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5] *-

paxlee 2007. 5. 1. 17:37

 

               실버대원 5명, 제1캠프에 무사히 안착

 

                   ▲ 제1캠프로 향하는 실버 대원들.

 

15일 오후 3시, 베이스캠프(5300m)를 출발한 지 9시간만에 제1캠프(6000m)에 도착한 1조는 몸은 녹초가 된 상태지만 마음은 한층 더 높은 곳에 가 있었다. 이것은 역시 세계 최고봉을 오르고자 하는 열정 때문일 게다. 제1캠프까지 이어지는 아이스폴은 역시 대단했다. 아이스폴은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 3개 봉이 U자형을 이룬 빙하계곡의 입구다. 따라서 3개 거봉에서 형성된 빙하가 밀려나오는 출구인 셈이고, 거대한 빙하가 좁은 골짜기로 빠져나오면서 깨지고 무너지면서 수많은 빙탑과 크레바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원정대들은 이 아이스폴에 크레바스와 빙탑을 우회하거나 사다리를 설치하면서 길을 뚫었으나 90년대 중반부터 셰르파로 이루어진 원정대가 루트를 뚫고 그 대가로 팀당 3000달러씩 받고 있다. 현재 크레바스와 빙탑 약 30여 개소에 사다리가 60개 정도 설치되어 있는데, 한낮에 강열한 햇살에 빙탑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거의 매일 보수를 해야 하고 길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세월을 느끼겠네요”

동트기 전까지 차가운 냉기는 대원들의 열정을 꽁꽁 얼려버릴 것 같았다. 9시경 해가 아이스폴에 스며들 무렵이 되자 빙탑과 얼음 눈덩이들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용기와 열정을 북돋아 주었다

 


    ▲ 아이스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빙탑 위의 설원을 걷고 있는 대원들

 

“주마 걸지 말고 카라비나를 통과시키시라니까요.”
실버팀은 2개조로 나뉘어 15일과 16일 제1캠프(6000m)로 향했다. 유학재 지원대원의 인솔 하에 김성봉 대장, 이남진, 조광현, 이장우 대원, 이재승 의료담당 대원, 촬영담당 셰르파, 기자로 이루어진 1조는 15일 새벽 6시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1조를 인솔하는 유학재 지원대원의 목은 출발 직후부터 쇳소리가 났다.

 

실버 대원들은 체력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으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대다수가 아마추어 수준이다. 그런데다 매사 워낙 조심스럽다 보니 필요 이상 안전에 신경을 쓰고 그로 인해 속도가 점점 늦어지자 유학재 지원대원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고산에서 지나치게 오랜 시간 등반을 하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원 한 명 한 명 사회적 경륜이나 체력 등 자타가 공인할 만큼 뛰어나기에 고집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등반은 혼자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보니 서로 돕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특히 폭이 10m가 넘는 크레바스에 걸쳐진 사다리를 건널 때는 앞사람이나 뒷사람이 줄을 잡아당겨주어야 균형을 잃지 않고 건널 수 있고, 그런 협동이 이루어지는 사이 대원들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 개미굴을 연상케 하는 아이스폴 지대.
 
“아니 아직도 여기밖에 못 오면 언제 제1캠프까지 가실려고 해요.”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남서벽 원정대의 박영석 대장은 정오경 유학재 대원을 만나자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로부터 10분쯤 지나자 이번에는 한국도로공사 원정대원들이 또다시 비슷한 반응을 나타낸다. 그러자 실버대원들은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구만” 하면서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크레바스를 우회하며 길이 나 있다 보니 갈지자로 운행하는 구간이 많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눈밭을, 그것도 해발 6000m 가까운 높이의 빙하를 걷는다는 것은 제 아무리 체력이 강한 이들일지라도 인내심 테스트나 다름없다. 노익장들의 인내심은 역시 대단했다. 1조 김성봉 대장과 조광현, 이장우 대원, 그리고 의료담당 대원이지만 같은 실버 세대인 이재승 박사(63 연대 의대 교수)는 막판에 수없이 이어지는 눈언덕을 넘고 넘어 제1캠프에 오후 3시경 무사히 안착했다.

 

삼계탕 2봉을 터뜨려 코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전원 고소증세가 없는 듯했다. 식사후 텐트 2동에 세 명씩 나누어 들어가자 실버대원들의 텐트는 곧 조용해진다. 9시간의 산행이 이들을 깊은 잠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산악계에서 바지런하기로 소문난 유학재 지원대원은 식사 후 텐트 뒤편으로 가서 눈보라 속에서 열심히 눈구덩이를 파고 주변을 눈벽돌을 빙 둘러쌓아 화장실을 만든다. 유학재 대원은 지금은 실버대원들을 도와주는 위치지만 25년이 넘는 산행 경력에 미국 데날리 국립공원 내의 키차트나스파이어와 파키스탄의 가셔브룸4봉에 신 루트를 낸 바 있고, 얼마 전에는 에베레스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콩데라는 봉도 오른 바 있는 베테랑 클라이머다.


