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자전거로 즐기는 천년길 한 바퀴 *-

paxlee 2010. 11. 16. 21:45

 

늦가을을 옆구리에 끼고… 느릿느릿 천년길 한 바퀴

자전거로 즐기는 경북 상주
'둥시곶감 계곡' 너머, 수줍게 숨은 남장사(南長寺)

경북 상주는 예부터 뭍과 물이 만나는 교통 도시였다. 북쪽 문경에서 갈라진 산맥은 상주에서 넓게 벌어지며 평야를 형성했다. 강원도 태백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상주에서 비로소 강다운 모습으로 흐른다. 문경새재·하늘재 등으로 유입된 북방의 문물은 상주에서 낙동강을 타고 남쪽으로 퍼졌다. 영남의 교통 중심지로 번성했던 상주는 근대에 들어와 차도, 기차도 아닌 다른 교통수단으로 도시 이미지를 구축했다.

바로 자전거다. 상주는 1인당 자전거 보유 수가 0.6대에 이른다. 자전거의 교통수단 분담률은 21%를 자랑한다. 모두 전국 최고 기록이다. 50m마다 늘어선 자전거 거치대와 상점 앞에 제멋대로 선 자전거들, 아침에 치마 입은 여고생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은 상주를 설명하는 주요 풍경이다. 상주에서 자전거가 대중화된 연원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제시대 때 상주 부농(富農)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던 것이 시작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다.

최근 상주는 자전거 도시 이미지 굳히기에 나섰다. 남장마을에 있던 자전거 박물관을 낙동강 인근으로 옮겨 새로 개관했고 'MRF' 길을 조성했다. 산(Mountain)과 강(River)과 들(Field)의 앞글자를 딴 이 길은, 평온하고도 한적한 가을 풍경을 선보인다. 남장마을은 곶감 마르는 냄새로 향기롭고 그 뒤로 단풍이 은은하게 깊어간다. 그러하니 상주에선 걸음을 멈출 일이다. 자전거로 길을 달리며 늦가을을 감상할 일이다.

늦가을, 상주의 단풍은 은은히 깊어간다. 자전거로 달리는 상주의 길 끝에선 곶감의 달큼한 향이 기다린다.
남장마을의 늦가을은 연중 제일 바쁜때다. 감타래에 걸린 감은 50~60일 이후에 단맛 가득 품은 곶감으로 변한다.
상주시청에서 자전거를 빌려 길을 나섰다. MRF 길은 총 13코스이다. 이 중 이날 나선 길은 제11코스인 천년길이다. 북천시민공원에서 출발해 북천을 따라 달리다 노악산을 끼고 돈다. 이 길 위엔 이태백이 그려진 남장사가 있고, 임란북천전적지가 있으며, 무엇보다 곶감마을 남장동을 품고 있다.

북천시민공원에서 자전거는 북천 따라 서쪽을 향한다. 제일 먼저 맞는 건 임란북천전적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병 1만7000명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지휘 하에 상주까지 12일 만에 북진했다. 당시 조선군 900여명이 왜병에 대적했으나 모두 순국했다. 이후 왜병은 무인지경의 문경새재를 지나 거침없이 한양으로 진격했다.

4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임란북천전적지는 전쟁의 흔적 없이 평화롭다. 단정한 조선시대 건물이 북천 너머 남쪽으로 상주 시내를 굽어볼 뿐이다. 임란북천전적지를 지나며 길은 시내를 벗어나 한가로운 풍경으로 접어든다. 속리산에서 발원해 상주를 감싸 흐르는 북천이 속 깊은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이 즈음이다. 맑게 흐르며 제 옆 작은 산등성이 단풍을 은은하게 비춰내던 북천은 어느 순간 무성한 갈대밭을 가득 펼쳐낸다. 산이 넓게 물러난 자리엔 추수 끝낸 논이 여유롭다. 이 풍경, 번잡한 마음을 풀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 풍경의 끝에서 말라가는 감의 달큼한 향이 바람에 실린다. 상주 곶감의 명성을 이어온 마을, 남장동이 계곡 사이로 펼쳐진다. 마을 내로 들어서자 새빨간 감이 감타래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감타래 아래에선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감 껍질을 벗겨내는 중이다.

남장의 늦가을은 1년 중 가장 바쁜 때다. 1년간 부피를 키운 감을 따내 껍질을 벗기고 말리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상주 감은 둥시다. 생김새가 둥글다고 해서 둥시라 한다. 떫은맛을 단맛으로 바꾸기 위해 상주에선 50∼60일간 감을 말린다. 말린 곶감은 원래 감보다 2배 이상의 당도를 가진다.

곶감마을 남장동에서 대부분의 감은 현재 감타래에서 단맛을 농축해가고 있으나, 몇몇 감나무는 여전히 많은 감을 매달고 있다. 풍요로워 보이지만 사실, 그 감은 불운하다. 때 이른 10월 말 서리로 채 익기 전에 얼어 의미가 없어진 감이다.

