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이야기

-* 소나무를 찾아서 2. *-

paxlee 2007. 8. 3. 08:04

 

                     -* 소나무를 찾아서 *-

1. '대관령 솔숲'

문화일보는 위기의 소나무 숲을 지키기 위해 기획시리즈 ‘소나무를 찾아서’를 매주 목요일 연재한다. 이번 기획은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전영우교수와 중견 한국화가 이호신화백이 전국의 소나무 숲을 직접 찾아 소나무의 생태•경제•경관적 가치와 함께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관련된 문화현상, 특히 우리의 문화, 민속, 예술 속에 녹아들어 있는 소나무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킬 예정이다.

조선의 궁궐들은 오직 소나무로 지어졌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도 이어져 경복궁의 복원공사에는 여전히 소나무만이 재목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다. 이 땅의 나무들 중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고 가장 강한 으뜸 소나무 목재는 조선 왕조로 하여금 이 지구상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소나무 보호 정책을 500여년동안 시행하게끔 만들었다.

해, 달, 구름, 산, 내, 거북, 학, 사슴, 불로초와 더불어 소나무는 장생을 염원했던,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우리 조상들이 늘 곁에 두고 아껴왔던 생명의 나무였다. 지조와 절개,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민족적 정서로 승화된 상징성은 그래서 소나무를 민족수(民族樹)라 부르며, 우리 문화를 나무와 관련지어 흔히 소나무 문화라고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동과 영서 지방을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인 대관령에 올라앉아 동쪽으로 바라보면 강릉시와 동해가 한눈에 보이고, 발 아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융단처럼 펼쳐진다.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일대이며, 솔숲은 대관령 옛길을 따라 해발 841m의 제왕산까지 400ha에 걸쳐 펼쳐져 있다.

눈앞에는 지금껏 보아왔던 볼품 없이 왜소하고 굽은 소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소나무들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강한 북서풍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쉽지 않았지만,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쭉쭉 곧은 모습으로 세찬 북서풍에 당당히 맞선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풍광이었다. 어느 한 소나무도 굽은 나무가 없는 그 자태가 놀라웠다.

이 솔숲은 1988년 전국 최초의 자연 휴양림으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고, 지난 10여 년 사이에 ‘한국의 3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나 ‘22세기를 위해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이란 영예도 얻었다. 익히 알려진 이런 상찬과는 별개로 이 솔숲의 숨은 진가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이 솔숲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나무 숲은 사람이 직접 만든 숲이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산림청의 기록에는 정확히 1922년부터 1928년 사이에 사람이 일일이 직접 솔씨를 뿌려 숲을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 임업기술이 발달된 오늘날도 종자를 직접 임지에 뿌려서 만든 숲은 흔하지 않다. 그런데 80여 년 전에 묘목도 아닌 종자를 뿌려서 이렇게 멋진 솔숲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늘날 이 솔숲은 평균 수령 77년, 나무높이 17m, 가슴높이 직경 36㎝, ha당 축적 250㎥로 임업선진국 못지 않은 축적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20여년을 더 키우면 수고 26m, 직경 56㎝, 한 그루 당 재적이 2.44㎥에 달해 현 시세로 그루 당 70여만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관령 솔숲과는 달리 우리 소나무가 당면한 현실은 썩 밝지 못하다. 한때 산림의 60% 이상을 차지하던 이 땅의 소나무 숲은 솔잎혹파리, 소나무 재선충, 산불 및 수종 갱신 등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은 산림의 32%만이 소나무 숲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기존의 소나무 장령림에는 대를 이어갈 어린 소나무들이 잘 자라지도 않는 현실이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앞으로 100년 뒤에는 이 땅에서 소나무를 볼 수 없으리라는 예측도 있다. 수백만 년 이 땅을 지켜온 소나무들로서는 엄청난 시련이고 수난이다. 대관령 솔숲은 점차 쇠잔해 가는 이 땅의 소나무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의지에 따라 적절한 기술을 바르게 적용하면 훌륭한 솔숲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숲의 숨은 진가는 또 있다. 산림청에서 브랜드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문화재 복원용 대경재 생산기지’가 그것이다. 곧고 굵은 소나무 대경재의 확보는 고건축 문화재의 보수나 천년 궁궐의 복원에 필수적이다. 어제의 세대가 만든 민족문화유산이 오늘의 세대 손으로 보수 복원되어 다시 내일의 세대로 이어지는 그 중심에는 이처럼 소나무가 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 대관령의 솔숲은 더 이상 평범한 솔숲이 아니다.