제2캠프로 향해

 

16일은 고소적응을 위해 제2캠프(6500m)를 향해 갈 수 있는 만큼 가보기로 하고 새벽 6시 제1캠프를 떠났다. 그런데 시작부터 만만찮다. 눈 언덕 사이의 골로 뚝 떨어졌다 다시 눈언덕으로 올라설 때는 절벽 같은 설벽을 올려쳐야 했고, 눈언덕에 올라서면 갈지자로 이어지는 눈길에 혀가 빠질 정도였다. 춥기는 왜 그리 추운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손가락이 아려왔다.

 

그래도 대원들의 인내심은 역시 대단했다. 오전 8시30분경 크레바스 지대를 벗어나자 실버 팀의 등반로가 이어지는 로체 서벽까지 깨끗이 뻗은 대설원이 펼쳐졌다. 여기서 1시간 반 더 가면 제2캠프다. 하지만 유학재 대원은 하산길을 생각해 이 지점에서 뒤돌아서기로 결정한다.

 


             ▲ 아이스폴

 

1시간20분만에 제1캠프로 내려섰지만 벌써 지친 상태다. 오늘 올라올 2조를 생각해 어지럽힌 텐트 안을 정리하고 매트리스와 침낭을 꺼내 말리고 그 사이 ‘아점(아침 겸 점심)’을 해먹는다. 메뉴는 전과 동으로 삼계탕이다. 11시40분, 베이스캠프를 향해 하산이다. 대원 한 명은 초반에 포기했다는 무전이 날아온다. 1조 역시 대원 1명이 초반에 코피를 흘리고 걸음이 점점 늦어져 중도 포기했다.


정오를 넘어서면서 아이스폴은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새벽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15kg 안팎의 짐을 제2캠프에 올려놓고 내려오는 셰르파들은 굼벵이처럼 걸어가는 대원들을 만나면 쏜살같이 추월해 버린다. 몇 차례 그런 상황을 겪자 셰르파들이 가까이 따라붙으면 대원들은 아예 양보해준다. 오후 1시경 2조와 만났다. 김종호 부단장과 천병태 지원대원의 인솔하에 김상홍 부대장과 이충호 대원이 깊게 파인 크레바스 위쪽 눈밭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제1캠프까지 거리로는 3분의 2 지점이지만 이쯤이면 지친 상태이기 십상이고, 한낮의 열기는 더욱 기승을 부리기에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김종호 부단장은 85년 동계시즌에 에베레스트 8500m지점까지 오른 데다 95년에는 고려대 원정대를 이끌고 티베트 쪽으로 등반해 대원 1명이 정상에 올라서게 한 바 있고, 천병태 지원대원은 2004년 인하대 원정대 대장으로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바 있어 실버 대원 2명을 인솔하는 데는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된다.

 


    ▲ 빙탑이 무너지면서 형성된 크레바스에 설치된 사다리를 건너고 있다.

 

하산길이 걱정돼 2조와 오랜 시간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고 베이스캠프로 향한다. 크레바스에 걸쳐진 다리는 눈이 녹아내리면서 불안한 상태로 변하고, 거기에 대원들의 다리는 점점 풀려가기에 긴장의 강도는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한 명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힘들다’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한 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점점 고도가 낮아지면서 오른쪽 사면으로 눈이 간다. 이틀 전 눈표범(Snow Leopard) 한 쌍이 뛰어다니면서 낙석을 유발시켜 베이스캠프 일원의 놀라게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이 지금 벌어진다면 풀린 다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해서 하는 기대다.
베이스캠프가 점점 가까워온다. 그와 비례해 아이스폴은 점점 녹아내리고, 발밑은 질척거린다. 그래도 캠프로 돌아간다는 마음에 모두들 얼굴색이 밝아온다.

 


       ▲ 제1캠프로 향하는 2조와 하산중인 2조가 아이스폴에서 기념촬영.


오후 3시40분 전원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온다. 이남진 대원과 박승언 대원이 대원들에게 다가오더니 눈물 글썽한 표정으로 와락 껴안는다. 단 하룻밤 떨어져 잤을 뿐인데 수십 년만에 만난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 기분이다. 실버원정대원들은 척박한 히말라야에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2조 대원들 역시 1조와 비슷한 시각에 제1캠프에 도착했고, 이튿날 17일은 1조에 비해 30분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무전이 전해지고 있다.

 


            ▲ 남서벽 원정대(대장 박영석)의 라마제에 참석 후 기념촬영.

 


   ▲ 크레바스에 빠진 이남진 대원이 지원대원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 크레바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원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 실버 대원들은 너무 힘이 들자 세월을 실감했다고 털어놓았다

 


  ▲ 아이스폴 지대에는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빙탑이 곳곳에 있다.

 


                         ▲ 수직 빙탑을 주마링하는 김성봉 대장.

 


 ▲ 에베레스트와 눕체 사이의 빙하지대. 아직도 앞에 보이는 것 같은 눈언덕을

    여럿 넘어야 제1캠프가 나온다.

 


                ▲ 제1캠프. 텐트 2동에 3명씩 나누어 지낸다.

 


                             ▲ 아이스폴.

 


                  ▲ 제1캠프와 제2캠프 사이의 설원에서 기념촬영.

 

/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에서(070418)=한필석 월간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