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25) *-

paxlee 2005. 8. 29. 23:17

 

                –* 운현궁은 대원군 정치의 중심이었다.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왕 이상의 결정권을 행사하였던 곳이 운현궁 이므로 이 운현궁에 대한 이야기를 일별해 보고자 한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약 10년 동안 실권을 쥐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입안했던 곳이다.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사적 제257호)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고,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 이다.

 

사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생부인 대원군은 14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16대 인조의 생부인 정원대원군(얼마 후 원종으로 추숭됨), 그리고 25대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들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흥선대원군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대원군이 된 특이한 경우이다.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里)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의 대문이 있었다.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중에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는데,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대원군이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 이다. 흥선대원군이 되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 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안동 김씨들의 실권이 워낙 기세 등등하여 똑똑한 왕족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역모라는 이름 하에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희생된 것이 이하전 이라는 왕실 종친이었고, 이런 광경을 접한 대원군은 일부러 안동 김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1863년 25대 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신정대비 조씨 (추존왕 익종의 부인으로 24대 헌종의 어머니)는 그 당시 전횡을 일삼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흥선군과 밀약하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옹립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높이도록 하고 한동안 쥐고 있던 실권을 대원군에게 넘겨 주었다.

 

안동 김씨들은 반대하고 나섰지만 대비 조씨의 뜻이 워낙 강한 나머지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실권을 쥐게 되었고 그간 순조 이래로 전횡을 일삼아 오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 정권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핍박을 받았던 흥선대원군은 그 나름대로의 웅대한 포부를 숨겨오고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우선 안동 김씨들을 대거 내 쫓고 재야에 숨어 있던 인재들을 각 당파에 상관없이 대거 발탁한다. 아울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기 위해 양반들에게도 호포를 내도록 했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바로 이러한 대원군의 웅대한 개혁 정치의 중심에는 바로 그의 사저인 운현궁이 있었다.

 

운현궁은 이러한 대원군의 개혁정치의 본산으로서, 개혁정책 이외에도 경복궁 중건, 쇄국정책과 병인-신미년의 두 차례 양요, 서원철폐와 같은 국가 중대사도 바로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대원군의 10년 섭정 동안 운현궁은 대원군 정치의 중심으로서 궁궐과 수시로 통하는 문이 생겼을 정도로 절정기를 누볐다.

 

10년 집권 후 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 선포로 운현궁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73년, 만 21세의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운현궁이나 석파정등에서 은둔하며 재집권과 재실각을 되풀이하며 직 간접적으로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쳐 격동과 혼란으로 점철된 우리 근대사를 지켜보게 된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 하였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고종의 친정 이후 대원군의 운현궁도 점차 위용을 잃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 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관리유지가 힘들었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 집권하고서부터 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 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 7.23 - 11. 22)이었다. 이 경우 대원군의 재집권 배경과 계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의 쇄국정책은 재집권할 당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오군란 수습조건으로 일본이 부당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을 때, 또 조선정부가 양보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중재한 청에 대해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강온 양면 정책이었다.

 

일본의 무례한 요구에 대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책을 썼는가 하면 한편으로 시일을 지체하면서 청과의 협조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도 구사하였으나 청의 중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외정책이 명분보다 실용주의 방향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당시 재집권할 때였다.

 

일제에 의해 한동안 운현궁은 몰수 상태에 있었다 해방 직후 운현궁 후손들에 의해 다시 반환되었다가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후손 대표인 이청씨가 양도의사를 밝힘에 따라 국가, 즉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앞서 서술한 노안당이나 노락당, 그리고 이로당 이외에도 운현궁 안팍이 빽빽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숱한 파괴와 훼손으로 그나마 제대로 남아 있지 못했던 것을 서울시에서 매입한 즉시 복원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 : 문화기행 ‘풍경과 상처’/ 서울 6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