. 경복(景福) 시경에 나오는 말로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1592) 불타고 6.25사변과 수해로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고종2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경복궁은 정문격인 광화문,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사신들을 맞았던 근정전, 침전으로 쓰였던 강령전,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후원인 경회루, 향원정 외에도 지선당, 집경당,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복궁은 왕조의 궁이면서 찬란한 문화의 집결체라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도 유서깊고 건축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그래서 찬찬히 둘러보면 경복궁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읽을 있다. 광화문 해태조각상, 근정전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 경회루 다리 영재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 조각물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최대의 미술품으로 손꼽힌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는 사시사철 방문객들의 발길을 멈추어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사이로 보이는 향원정은 한국 건축의 단아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녹음은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고 계절에 맞추어 피어나는 꽃이며 나무들로 도심의 휴식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근정전은 바깥에서 보기엔 중층(2층)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훤히 트여서, 방전(方塼)을 깐 바닥에서부터 소란반자한 천장까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넓고 높아서 장엄하다. 아래 위층이 구분되는 곳에 별창방을 돌리고 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雲宮)으로 치장하였으며, 아래로는 낙양각을 하였다.

 

법전 내의 텅빈 공간은 이 어좌의 장엄을 꾸미기 위한 의장물(儀杖物)들의 배설을 의도하고 설정한 것이어서 내부의 초점은 어좌에 있다. 중앙간 천장 중심부에 여의주를 다루는 두 마리의 황룡을 장식하였다. 황룡은 비늘까지도 그대로 세각(細刻)하였다. 이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신과의 어떤 소통을 위한 대화로 보인다.

 

경복궁은 고종 5년(1898년) 7월부터 1898년 12월까지 27년간 왕궁으로 사용되고, 고종의 덕수궁(경운궁) 이어(移御)후 고종 32년 (1895년) 민비가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 당하고 이듬해 2월에 고종황재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다.

 

경복궁의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은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궁궐은 임금이 집무하는 대궐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궐로 엄격하게 구별된다.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교태전 뒤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자격루를 설치하였다.

 

* 근정전의 월대(月臺)

 

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 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으로 돌 기단을 구성한 것을 월대(越臺)라고도 한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부분 넓이보다 앞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남쪽 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에는 게풍 사이에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된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해태를 비롯해 주작, 백호, 청룡, 현무 등 소박하면서도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다양한 돌 조각들이 있어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것도 근정전 보기의 즐거움이다. 특히 서쪽 월대의 잔나비 상은 그 표현의 사실성이 뛰어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금방이라도 함께 얘기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한다.

 

* 근정전 앞 품계 석 주변의 쇠고리

 

근정전 앞에는 임금과 신하의 자리가 정해 져 있다. 정1품에서 9품까지, 종1품에서 9품까지의 지정석과 행사 시 '차일遮日'을 치기 위해서 바닥에 쇠고리가 달려있는 것이다. 새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등 왕실 행사 때 햇볕이 지나치게 강할 때 차일을 치는 것이다.

 

1) 경회루(국보 제224호)

 

경복궁 창건 시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을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경회루를 완공하였다.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돌기둥은 모두 48개로 가장자리는 네모난 돌 기둥이고 안쪽으로는 둥근 기둥으로 되어 변화를 주었다. 돌기둥에 용을 세겨 넣었는데, 그 또한 걸작이어서 외국 사신들의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3) 자경전 (보물 제809호)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고종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 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십장생 굴뚝(사적 810호)벽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 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그리고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 자경전 꽃담.

 

자경전의 서쪽 담은 주황색의 전(塼)으로 축조한 꽃담이다.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格子紋), 육각문(六角紋),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4) 명성황후 조난 터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일인(日人)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경복궁 후원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와 많은 상궁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명성황후라는 시호(諡號)는 광무원년(1897)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처음 남청량리에 장사(葬事)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洪陵, 경기도 금곡)에 이장하였다. 명성황후 조난터를 알리는 비석(碑石)은 1981년 11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경복궁내의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 세운 것이다.

5)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건축상 공통점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로로 하늘과 맞닿는 부분)가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용안, 용포, 용상 같이 보통 용은 왕을 상징한다. 강녕전의 경우는 용(임금)이 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기 때문에 용마루가 없다고 하며, 교태전의 경우는 왕비와 왕이 교합하는 곳이므로 용마루를 없애고 지었다고 한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고 경회루는 아름다운 정원이며 휴식처입니다. 자경전은 아름답기 때문이며, 명성황후 조난 터는 한말의 비참했던 역사의 현장을 되새기자는 의미로..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은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던 경복궁의 비밀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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