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4] *-

paxlee 2007. 4. 28. 13:44
에베레스트에 대하여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중국(티벳)의 국경을 이룬 에베레스트의 위치가 처음 확인된 것은 1848년이다.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측량사업을 벌이던 중 지도상에 에베레스트의 위치를 확인하고, 'Peak b'로 명명 하였다. 당시의 높이는 약 110마일 떨어진 인도의 뱅골평야에서 측향한 것으로 해발 30,200피트, 즉 9,000m가 넘었다. 이후 1852년 인도 삼각법 측량대는 이 산의 높이를 8,848m 로 확인하고 세계 최고봉으로 인정하였다.


네팔명 사가르마타, 티벳명 초모룽마

 


1854년 'Peak b'에서 'Peak 15'로 이름이 바뀐 에베레스트는 이태 뒤 해발 8,840m(29,002피트) 높이의 세계 최고봉이라 결론지어지고, 1865년에는 처음 측량 당시 측량국 우두머리인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경의 이름을 산명으로 삼게 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Sagarmata), 티벳쪽에서는 대지의 여신이라는 의미의 초모룽마(Chomolunma)로 불러오던 산명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이 이름이 정해진 것이다. 네팔과 티벳은 각기 고유 지명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인류의 발길이 닿은 것은 1953년 영국 원정대가 처음이지만, 한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영국은 1921년 첫 도전 이후 1953년 초등을 이룩하기까지 8차례의 등반대를 파견해야 했고, 그 사이 셰르파 9명과 대원 3명을 잃었다. 여기에 1934년 단독등반에 나섰다가 이듬해 노스콜 아래서 시신이 발견된 모리스 윌슨, 1952년 가을 시즌 스위스 팀에 참가했다가 낙빙에 맞아 사망한 밍마 도르제 셰르파까지 합치면 초등이 이뤄지기까지 모두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의 에베레스트 도전은 네팔이 아닌 티벳쪽에서 시작됐다. 이는 쇄국정책을 펴오던 두 나라 가운데 티벳이 먼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티벳쪽에서 7차례나 고배를 마셔야했고, 1950년 중국이 점령한 이후 티벳쪽 등반이 금지되자 그 해부터 문호를 개방한 네팔로 방향을 틀었다. 1951년 네팔 쪽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찰한 영국 원정대는 이듬해 1952년 봄 시즌과 가을 시즌 등반허가를 스위스 원정대가 미리 받아놓는 바람에 스위스대의 등반을 초조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에베레스트 등반 시즌은 봄·가을로 당시에는 한 시즌 당 한 팀밖에 허가해주지 않았다. 네팔 관광성의 이러한 룰은 1992년까지 42년간 이어졌다.

 

32년간의 긴 세월 끝에 1953년 5월29일 영국팀 초등정

 


 

1952년 스위스 원정대는 사우스콜(약 8,000m)에 제6캠프를 설치하고 남동릉 상 해발 8,382m지점에 제7캠프를 설치한 다음 침낭과 버너도 없이 추위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텐징 노르게이와 레이몬드 램버트가 산소를 이용하면서 등정길에 나섰으나 남봉 아래 8,595m 지점에서 포기해야 했다. 1924년 티벳쪽으로 등반한 영국팀 노튼의 기록을 25m 상회하는 기록이었다. 텐징 노르게이가 사다(셰르파의 우두머리)로 참가한 스위스대의 가을 시즌 등반에서도 불운은 계속됐다.

