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새벽에 칸지로와의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세팅한다.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상회하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해가 뜨면 철수해야 한다. 이 자리에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이 없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는 촬영을 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칸지로와산맥에 한 줄기 황금 햇살이 와서 닿는다. 그 황금빛은 산아래로 천천히 내달리며 칸지로와를 물들이다 어느 순간 천지 간에 확 퍼진다. 그 순간 내 가슴도 확 달아오른다.
돌아가는 길이 예상외로 미끄럽고 위험하다. 어제 어떻게 올라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난코스다. 말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갈팡질팡한다. 스태프 여러 명이 달려들어 절벽으로 떨어질 뻔한 말을 간신히 수습해 내려간다. 겨우 눈 있는 지역에서 벗어나자 말들이 신이 나서 뛴다. 녀석들도 어지간히 가슴을 졸였나 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미끄러운 길을 내려오느라 긴장했던 스태프들도 이제 한숨을 돌린다.
어제 야영했던 야크 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다사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어 까그마라를 왜 못 넘었는가 관심을 표한다. 가슴까지 눈이 쌓였다고 제스처를 취하자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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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마마을을 지나는데 반대편에서 수십 마리의 야크 떼가 몰려온다. 살당마을을 출발해 까그라마를 넘어 겨울 캠프지로 이동해 가는 사람들이다. 앞장선 대장 야크는 머리에 빨간 깃털을 달고 보무도 당당하다. 까그마라에 눈이 많아서 못 넘고 돌아왔다고 전하자 걱정하는 눈치다.
폐허가 된 군인 주둔지에 다다르자 야크 떼가 족히 수백 마리는 넘어 보인다. 살당에서 출발했다는 유목민 예닐곱 가구가 야영을 준비하고 있다. 저녁으로 짬빠빵(보리빵)을 굽기에 조금 얻어 먹어보니 맛이 구수하고 담백하다. 살당은 작년에 방문했던 마을이다. 살당 사람들이라고 하니 왠지 더 정감이 간다.
그들과 작별하고 내려가는데 계곡 옆에서 두 가족이 야영을 한다. 야크 고기를 잘라 손질 중이다. 그 중 술에 취한 노인이 작년에 살당에서 나를 본 적이 있다며 반가워한다. 그냥 힐끗 스쳤던 인연인데도 그렇게 반가워한다.
그들에게서 야크 다리 하나를 사서 렌지마을로 갔다. 오랜만에 저녁으로 야크 불고기와 야크 사골국으로 포식을 했다. 한결 기운이 난다. 까그라마 앞에서 돌아선 아쉬움은 있지만 살당 사람들과 만나 가슴이 훈훈하다. 그들과 나눈 정감이 내내 여운으로 남는다.
2009년 11월 17일. 산을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올라갈 때는 긴장되면서 들뜨기 쉬운 반면 내려갈 때는 마음이 풀어지고 한결 여유로워진다. 오르는 길은 힘들고 내려가는 길은 수월해서 그럴 수 있다.
- ▲ 마을 공터에 나란히 선 네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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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있다. 풍경을 올려다볼 때는 위압감을 느끼지만 내려다볼 때는 편안함을 느낀다. 사물과의 교감도 한몫한다. 계곡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음보다 물과 함께 내려가는 마음이 가볍다.
올라올 때는 비가 왔는데 내려갈 때는 날씨가 화창하다. 기분마저 산뜻하다. 풍경이 밝아 보이고, 작은 돌 하나하나까지 새롭게 다가온다. 일정엔 차질이 생겼지만 예상외의 소득을 얻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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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비슷한 물고기 잡아 매운탕
거센 계곡물은 거대한 바위들을 깎아 신비로운 형상으로 조각해 놓았다.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이 어떤 방향에서 어떤 세기로 부딪쳐 갔는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수만 년을 서로 부딪치며 다퉜을 것이다. 그 용쟁호투의 전투에 어지간한 고목과 바위들은 배겨내질 못하고 떠내려갔다.
그런데 바위 정수리에 오롯하게 뿌리를 내린 작은 나무가 보인다. 그 생명력이 놀랍다. 육중한 고목을 뿌리째 뽑고 바위를 쓸어버린 물의 입장에서 보면 맥이 빠질 노릇이다. 작은 나무에서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숙연해진다.
