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마당[5] (32)

paxlee 2005. 11. 2. 22:55

 

 

현대의 박물관(museum)지식의 증대, 문화재와 자연물의 보호와 교육 그리고 문화의 발전을 목적으로 자연계와 인류의 대표적 유산들을 수집, 보존, 전달 및 전시하는 기관이라고 정의된다. 초기 ‘박물관’ 이라는 용어(불어로 musée, 영어와 독어의 museum)는 ‘뮤제의 집’ 혹은 ‘뮤즈에 헌납된 사원’을 의미했던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된 무제이온(museion)에서 유래했다.

이 곳은 일종의 연구, 교육센터로 도서관 외에 천체 관측소와 다양한 연구 및 교육시설, 그리고 모든 분야의 수집품을 보유하고 있다. 로마시대 이후 무제이온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박물관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 곳은 수도원의 ‘보고’였다. 중세의 사원박물관은 귀족이나 부호의 후원 아래 고대로부터 전해진 유물과 기독교 성물을 중심으로 진기한 것을 수집하는 곳이었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박물관의 개념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4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과거의 유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면서, 인문주의자들은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성경의 필사본, 조각품, 동전, 메달, 건물의 파편 등을 새롭게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부호와 권력자들이 고대의 예술작품을 수집하고 후원하면서 전시가 급증했고, 지금의 의미와 가까운 ‘박물관’(museum)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르네상스 시대 후원과 수집에서 가장 앞선 가문은 금융업으로 성장해 도시국가 피렌체의 권력을 거머쥔 메디치 가문이었다. ‘구 코시모’라고 불렸던 코시모 데 메디치에서 교황 레오 10세를 거쳐 피렌체 공화정을 종식시킨 코시모 1세에 이르기까지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문화적 위업은 서구 근대의 고고학 박물관이나 문화사 박물관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예술품이나 문화재를 이용해 정치적 권력, 혹은 국력을 과시하려는 모습은 비단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일례로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라는 책 제목에서 보이듯이 전쟁기간 동안 많은 국가들은 문화재를 약탈 하였다. 이에 대해서 인류학자 키스 니클린은 문화재 약탈 행위를 ‘강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른 채 박물관을 방문한 관람객은 아름다운 박물관과 방대한 소장품에 압도당하곤 한다. 하지만 프랑스나 영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소장품의 대부분이 전리품이거나 식민지에서 불법 반출한 문화재라는 사실에 관람객을 무척 놀라게 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제 3세계를 비롯한 신생 독립국이 자국의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문화재 반환과 보상 문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문화 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신생 독립국이나 식민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약탈된 자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라는 요청만을 거듭 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남의 물건은 돌려주지 않은 채 자신의 물건만을 찾는 모습이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서 자신의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목적에서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국가 사이의 알력을 ‘제3차 세계대전’이나 ‘문화전쟁’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박물관이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기관인 만큼 국가는 대중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달해 국가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 부호들의 전유물이었던 전시물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으로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행사와 함께 대규모의 대 박람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 박람회의 결과물인 사우스켄싱턴 박물관(현재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이다.

사우스켄싱턴 박물관 설립을 기획한 헨리 콜은 디자인 학교에서 보였던 교육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박물관의 관람대상도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자까지 확대했다. 이는 헨리 콜이 주장한 “박물관은 더 이상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어른들을 위한 인상적인 교실”이 될 것이라는 목적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소비자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생산자를 교육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그의 의도를 함의하고 있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의 ‘신(新)개념’이다. 800석 규모의 전문 공연장을 같은 건물 안에 설치해 ‘박물관’과 ‘극장’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런 형태의 박물관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전통적인 박물관은 역사 유물을 시대별로 모아 놓은 엄숙하고 단조로운 분위기였다. 새 박물관 운영 전략은 박물관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극장의 들뜬 분위기와 조화시켜 활성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 계단에서 <경천사 10층 석탑>을 내려다 봐요.  ⓒ

 

 

국립중앙박물관의 와관은 서양의 화려함과 달리 물과 성벽의 조화, 극도의 단순함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건축가 박승홍씨가 “어떻게 하면 한국적일 수 있을까. 우리의 선조들이라면 과연 어떻게 설계했을까. 그런 질문 앞에서 수없이 고심했다고 한다. 그는 영주 부석사에 가서 그 곳에서 자연미를 살린 질감과 독특한 공간배치, 크고 작은 돌들이 어우러져 펼쳐 보이는 절묘한 조화에 감동했어요” 라고 말한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세히 국립 중앙박물관의 내부를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박물관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문화는 그 나라를 이끈 경쟁력 중 하나이고, 문화재가 전시된 박물관은 경쟁력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눈의 즐거움만을 생각하면서 전시를 관람하기보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선조들의 숨결과 또 다른 의미를 되새기면서 박물관 여행을 시작해 보아야 한다.  

출처 :   blog.chosun.com/smpjsh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