 

제네바스퍼 대신 로체 페이스로 밀어붙이던 중 밍마 도르제 셰르파가 낙빙에 맞아 목숨을 잃는가 하면, 로프가 풀리면서 대원들이 180m 아래 바닥까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등반대로서는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스위스대는 겨울 시즌이 다가오면서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1953년 5월29일 영국팀의 이룩한 에베레스트 초등정은 이렇듯 수많은 등반대의 시도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영국팀은 5,6,7차 원정과 47년 캐나다인 등반, 그리고 한 해 전에 스위스 팀의 봄·가을 시즌 원정 등 6차례나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텐징 노르게이를 사다로 삼았다. 당시로서는 네팔쪽 에베레스트를 텐징만큼 잘 알고 그 만큼 가장 높이 오른 이는 없었기에 영국팀으로서는 텐징을 사다로 끌어들이느냐 못들이느냐는 것은 등반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1차 등정의 기회는 에반스(R. C. Evans)와 보딜런(T. Bourdillon)에게 주어졌다. 5월26일 폐회로식 산소통을 메고 제9캠프(8,500m)를 출발한 두 사람은 오후 1시경 남봉(8,770m) 위에 올라섰으나, 시간 부족과 강풍, 그리고 산소 부족으로 등정을 포기해야 했다. 이어 등정의 기회를 잡은 제2차 공격조 힐러리와 텐징은 개회로식 산소통을 메고 5월29일 오전 6시30분경 제9캠프를 출발, 오전 9시 정각 남봉 정상에 거쳐 칼날 설릉을 따르다 12m 길이의 힐러리스텝을 돌파하고, 오전 11시30분경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에베레스트 정상이 인류에게 등정을 허용한 것은 1921년 첫 등반 이후 32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1977년 9월15일 고상돈 한국 초등정

 


 

한국인의 에베레스 등정은 1977년 9월15일 고상돈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1975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에베레스트 지역 정찰을 마친 대한산악연맹은 1977년 6월 원정대를 파견한다. 당시 대산련 회장이자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김영도 대장 외에 장문삼 등반대장, 박상열 등반부대장 등, 15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원정대였다. 13번째 국가, 44번째 팀으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대한산악연맹팀은 영국팀의 초등 루트인 남동릉 투트를 등반로로 택했다.

 

당시까지는 에베레스트에 남동릉 루트 외에 서릉, 남서벽, 북릉~북동릉 루트가 나 있었다(현재는 변형루트에 이르기까지 20개가 넘는다). 9월8일 남동릉 8,510m 지점에 제5캠프를 설치한 대산련 팀의 박상열 등반부대장과 앙 푸르바 셰르파는 첫 번째 등정을 시도했다. 인공산소를 마시며 새벽 6시30분 캠프를 출발한 두 사람은 깊은 눈에 뜻밖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오후 1시50분경 남봉(8,763m)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정상을 향해 계속 전진했으나 해발 8,800m 높이의 힐러리스텝(급경사의 설릉 구간으로 남동릉에서 최난 구간으로 꼽힘)을 올라섰을 때는 산소가 바닥나고 말았다. 불과 100m 거리에 정상을 두고 있었으나 살기 위해서는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탈진한 두 사람은 남봉으로 겨우 돌아와 데포해 놓았던 산소통을 발견했으나, 밸브를 열 기력조차 없었다. 8600m 지점에 내려섰을 때는 셰르파가 하산을 포기하고 드러눕고 말았다.

 

거의 탈진 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하룻밤을 버틴 두 사람은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다시 하산을 시작해 200m 아래의 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의 비박은 등반사상 가장 높은 지점에서의 비박 기록이었다(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최초 완등자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기록으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전한다).

 


 

 

 

2차 공격은 9월15일 시도되었다. 고상돈 대원과 펨바 노르부 셰르파는 오전 5시30분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1차 공격조가 만들어놓은 발자국 덕분에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을 거듭한 끝에 9시30분, 1차 공격조에 비해 3시간20분이나 빠른 시간에 남봉을 통과했고, 힐러리스텝을 넘어 낮 12시50분 마침내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시작한지 36일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되었고, 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에베레스트에 2,558명 등정, 199명 사망

 


 

