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년 사(史) [3]

paxlee 2007. 9. 6. 22:06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년사

 

    15개 루트 중 6개 루트에 도전, 5개 루트만 성공
    77년 9월15일 한국 초등 이후 07년 실버원정대에 이르기까지

남서벽…8개팀 도전, 1개팀만 등정

2007년 2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김해 플라잉점프 원정대는 김재수 대장과 9명이 등정하여 단일 팀 최다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상호, 윤치원, 김지우, 이성인, 고미영, 송귀화, 정재복, 윤삼준, 박경효 대원 등이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송귀화 대원은 58세로 한국 여성 최고령 등정자가 됐으며, 고미영 대원은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등반가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었다. 경남 양산의 이상배씨는 그동안 네 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섯 번째 원정대를 꾸려 등정에 성공했다.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을 등정하면서 히말라야의 8,000m급 거봉의 거벽등반시대를 연 영국은, 1975년 남서벽에 도전하여 더그 스코트와 듀갈 해스턴, 피터 보드만이 초등에 성공했다. 1953년의 남동릉 초등자인 힐라리는 영국팀 대원이었지만 국적이 뉴질랜드여서 이들이 영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기록됐다. 당시 영국 최고의 클라이머 18명과 33명의 셰르파, 국영방송인 BBC의 지원 등 108명이라는 대규모 원정대였다. 이 남서벽에서 한국은 8개팀이 등반하여 1개팀만 성공했다.

1985년 동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 루트에 도전한 박영배 대장과 8명의 원정대는 악천후와 물량 부족 등으로 7,500m 지점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1986년 12월에 재도전한 크로니산악회팀은 박영배 대장과 4명의 소수 정예 대원으로 조직됐다. 록밴드 8,300m 지점까지 고정 로프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C4에서 C5로 짐을 수송하던 셰르파가 고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결국 철수했다. 1988년 박영배 대장 외 전국 합동대 11명은 7,5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90년, 네 번째 도전장을 낸 박영배 대장의 합동대는 6명의 소규모 등반대였다. 이 팀은 스페인팀이 먼저 등반 중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루트를 개척해 나갔지만, 계속되는 악천후와 물자 부족 등으로 철수했다. 1991년 다섯 번째 한국 원정대가 조직됐다. 이강오 대장과 11명의 대원은 15일만에 세 번째 캠프지(6,950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C4 루트공작을 시도하던 박영석 대원이 강풍에 균형을 잃고 100여m를 추락하여 안면 골절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남선우 등반대장과 김진성 대원이 C5 지점에서 비박하며 등정을 시도했으나 악천후와 체력 소진 등으로 등반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93년 여섯 번째로 이 루트에 도전한 동국대 원정대는 이종량 대장과 7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이 팀은 악천후와 신설의 악조건을 뚫고 8,300m 지점에 있는 록밴드에 150m의 고정로프 작업까지 마쳤지만 등정에는 실패했다. 이 팀은 루트를 남동릉으로 변경해서 등정에 성공했지만 남서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남원우 대원이 남서벽을 단독으로 오르다가 추락사하여 에베레스트에서 세 번째 한국인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맞았다.

1995년 여섯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던 이 루트에 경남연맹팀의 김영태와 박정헌 대원이 두 명의 셰르파와 함께 한국 초등에 성공했다. 조형규 대장의 경남연맹팀은 16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등반대로 쿰부 빙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48일만에 한국 산악인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2007년 봄, 한국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서벽 신루트 개척을 목표로 박영석 대장과 6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악천후로 지연되던 등반은 오희준과 이현조 두 대원이 눈사태로 희생당하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캉슝 페이스…99년 한산팀 1개팀 도전

 

▲ 99년 한국산악회팀이 도전한 캉슝벽~남동릉루트.

 

캉슝 페이스는 에베레스트 동벽으로 1921년 제1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조지 말로리가 처음으로 정찰했다. 그는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협곡과 빙탑, 오버행의 거벽으로 된 이 루트를 정신 나간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루트라고 평한 바 있다. 1983년 미국팀은 등반 시작 40일만에 대원들간의 불화와 갈등, 부상을 딛고 카를로스 뷸러 등 6명의 대원이 초등에 성공했다.

1999년 에베레스트에서 최난 루트로 알려진 이 루트에 한국산악회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도전했다. 허영호 대장과 15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셰르파 없이 무산소와 신 루트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워낙 어렵고 위험한 대상지였고, 체력 소진과 예상치 못한 폭설 등으로 캠프1(6,450m)을 최고 도달지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서릉 유고 루트…89년 합동대 등정 발표

 

이 루트는 웨스턴쿰에서 로라와 웨스트숄더를 거쳐 서릉을 직등하는 것으로 1979년 유고의 안드레이 스트렘펠리와 제르네이 자폴로트릭에 의해 초등됐다. 김기혁 대장과 16명으로 구성된 한국 원정대는 1985년 동계에 처음으로 이 루트에 도전했으나 7,5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21일만에 후퇴했다. 1989년 전국합동 원정대는 한국산악회의 이석우 대장과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정상용 대원과 두 명의 셰르파가 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올랐고 다시 서릉으로 하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루트는 워낙 경사가 심해서 유고팀은 혼바인 쿨와르로 하산했고, 불가리아팀은 같은 루트로 하산하다 실족사했을 만큼 험난한 데다, 이 팀은 정상이라고 할만한 뚜렷한 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국내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릉…남릉~남동릉 루트로 한 차례 성공

 

1980년 폴란드의 안드레이 촉과 예지 쿠쿠츠카가 웨스턴쿰~사우스필라~남봉으로 이어지는 남릉 초등정에 성공했다. 1989년에는 마산 산악동지회팀이 처음으로 남릉~남동릉 루트를 통해 조광제 대원이 정상에 오르면서 에베레스트 국내 통산 네 번째 등정에 성공했다. 1991년 김광진 대장과 10명의 동국대 동계 원정대는 지봉산악회와 일본의 남서벽팀과 함께 C2까지 공동으로 루트를 만들어 나갔지만, 박영석 대원이 8,300m 지점까지 도달했다. 

 

세계적인 추세와 달리 등로주의의 대상에 머물러 있어

 

에베레스트는 더 이상 높이나 난이도를 추구하는 대상은 아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도전의 대상으로서 상징성이 강한 하나의 아이콘으로 남게 됐다. 그것은 에베레스트에 개척할 만한 초등 루트가 사라지면서 전문 산악인들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에베레스트에는 등반성의 추구보다 각종 모험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다. 스키 활강이라든가 패러글라이딩 활강, 부부 등정과 부자 등정, 16세 소년의 등정과 70세 노익장의 등정, 정상에서 텐트를 치고 21시간 체류, 맹인의 등정과 두 발이 없는 장애우의 등정, 그리고 한 해 한 해 단축되는 최단시간 등정기록 등이 그것들이다.

 

올해도 한 시즌에 셰르파를 포함해 500명 이상이 등정하는 최다 등정자 기록을 남길 정도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베레스트 초등 루트 15개 중에서 우리가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루트가 9개나 있고, 등정자를 낸 루트는 5개에 불과하다. 그것도 사우스콜과 노스콜 루트에 과도하게 몰려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아직도 에베레스트가 우리에게는 등로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글 호경필 한국산서회 회원 / 월간 산 [455호] 20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