어제의 세대가 심고, 오늘의 세대가 가꾸고 이용한 덕분에, 내일의 세대로 민족의 문화유산이 면면히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나무를 왜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보고자 한다.

2. 삼척 준경릉 솔숲

정이품송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나무다. 특히 1464년 세조가 이 나무 아래를 지날 때 가지를 스스로 쳐들어 그 행차를 도왔다고 해서 오늘날 장관급 벼슬인 정이품이 주어졌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나무를 사람처럼 인식한 조상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600살이나 먹은 노쇠한 정이품송은 지난 20여년 동안 솔잎혹파리와 응애의 피해를 받아 수세(樹勢)가 점차 약해지고 아래 가지 세 개가 꺾여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정이품송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가장 좋은 미인송을 선발하여 정이품송의 혈통을 보존하고 그 명맥을 이어나아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산림청 관계자들은 정이품송과 교배를 하여 전통을 이어나갈 미인송을 삼척의 준경림에서 발견하여 삼척시장과 보은군수가 삼척 준경릉의 미인송의 암꽃 머리위의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붓끝으로 묻혔다. 2001년 5월 8일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릉에서 한국 제일의 미인소나무에게 장가든 정이품송의 혼례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이유보다는 숨은 배경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 같다. 그것은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을 사실처럼 믿는 국민의 정서를 자극하여 점차 사라져가는 소나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으면 하는 산림당국의 염원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찬 아침 공기는 푸른 솔숲이 내뿜는 서기로 충만했다. 세태에 찌든 심신을 그 서기로 정화하려는 듯 솔숲사이로 난 오솔길을 말없이 걸었다. 준경릉에 당도한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한국 제일의 미인송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하고 있었다. 깊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침 햇살 속에 자태를 나타낸 미인송은 마치 수호신장처럼 준경릉을 지키고 있었다.

박희진 시인은 준령릉의 소나무 숲을 이렇게 노래한다.


“준경묘 본 뒤 뇌리엔 자나깨나 금강 長松林(장솔림)
 나 못잊겠네 죽죽 뻗은 그 자태 하늘 향하여
 백년 또 백년 오로지 上昇(상승) 한 길 神松(신송)될밖에
 하늘 땅 솔이 합심해 이룩해낸 神聖(신성)의 영역
 상상만 해도 고개가 숙여지네 반만년 老松.(노송)”

준경릉의 소나무들이 곧고 우람한 모습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태조의 5대조인 양무 장군의 묘를 모신 장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권은 막강했다. 그 왕권을 상징하는 왕릉 주변은 화전, 벌채, 입장, 개간 등 산림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가 지난 500여년간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 결과 본래의 우량한 형질을 그대로 보전할 수 있었다. 그밖에 오지에 자리잡은 준경릉의 위치도 소나무의 형질보전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준경릉의 소나무는 우리 토종 소나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3. 충남 서해안 솔숲

우리 문화를 나무와 관련지어 흔히 ‘소나무 문화’라 일컫는다.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서 소나무와 살다가 뒷산 솔밭에 묻힌다’는 이야기는 소나무에 의존했던 농경문화의 특징을 함축하는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솔가지를 금줄에 끼워 잡인의 출입을 막으면서 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로 만든 가구와 농기구를 사용하다가, 생을 마감하면 뒷산 솔밭에 묻혔다. 소나무에 의존한 우리네 농경시대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오늘날도 회자되고 있는 셈이다.

소나무는 침엽수 중에 가장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왔던 나무다. 소나무류는 이 땅에 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출현했다. 구석기문화를 싹틔운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약 100만년 전임을 감안하면 소나무류는 장구한 세월동안 이 땅을 지킨 터줏대감인 셈이다. 소나무류 외에 지난 수천만 년 동안 노간주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이깔나무 주목 등이 한반도의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침엽수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는 1만년 전에 있었던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를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다. 또한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환경조건과 산이 많은 지형조건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높았다. 오늘날도 1000여 종류의 나무들이 자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몇 천년 전의 이 땅은 온대활엽수 극상림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엽수림은 한반도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조상들 역시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숲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수렵채취의 떠돌이 생활을 버리고 한곳에 무리 지어 정착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농경지를 비옥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수단으로써 가축이나 사람의 배설물, 온돌 아궁이의 재, 농가 주변의 산에서 활엽수의 잎이나 풀을 썩혀서 만든 퇴비를 사용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숲을 괴롭힌 이와 같은 방법은 활엽수가 자라던 땅 힘을 차츰 악화시켰다. 이렇게 나빠진 토양은 활엽수가 자랄 수 없는 헐벗은 땅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나쁜 토양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들만이 활엽수들이 자라던 헐벗은 곳을 점차 차지하게 됐다.
다시 말해 농사에 필수적인 땅 힘을 지키고, 온돌 난방으로 추운 겨울을 넘긴 조상들의 농경문화가 농가 주변의 숲 모습을 낙엽활엽수림으로부터 점차 소나무 숲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노릇을 한 셈이다.