북천에서 평탄했던 길은 남장동을 지나 북쪽으로 치고 오른다. 페달을 밟는 발이 무겁다. 산의 안쪽을 향한 길이다.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걷는다. 그 길의 정상 부근에 신라 때 창건된 고찰 남장사(南長寺)가 있다. 남장사의 가을은 경북 8경 중 하나다. 여기서 모든 풍경은 시각을 자극하지 않고 은은하다. 단풍 역시 지나치게 빨갛거나 노란 대신 수줍게 물들어 배경으로 자신을 낮춘다. 남장사는 그 안에 액자 형식으로 자리잡아, 드는 길 또한 적요하다.

남장사는 흥미롭다. 먼저 목각탱. 보통 불상 뒤에 거는 탱화는 종이나 비단에 그림으로 그린다. 이 절은 넓적한 나무로 불상을 깎아 뒤에 세웠다. 둘째로 이태백. 극락보전 내부 포벽에, 술에 취한 듯 얼굴 불콰한 노인네가 물고기를 타고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노인네 앞엔 술병이 놓여 있고 멀리, 하얀 달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림 여백에 '李白騎鯨上天(이백기경상천)'이라 쓰여 있다. 이태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림 속 고래는 고래라기보다 잉어를 닮았다. 부처의 공간에 느닷없는 이태백을 그린 이 그림은 그저 수수께끼다.

남장사를 기점으로 자전거는 내리막길 따라 속도를 올린다. 오르는 길에 맺힌 땀을 시원한 바람으로 씻어낸다. 산기슭 연원마을 지나 북천시민공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쉽다. 모든 것이 광속(光速)으로 달리는 이 시대에, 상주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 시간의 동력(動力)은 페달을 밟은 근육이고 힘이다. 동력이 아니면서 걷는 것 보다 빠른 자전거를 타고 천년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그 맛은 걷는 맛의 배가 된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덕암산 임도.
터프가이를 위한 '초원길'… 요조숙녀는 '속리산 드라이브' 

 

자전거로 평탄한 길을 달리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거나 혹은 그것도 힘들다는 당신, 대안이 있다. 먼저 산악자전거(MTB) 타기를 즐긴다면 낙동강변 '초원길'을 추천한다. 출발지는 최근 경천대 인근으로 옮겨 새로 문을 연 자전거박물관. 바로 앞 경천교를 넘어 덕암산을 오른다. 덕암산은 해발 331.1m로 높지 않고 긴 능선을 지니고 있다. 해서 덕암산은 봉우리로 수렴하는 보통 산과 달리 사다리꼴 형세다.

최근 활공장을 개설하며 길이 뚫린 덕암산 정상은 막힘 없는 시야를 선사한다. 상주에서 비로소 강의 형세를 갖춘 낙동강이 파행하며 바싹 엎드린 산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이 또렷하다. 맑은 날이면 평야에 옹기종기 모인 마을 너머 상주의 서쪽을 관통하는 백두대간이 첩첩이 보인다.

덕암산 정상에서 정자 방향으로 길을 내리면 예천군 풍양면 효갈리에 닿는다. 낙동강 상풍교를 지나 매협제방을 거쳐 경천대로 간다. 경천대는 1300리 낙동강 물길 중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곳. 다만 최근에는 4대강 사업으로 풍경이 어수선하다. 벼랑 끝 거침없이 솟은 암봉을 움켜쥐고 가지를 뻗은 소나무는 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자전거 대신 드라이브로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면 상주의 서북쪽, 속리산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장각폭포에서 시작해 택리지에 이상향의 땅으로 나온다는 우복동과 회란석을 보고 돌아 나와 충북 괴산으로 빠지는 길이다.

장각폭포 위에 세운 정자 금란정은 역사도 짧고 규모도 작되, 그 소박한 풍경으로도 어떻게 한유(閑遊)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속리산 자락의 사모봉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폭포로 향하기 전 이끼 낀 바위 사이에 고이며 순간 숨을 돌린다. 정자는 물길이 쉬었다 가는 자리와 폭포로 떨어지는 청량한 소리를 동시에 굽어본다.

장각폭포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복동이다. 본래 화북면 용현리지만, 마을 사람들은 우복동이라는 지명을 선호한다. 이곳은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하나로 기록한 곳이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길지 중 길지라 썼던 곳이다. 큰 산 사이임에도 우복동에서 볕이 환하다. 우복동 초입 동천암(洞天巖)도 눈여겨볼 만하다. 초서에 능했던 양사언이 새겼다는 글이 있다.

우복동에서 용유계곡 방향으로 향하면 이내 경북 문경인데 거기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바로 회란석이다. 계곡 물길이 우윳빛 바위 위에 곡선으로 조형한 모습이 일품. 늑천정가든 맞은편 계곡에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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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글·김우성 기자  /사진·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