이후 9개 팀이 도전, 19명이 등정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총 55개 팀이 도전, 31개 팀에서 76명의 등정자(2회 이상 중복자 포함)가 탄생했다. 그중 허영호는 동계 시즌 세계2등과 티벳~네팔 횡단등반을, 경남연맹팀은 남서벽 한국초등을, 엄홍길은 3회 등정을, 박영석은 무산소 등정과 티벳~네팔 횡단등반의 기록을 남겼다. 여성산악인으로는 93년 대산련 원정대의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과 2003년 오은선, 2006년 곽정혜 등 5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이러한 등정 기록과 함께 한국산악인은 90년 첫 인명사고 이후로 2004년 계명대학교 원정대의 백준호·박무택·장민 세 대원에 이르기까지 7명이 등반중 목숨을 잃었고, 등반 도우미인 셰르파도 4명 사망했다.

 


 

 

 

지난해까지 에베레스트에서 등정자는 대원 1,532명, 고용인 1,026명이며, 등정자를 배출한 나라는 91개국으로 네팔 1,033명(대원 45, 셰르파 988), 미국 301명, 일본 125명, 중국 104명(대원 72, 고용인 32), 영국 96명, 인도 83명(대원 77, 고용인 6) 순이며 한국은 76명으로 7번째로 많은 등정자가 나왔다.

등반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대원과 셰르파는 총 199명(대원 129, 셰르파 70)으로 국가별로 보면, 네팔인이 68명으로 가장 많고, 영국 15명, 일본 14명, 인도 13명 순이다.

<부산 2006 에베레스트 원정대 보고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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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팀 구성
단장 최홍건 / 64세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총장
한국산악회 회장
대장 김성봉 / 66세

한국산악회 부회장
마운틴티브 대표

"꼭 성공해서 투병중인 아내와
행복하게 살겠다"

대원 차재현 / 75세

한산 경기지부 명예회장

"큰 형님의 연륜과 열정을
지켜봐라"

대원 조광현 / 67세

해군 UDT·SEAL 전우회 회장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해군 UDT를 대표해
부끄럼 없는 등정을 하겠다"

대원 이충호 / 64세

서울증권 지점장 퇴임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후회 없이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겠다"

대원 천병태 / 50세

인산트레이딩 이사
인하대학교산악회 회장
대원 이창기 / 54세

태양에스티 대표이사
한국산악회 재무이사
부단장 김종호 / 53세

시스옵엔지니어링 대표이사
고려대학교 산악회 회장
부대장 김상홍 / 60세

계명대 산악부 지도교수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등정만
남았다"

대원 이남진 / 69세

인천 지방공무원 퇴임

"실버 세대들의 사기를 위해서
라도 기필코 정상에 서겠다"

대원 박승언 / 66세

인천 남동구 총무국장 퇴임
인천오팔산악회

"꼭 성공해서 나중에
1000m 이상 되는 산에서
칠순잔치를 하겠다"

대원 이장우 / 63세

대구거목산악회 고문
대원 유학재 / 47세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전문과정장
대원 이재승 / 64세

연세대학교의과대학 교수
대한소아과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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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일정표

 

2007년

3월 19일                  선발대 출국 (Seoul - Kathhmandu)
3월 26일                  본대 출굴
3월 27일 - 4월 1일   물품구입 및 행정수속

 

4월 2일 - 12일         상행 카라반 (Lukla - BC)
4월 13일 - 17일        Base Camp 설치 (5,400m)
4월 24일                 C1 (5,940m) 설치
4월 28일                 C2 (6,500m) 설치

 

5월 5일                   C3 (7,320ㅡ) 설치
5월 10일                 C4 (7,925ㅡ) 설치
5월 12일                 1차 정상공격 (1st attack)
5월 15일                 2차 정상공격 (2st attack)
5월 23일                 3차 정상공격 (3st attack)
5월 23일 - 28일       C4 -BC
5월 29 - 6월 3일      하행 카라반 (BC - Lukla - Kathmandu)

 

6월 5일                   귀국 (Kathmandu -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