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23) *-

paxlee 2005. 8. 5. 23:09

 

                   덕수궁과 대한문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세조의 큰손자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들이 화재로 소실되어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宣祖)가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게 되면서 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덕수궁의 본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이란 이름은 광해군 3년(1611)당시 시어소(時御所)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르던 이곳에 처음으로 붙인 궁궐이름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덕수궁은 한때 폐궁으로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도심속에 문화재와 어우러진 휴식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석조전 본관에는 궁중유물 전시관이, 서관에는 미술관이 개관되어 문화 공간으로서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서울시내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사적 124호로 지정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인 대한문이 덕수궁의 정문이지만,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다. 모든 궁궐의 정문은 가운데 화(化)자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이 그렇고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지금 현재 서울 시청 별관 자리다.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漢門)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일제침략이 본격화 된 1905년의 을사늑약 후 1906년에 대안문(大安門)이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고 1907년에는 경운궁(慶運宮)이 덕수궁(德壽宮)으로 궁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서 대한문을 대안문으로 다시 바꾸자는 의견이 분분하다.

 

 덕수궁의 건물 배치는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궁의 중심인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선원전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이 있는 부분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거나 후문을 통해서 들어서거나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이 함녕전과 덕홍전이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이었고, 서쪽에 있는 덕홍전(德弘殿) 임금이 평상시에 사용하며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便殿)이었다. 함녕전 앞을 지나면 중화문이 나오고 안쪽으로 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있다. 중화전은 고종 광무 6(1902) 건립되었다.

 

건물은 처음 중층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진 건물로, 2층으로 조성된 월대 위에 정면 5, 측면 4칸의 규모였다. 그러나 1904 화재 재건되면서 단층 건물로 축소 되었다. 본래는 중화전을 둘러싸고 길게 행랑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어느 하나 남아있지 않다.

 

중화문 위쪽에는 광명문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각이 있다. 흥천사 동종과 자격루등이 아래에 보전되어 있는데... 건물도 본래는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것을 일제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전시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화전 왼쪽에는 덕수궁에서 가장 알려진 석조전이 있다.

 

영국인에 의해 1900년부터 10 동안에 걸쳐 지어진 석조전은 1층은 신하들의 거실, 2층은 황제의 접견실과 ,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1945 광복 직후에는 이곳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기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분수대가 있는 석조전 앞의 정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중앙의 분수대는 1937년에 조성되었다. 정전의 뒤편이자 석조전의 오른쪽에는 준명당과 즉조당이 나란히 붙어있고, 아래쪽으로 석어당이 단아한 모습으로 있다. 이중에서도 즉조당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 광해군과 순종이 즉위식을 거행한 존엄한 공간이다.

 

1897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1902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즉조당과 붙어 있는 준명당은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중화전 뒤쪽이자 즉조당의 오른쪽에 있는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2층구조로 건물이다. 그럼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마치 잘지어진 여념집마냥 가장 소박하고 친근감을 준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을 회상하며 선조(宣祖)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을 돌아 후원으로 나가면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이 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 고종· 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덕수궁 돌담 길은 덕수궁 입구에서 경향신문사로 이어지는 900m 이다.   길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담하면서 고풍 서러운 담을 따라 걷다 보면 정교함과 정겨움이 가슴을 적셔준다. 정동 보도에는 은행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살구나무가 심어져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중화전 [보물   819호]

 

좌우 행각이 사라진 조촐한 중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나 온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 비하면 단촐한 모습이지만 나름대로의 위엄이 배여있다. 중화전 내부에는 다른 정전들과 같이 일월오악병과 용상이 놓여있다. 바닥은 방전이라 하는 질흙을 구워 만든 타일이 깔려 있어 중후함을 더한다.

 

중화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지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중화전(中和殿)은 원래 2층 전각(殿閣)이었으나 대한광무(大韓光武) 8년(1904)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單層) 전각(殿閣)으로 중건(重建)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중화전은 고종황제(高宗皇帝)가 1897년에 러시아 공관(公館)으로 부터 덕수궁(德壽宮)으로 옮겨 재위(在位)하는 동안 정전(正殿)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중화전(中和殿) 앞뜰에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자리를 표시(標示)하는 품계석(品階石)이 좌우로 배열(配列)되어 있다 중화문(中和門)은 덕수궁(德壽宮)의 중문(中門)이며 중화전(中和殿)의 정문(正門)으로 1906년 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함녕전

 

함녕전은 중화전 동편에 편전인 덕홍전과 함께 자리잡은 임금님의 침전이다. 원래는 광명문이라는 정문이 행각, 부속건물과 함께 세워져 있었으나 일본에 의해 헐려 현재는 중화문 서편에 흥천사 범종과 자격루 보호각으로 남아있다. 조선왕조 침전건물로는 가장 마지막에 건축된 함녕전은 1919년 고종이 이곳에서 승하 하면서 사실상 조선 왕조의 종말이라는 비운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로 남게 되었다.

 

 덕홍전

 

덕수궁의 편전인 덕홍전은 정면이 3칸,측면이 4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구조를 하고 있다. 출입문 역시 서구식으로 되어있어 1890년대
당시 새롭게 유입된 서구식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함녕전과 덕홍전의 동,남 행각은 전시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1960-1970년대에는 국화
전시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석어당

 

1593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선왕들을 회상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인목대비의 유폐처가 되기도 했다. 궁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2층 건물로 1층 마루 안쪽을 들여다 보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목조 건물 특유의 소박함과 다정함이 일품인 현재의 석어당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한 것이다.

 

즉조당

 

준명당과 두칸의 다락행랑으로 이어진 전각으로 순종이 황제 자리에 등극한 곳이기도 하다. 광무 원년에는 태극전이라 불렀다가 다시 중화전으로 바꾸어 불렀는데 후에 정전으로 중화전이 신축되면서 본래의 이름, 즉조당으로 환원하였다. 준명당은 정면이 6칸이고 후면이 'ㄱ'자로 꺽여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즉조당 재건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전

 

정부 재정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만든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딩이 설계를 맡고 건축기사 심의석이 감독하였다.
1901년 기초공사가 마무리 된 이후 1906년 완공되었다. 현재는 궁중유물 전시관으로 개관되어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사실상 60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공사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쓰라린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은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체계화하여 근대미술에 나타난 미의식과 역사관을 정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근대미술의 조사 · 연구, 근대미술 관련 기획전 및 소장품 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 학술활동과 출판, 근대미술 관련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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