소나무가 농경문화의 산물이라는 흔적을 오늘날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을 주변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무성한 소나무 숲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골로 갈수록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사는 동네 주변에 자라는 소나무 숲이 사실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된 인간의 손길 때문에 지탱되어 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산림학자들은 마을 주변의 우리 소나무 숲을 인위적 극상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 솔숲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쓰면서 송편, 송화다식, 송기떡을 먹고살다가 이승을 하직할 때는 송판으로 만든 관에 묻혀서 뒷산 솔밭에 묻혔던 농사꾼 조상들의 삶을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일각을 다투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당산소나무를 향한 그 애틋한 정성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는 까닭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았다.

4. 안면도 솔숲

천년 소나무 왕국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는 이 없어도 씩씩한 기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궁궐의 대들보로, 군함의 조선재로 제몫을 다했던 영광의 세월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천년 왕국을 지키고 선 안면도의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렀다. 중부 서해안 지방에서 가장 혈통 좋은 소나무들이 살고 있는 곳. 단 한가지 수종, 소나무를 50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보호해온 조선왕조의 철저한 노력이 숨쉬는 곳. 안면도 솔숲을 설명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이다.

안면도 솔숲의 이런 명성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명성은 1000년 전의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지리서나 문물제도를 정리한 ‘증보문헌비고’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책에는 “고려조부터 안면곶에서 재목을 길러 궁실 건축용과 선박제조용 목재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안면도는 삼남지방의 세곡(稅穀) 운반을 보다 쉽게 하려고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뚫어 1713년 마침내 바닷길로 연결되면서 육지가 섬으로 변했다.

안면도의 솔숲이 고려왕조에 이어 조선왕조까지 그 진가를 계속 발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13세기 몽고군의 산림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던 행운도 한몫을 했다. 기록에는 변산반도와 나주의 천관산, 제주의 산림들이 일본징벌용 선박 제조에 무참히 베어질 때, 안면곶의 솔숲은 도끼 날을 피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목재는 이들 원목 중에서 기둥이나 대들보로 사용된 대부등(大不等)이다. 대부등은 길이 9m, 줄기쪽 직경 67㎝로 매우 큰 아름드리의 굵은 목재를 말한다. 나무높이 25m, 가슴둘레직경 80㎝나 되는 거대한 소나무를 잘라야 대부등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나무가 사용됐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의궤에는 수원성 축조에 원목 하나의 부피가 4㎥에 달하는 대부등 344주를 사용했으며, 이들은 모두 안면도에서 조달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년 전 안면도 솔숲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아름드리 굵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그 당시의 안면도를 상상하면 천년 소나무 왕국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을지 더욱 궁금해진다.

고려와 조선왕조가 이 땅의 수많은 소나무 산지 중에 유독 안면도의 소나무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업연구원의 배재수 박사는 수운(水運)의 편리함, 벌채하기 좋은 지세 그리고 소나무 생육에 좋은 환경을 꼽기도 한다. 하나의 무게가 1t이 넘는 대부등과 같은 무거운 물자를 수송하는 데는 육로보다는 강이나 바다의 물길이 훨씬 편리했다. 안면도는 최대 목재 수요처인 개경이나 한양과는 물길로 가까웠다.

또 섬 전체의 지형이 구릉지인 안면도는 나무를 베고 운반하기가 용이하며, 벌채된 목재는 물길을 이용하여 즉시 운반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 좋은 소나무들이 안면도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런 이점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천년 세월 동안 안면도를 소나무 국용재(國用材)의 주요 생산기지로 활용했던 셈이다.