첵파마을 근처에 오자 많은 야크와 양, 말들이 웅성거린다. 역시 살당마을에서 온 여러 가족이 야영하고 있다. 누마라고개와 박아라고개를 넘을 예정이었으나 눈이 많이 쌓여 포기하고, 쉬운 길인 두나이를 거쳐 도타랍마을까지 갈 계획이란다.
- ▲ 급류로 흐르고 있는 폭순도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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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유목생활을 한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다가 추수를 마치는 11월에는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해 겨울을 난다. 5,000m급 고개를 여러 개 넘어야 하는 힘든 이동이다. 이들은 그런 고된 이동을 해마다 반복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첵파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슈리갈마을로 향했다. 마을 근처에 다다랐을 때 길고 무거운 목재를 메고 가는 현지인 부부를 만났다. 여기는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 힘든 삶이다. 부인을 대신해 스태프가 나무를 메고 마을까지 날라다 주자 고마워한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폭순도내셔널파크 사무실 근처의 야영지에 도착했다. 근처 산중턱의 절벽에서 산양 한 마리가 유심히 우리를 지켜본다. 분명히 사오 일 전에 지나간 사람들인데 왜 돌아왔을까 궁금한 표정이다.
- ▲ 두나이 마을 입구에 있는 거대한 초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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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8일. 새벽 6시쯤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고 텐트를 나선다. 내가 움직여야 스태프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때문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어두컴컴한 시간인데도 짐을 잔뜩 지고 폭순도 계곡 쪽으로 올라가는 현지인들이 보인다.
아침을 먹고 줌라로 향한다. 스태프들을 먼저 보내놓고 나는 카메라팀과 잠시 두나이에 다녀오기로 했다. 두나이는 근동에서 제일 큰 산간마을로 교통과 생활물자의 거점이다. 중국에서 생산된 공산품이 티베트, 돌포를 거쳐 두나이로 몰려든다. 농산물의 거래도 활발하다.
두나이로 가는 길에 드물게 큰 초르텐이 있어 살펴보았다. 천장에는 별·사각형 등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고, 벽에는 붓다의 일생을 탱화로 표현해놓았다. 국왕 부처의 초상화도 있는데 다소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얼마쯤 더 가다가 결국 두나이 방문은 포기했다. 현지인에게 알아보니 왕복 3시간 정도는 걸린단다. 그렇게 되면 먼저 출발한 스태프들과의 합류가 어려워진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 ▲ 거대한 초르텐 천장과 벽에 그려진 문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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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후에 주팔공항 아래 강가에서 스태프들과 합류했다. 한 스태프가 근처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한 마리 사와 매운탕을 끓인다. 크기는 20cm 정도로 외양은 숭어 비슷하다. 맛은 비린내가 없고 담백해서 복어와 흡사하다.
슈파니마을 근처를 지난다. 양지바른 밭두렁에서 현지 여인이 바느질을 한다. 이 마을은 수량이 풍부한 강가에 위치하며 농토가 넓다. 물레방아가 여럿 보인다. 그동안 지나온 다른 마을은 추수가 끝나 대부분의 밭이 텅 비어 있는데 슈파니마을만은 보리들이 파릇파릇하다. 고도가 낮아 그만큼 기후가 따뜻하다.
1시간을 더 걸어 트리푸라고트마을에 도착해 마을 꼭대기에 있는 힌두사원 아래에 캠프를 쳤다. 사원은 3층 정도의 직사각형 벽돌 건물로 지붕은 이단 탑 형태이며 끝이 뾰족하다. 높은 장대 끝에서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긴 천이 바람에 펄럭이는데, 벽사의 의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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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간격으로 종소리가 울린다. 외지인의 방문을 눈치 채고 아이들이 계속 몰려와 호기심을 보인다. 황금빛 저녁 노을 아래에서 춤추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 잠시 후 텐트 앞에서 거친 맹수들의 포효가 들려온다. 살쾡이들이다. 야크 고기 냄새를 맡고 몰려와 고기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이다. 스태프들이 고함을 치자 녀석들이 놀라 물러간다. 살쾡이도 텃세를 부리는가.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 글·사진 조진수 사진작가 / 월간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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