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22) *-

paxlee 2005. 7. 28. 22:22

 

                       -* 창경궁 수난사 *-

 

창경궁의 전신은 수강궁이다. 수강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거처하던 곳이다. 성종13년 12월에 창덕궁 수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수강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궁을 확장하여 성종 당시의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그리고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처소를 마련하려는 뜻이었다.

 

수강궁 확장공사는 그 이듬해 봄부터 시작하여 1년 반이 지난 1482년 성종 15년 9월에 일차 완공하고, 다시 보완공사를 한 후 ‘창경궁’이라는 새로운 궁이 건립되었다. 성종 16년 5월에 소혜왕후와 안순왕후가 이어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여 왕실의 가족과 그에 딸린 인원을 수용하는 궁궐이었다.

 

창경궁에 왕이 기거하게 된 것은 1633년 인조11년 7월에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이어를 하면서 궁으로 역할이 시작되었다. 인조 이후 창덕궁은 동궐이 되고 창경궁은 법궁이 되었으며, 경희궁이 이궁이 되었다. 왕들이 가장 오랜기간 임어한 곳은 창덕궁이며, 경복궁, 창경궁의 순이다.

창건 당시 창경궁의 모습은 명정전. 문정전. 수녕전.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전(殿)이 7채이고, 양화당. 여휘당, 당(堂)은 2채, 사성각, 각(閣)이 1채였다. 명정전은 백관의 조회를 받는 정전이고, 문정전은 신하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편전이었으며, 통명전과 경춘전은 대비전에서 사용하였고 수녕전과 인양전, 환경전도 내전의 일부였다.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 226호)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은 모두 남향이지만 명정전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지세(地勢)에 따라 동향(東向))을 하고 있다. 정면인 동쪽으로는 현존하는 명정문(明政門)을 위시하여, 지금은 없어진 광정문(光政門)이 오른쪽인 남쪽에 있고, 광범문(光範門)이 왼쪽인 북쪽에 있었다. 현재의 명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정면 상·하 월대 중앙과 월대 좌우에는 화강석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월대 앞 마당 중심 좌우에는 품계석(品階石)이 설치되어 있다. 명정전은 궁궐의 정전이기는 하지만, 이궁(離宮)이기 때문에 경운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과 같이 단층으로 처리되었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제818호)창경궁에 있는 왕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동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歡慶殿)과 함께 남향이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툇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였다. 건물 전면에는 정교하게 장대석으로 쌓은 규모가 큰 월대가 마련되었다. 월대 정면에는 3조의 돌계단이 붙어 있으며, 좌·우측에도 각각 계단이 있고, 월대 상면에는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박석을 깔았다.

이 건물 서쪽에는 화강석으로 아름답게 조성한 지당(池塘)이 있다.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의 장방형 연못인데, 연못의 4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둘레에 돌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돌렸다. 지당 위에는 길이 5.94m, 폭 2.56m의 간결한 돌다리를 동서로 설치했다. 이 지당의 물은 북쪽 4.6m 떨어진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石溝)를 통해 폭포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다. 한국의 지당 가운데 가장 기발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대조전(大造殿/ 보물 제816호)창덕궁 내전(內殿)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현재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 북쪽에 위치하여 정면에 선평문을 두고 건물 동쪽에 흥복헌(興福軒), 서쪽에 융경헌(隆慶軒)이라는 익각(翼閣)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 청향각(淸香閣) 등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양심각(養心閣)· 경훈각(景薰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가 장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19세기경에는 이곳에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인 징광루(澄光樓),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인 집상전(集祥殿)과 주변의 수많은 행각들이 있어 더욱 장려하게 구성 되었다.


대조전은 현재 정면 9칸, 측면 4칸의 36칸 이다. 건물 전면에는 중앙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을 달고 그 위로는 동쪽에 봉황도, 서쪽에 군학도(群鶴圖)를 걸었는데 이는 김은호(金殷鎬) 등 네 사람의 화가가 1920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건물은 조선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최고의 건물이며, 특히 서양식 가구를 갖춘 한말 궁궐의 내실 모습을 남겨두고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호) 평상시 임금이 신하와 일상업무를 논하던 편전(便殿)이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편전은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과 같이 정전의 뒤에 위치하지만, 선정전은 창덕궁의 지세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의 동쪽 뒤에 위치해 있다. 건물은 남향하였으며, 정면에 설치한 낮은 월대 위에 다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푸른색의 유리기와로 덮혀 있다. 유일하게 궁궐에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선정전 주위 마당 남·동쪽으로는 행각이 둘러싸고 있으며, 선정전 정면 중앙칸 앞에서 남쪽으로 정문인 선정문까지는 사방이 트인 천랑(穿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선정전 남쪽과 동쪽에 많은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헐렸다. 선정전은 순조 때에 이르러 그 옆의 희정당(熙政堂)이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向)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창경궁이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창경원으로 강등되어 수난을 당하였다. 융희 원년(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시련을 맞이 하였다. 일제는 이듬해부터 임금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안의 전각 60여채를 헐어내고 동물사와 식물원를 만드는 한편, '춘당지'라는 연못을 파 북쪽에 일본식 정자 수정
(水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일제가 1909년 11월1일. 진귀한 동, 식물을 마련하여 개원식을 한 후 임금의 거처를 출입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창경원 구경에 빠져 들었다. 일제는 벗 꽃나무를 심어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전차를 타고 종로에 내려 조선제일 부자 박흥식이 지은 화신 백화점을 둘러본 뒤 창경원을 들르는 것은 당대 최고의 서울 나들이 코스였다.

일제의 패망과 6·25를 거치며 황폐화된 창경원은 1년간의 보수기간을 가진 뒤 재 개장되어 1955년 이 후에도 창경원은 구경 군을 불러 모았다. 창경원이 무려 73년의 치욕 끝에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벗 꽃나무를 과천 서울랜드로 옮겨가고 만신창이가 된 창경원은 1983년 창경궁으로 복원 되었다.

 

조선반도에 동물원 하나 세울 만한 장소가 없어서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창경원의 동물과 식물원 그리고 벗 꽃나무들이 과천으로 이사 갈 때까지 창경원이란 이름 속에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적인 존엄성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을 대부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서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울 이야기 (24) *-  (0) 2005.08.22
-* 서울 이야기 (23) *-  (0) 2005.08.05
-* 서울 이야기 (21) *-  (0) 2005.07.20
-* 서울 이야기 (20) *-  (0) 2005.07.17
-* 서울 이야기 (19) *-  (0) 200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