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알프스에서 온 편지] 트렐레조 계곡 [1] *-

paxlee 2007. 9. 7. 21:50

 

             

  [알프스에서 온 편지] 트렐레조 계곡

‘나는 낭가파르밧을 당신의 말대로 공평한 수단으로 올랐다’
헤르만 불이 머메리에게 헌사한 <8000미터 위와 아래> 
       

           

            ▲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

 

헤르만 불(Hermann Buhl·1924-1958)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사진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젊은 청년에서 늙은 노인으로 변한 그의 모습은, 특히 한창 산의 세계에 빠져든 필자에게는 충격이었다. 히말라야 8,000m 봉우리를 초등하고서 그것도 단독으로 올라 극한의 지대에서 하룻밤 비박하며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 인간의 모습이 과연 저럴까 싶었던 것이다. 
8,000m 고지의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확보도 없이 꼿꼿이 선채 극한의 비박을 이겨낸 후, 입술이 부르트고 이마엔 수많은 주름살에 70세 노인의 모습보다 더했던 그의 표정은 어쩌면 그 하룻밤 사이에 알피니즘이란 화두를 완전히 깨친 위대한 알피니스트의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본다. 하여튼 그는 20세기, 아니 전 알피니즘사를 통틀어 영향력 있는 산악인에 속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 계곡 상단으로 오르자 7월 말인데도 잔설이 꽤나 남아 있었다.
7월 말에 접어들자 한국에서 알프스를 찾는 산악인들이 줄을 이었다. 이곳서 처음 만나는 이들이나 이미 알고 지내던 이들 모두 반가운 분들뿐이다. 이들과 어울려 나누는 산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은 게 없다. 당연히 혼자만의 시간이 줄게 되어, 심지어 지인들과 며칠 그린델발트 지역으로 떠난 산행에 바로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를 가져갔지만, 단 한 페이지도 넘겨보지 못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샤모니로 돌아온 다음날 배낭을 꾸렸다. 혼자만의 호젓한 산행을 하며 헤르만 불을 만나보기로.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샤모니를 떠난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으로 향하는 몽블랑 익스프레스 산간열차는 곧장 샤모니를 벗어나 계곡 위로 향했다. 곧이어 레프라(Les Praz) 마을을 지난다. 20대 중반의 헤르만 불이 맨 처음 샤모니에 왔을 때 머문 마을이다. 당시엔 그를 초청한 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ENSA)가 이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몽테 안부의 터널을 지난 열차는 르뷔에(Le Buet·1,303m)에 도착한다. 아담한 산촌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샤모니쪽과는 다르게 돌로 지은 샬레들을 지나 전나무숲으로 들어간다. 

 

코르보 고개 넘어 스위스 땅으로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 전나무숲에서 벗어나 베라르(Berard) 계곡 초입에 이른다. 수십 미터 높이의 폭포로 떨어지는 세찬 물줄기가 시원하다. 계속해서 계곡을 따라 오른다. 마치 설악산의 어느 계곡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편에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필자 앞을 걷는 일가족 다섯은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밀티유라는 작고 까만 알파인 열매를 따먹으며 걷고 있다. 밀티유의 새콤달콤한 맛에 침이 솟지만 갈 길이 멀다.
▲ 샤모니쪽과는 다르게 돌로 아름답게 지은 르뷔에 마을을 지나 오른편 계곡으로 오른다.
약 30분만에 계곡을 건너는 다리에 닿는다. 초등학생 열댓 명이 인솔교사와 함께 나무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필자 또한 배낭을 내려놓고 먹을 것을 뒤진다. 전날 볼더링을 하다 다친 이빨이며 혀 때문에 연한 빵을 먹는 필자에게는 질기고 단단한 바게트를 맛있게 물어뜯는 그들이 부럽다. 계곡을 건너 한동안 아래로 이어지던 오솔길은 방향을 급회전하여 숲길로 들어간다. 곧이어 나타난 숲속의 오두막 베란다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흔들의자에 누워 땅콩 같은 것을 열심히 주워 먹고 있다. 인간 배짱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 [좌]스위스의 에모송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어 르뷔에로 내려가고 있는 트레커들. [우]빙하에 씻긴 매끄러운 바위사면 위를 오르고 있다.
숲을 벗어난 양지바른 풀밭에선 노 부부가 점심을 준비하며 인사말을 건넨다. 모두 여유로운 노년의 모습들이다. 아마 헤르만 불이 생존해 있다면 저 분들 또래가 아닐까.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차츰 낮아지는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거슬러 오른다. 고도가 높지 않은 한낮이라 덥다. 30분쯤 오르자 급경사 바위사면이 나타난다. 오른편에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다. 조심해서 오르다 그만 오른쪽 팔꿈치를 찧고 만다. 이를 악물며 바로 이 100m 높이의 바위구간을 올라 한숨을 내쉰다.
이어 나타난 야생화 밭에는 먼저 오른 트레커 셋이 쉬고 있다. 나이든 아버지와 큰딸, 그리고 아들은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필자 또한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마신다. 그들보다 먼저 출발한 필자는 깊어지는 계곡의 오른쪽 사면을 오르내리며 걷는다. 트레커 둘이 내려오며 필자를 반긴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스위스의 에모송(Emosson) 댐을 출발해 국경인 코르보 고개(Col des Corbeaux·2,602m)를 넘어 내려온다고 한다. 좀 더 오르니 길이 평탄해지고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뒤따르는 일가족 셋을 기다려 카메라에 담는다. 이제부터 그들 뒤를 따르며 오른다. 차츰 고도를 높이고 계곡 깊숙이 들어가자 7월 말인데도 잔설이 꽤나 남아 있다.
▲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인 코르보 고개 정상.
또다시 급사면이 이어져 한동안 땀 흘리며 오른다. 이윽고 일명 ‘물의 계곡’인 트렐레조 계곡(Val de Tre les Eaux) 상단부다. 큰 바위 언덕의 표면이 빙하에 씻겨 매끈매끈하다. 전망 좋은 작은 언덕 하나를 골라 바위 위에 자리를 잡는다. 약 5시간 소요되었다. 이제껏 함께 오른 일가족 셋이 코르보 고개로 오르는 모습을 보며 텐트를 친다. 곧 정적이 감돈다. 오랜만에 맛보는 호젓함이 좋다. 이제부터 <8000미터 위와 아래>를 펼쳐들 시간이다.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 / 월간 산 [455호] 20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