조선왕조는 산림황폐로 결딴이 난 고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개국과 더불어 강력한 산림보호시책을 실시한다. 또 국용재인 소나무를 원활하게 충당하고자 소나무 벌채를 엄격히 금지한 송금(松禁)정책도 폈다. 조선왕조가 안면곶을 의송지지(宜松之地)로 지정하고 수군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던 송금정책은 1485년에 펴낸 ‘경국대전’에도 반영돼 있다.

‘경국대전’ 식재조(植栽條)에는 “안면곶과 변산반도는 해운판관이, 해도(海島)는 만호(萬戶)가 자세히 살피고”, “해마다 봄에 어린 소나무를 심거나 혹은 종자를 심어서 기르고, 연말에 심은 숫자를 왕에게 보고한다. 어긴 자는 산지기는 장(杖) 80, 당해관원은 장 60에 처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안면도의 소나무가 우량한 형질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지난 수백 년의 세월동안 꾸준히 가꾸고 지킨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성이 없었던 인접한 서해안 솔숲은 점차 훼손되어 불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988년 정부가 115㏊에 달하는 안면도 솔숲을 유전자 보전림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5. `한반도 제일松`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초입의 세 칸짜리 한옥은 소광리의 숨은 보물이었다. 비록 함석지붕을 이고 있을 망정, 우리 소나무를 아끼는 이들에게 이 한옥의 의미는 각별했다. 바로 소광리 소나무의 우수성을 증명이나 하듯 한 그루의 소나무만으로 지은 한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물난리는 이 한옥을 부숴버렸고, 그 자리엔 양옥이 들어섰다. 한반도 ‘제일의 소나무 숲’ 이란 수식어에 걸맞은 이 한옥의 파손현장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은 매우 컸다.

그러나 마을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은 삿갓재 초입을 지키고 선 500년 묵은 노송을 만났을 때 일순 사라졌다. 온갖 격랑을 다 이겨내고 오늘도 힘차게 자라는 그 모습에 감복했다. 그리고 이런 소나무를 길러준 산천에 감사 드리고 싶다. 소광리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500년생 소나무의 곧게 자란 당당한 모습과 어른 세 사람이 팔을 펼쳐도 안을 수 없는 굵은 줄기를 직접 대면하면 소나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단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황장목(黃腸木)에 얽힌 이 솔숲의 유래를 자세히 알게 되면 이런 깨달음은 우리 소나무에 대한 자부심으로 변한다. 이 땅에 자라는 1000여종의 나무 중에 재목으로 한몫을 다했던 것이 소나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 말이다. 황장목은 조선왕실의 목관 제작용 소나무를 말한다. 조선왕실은 초기부터 황장목을 확보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생전에 잘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도 후회없이 잘 보내드리는 양생송사(養生送死) 의식이 뿌리깊은 유교사회에서 관을 만드는 재목에 관심을 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황장목은 구체적으로 어떤 목재일까. 세종실록(1440년)에는 ‘천자의 곽은 황장(黃腸)으로 속을 하고,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라, 흰 갓재목은 습한 것을 견디지 못하여 속히 썩기 때문’이라고 황장목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실의 황장목 확보는 조선시대 산림정책의 중요한 과업이었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함께 질 좋은 황장목을 원활하게 조달하고, 일반 백성에 의한 도벌을 예방하고자 곳곳에 금산(禁山)을 지정했다. 이런 금산에는 자연석에 금표(禁標)를 새겨두어 나라에서 지정한 산림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소광리 소나무숲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이유는 장군터의 자연석에 새겨진 황장봉표(黃腸封標) 때문이다. 10여년 전에 발견된 이 표석에는 “황장봉계지명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사회 산직명길(黃腸封界地命 生達峴 安一王山 大里 堂城 四回 山直命吉):황장봉산의 경계지는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으로 정하고 산직 길에게 지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봉표는 소광리 일대의 소나무숲이 조선왕실이 지정한 황장목을 생산하던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이 내용은 김정호의 ‘대동지지’나 ‘동여도’의 내용과 합치한다.

학계에서는 소광리 솔숲을 ‘우리 소나무숲의 원형’이라며 특히 중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원주, 영월, 인제 등에서 황장금표를 발견했지만, 황장봉표를 발견한 곳은 소광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금표가 발견된 다른 지역의 소나무숲은 대부분 옛 모습을 잃었는데 비해 소광리 솔숲은 유전적으로 우량한 500년된 장령목들이 여전히 자라고 있으며, 그 재질 또한 우수하여 옛 소나무의 진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 문화일보 : 소나무를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