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상주 MRF이야기길ㅣ제3코스] 아자개성길 *-

paxlee 2011. 1. 19. 16:58

 

            [상주 MRF이야기길ㅣ제3코스] 아자개성길 르포

왕의 아비가 된 농부의 산으로 가는 길
자전거박물관~도남서원~아자개성~비봉산~자전거박물관 20.4km

 “크르릉”하고 삼킬 듯 덤프트럭이 지난다. 산길, 강길, 들길 중에서 강길이 공사 중이다. 도로를 따르다 흙길로 접어든다. 강변의 흙길이다. 2011년 연말에 낙동강 공사가 마무리되면 둔치는 생태공원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땅을 다지고 가로수를 조성해 지면이 부드럽다. 포장길과 흙길을 번가르다 규모 있는 기와집을 만난다. 도남서원이다. 1606년 선조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몽주·김굉필·이황 등 아홉 선생을 모시고 있다. 서원의 정자에 오르니 흐르는 강과 산이 고전적인 경치로 다가온다. 

 MRF 이야기길을 기획한 상주시청 문화관광과 전병순(53) 계장과 상주의 등산인들이 모인 곳은 경천대가 아닌 자전거박물관 앞이다. 아자개성길은 원래 경천대가 출발지로 되어 있으나 23km로 코스가 길다 보니 고육지책으로 자전거박물관에서 출발해 3km를 줄인다는 계획이다. 전 계장은 “경천대에서 자전거박물관까지는 낙동강길이나 초원길과 중복되는 구간이라 뺐다”고 한다. 열댓 명쯤 모였다. 경천교 앞에 커다란 지도가 있다. 걷기 코스 안내도가 아닌 낙동강 살리기 사업계획 안내도다. 옆에 MRF 이정표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직진한다.

강길은 공사로 땅을 다져놓아 막히는 곳 없이 시선이 열려 있다. 강 앞에 선 거대한 기둥, 상주보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뉴스에서나 봐왔던 4대강 공사현장 한가운데를 걷는다. 갈 길이 멀어서인지 감흥보다는 빨리 지나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거대한 토목공사 현장을 지나 숲으로 드니 삼덕양수장이다. 강과 잘 어울리는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스케일이 달라서인지 이젠 쓰러져 가는 구멍가게 같다. 한동안 걷기 편한 오솔길을 여유로이 거닌다. 이정표가 없는 곳엔 전봇대에 파란 페인트로 화살표를 그려놓았다. 소나무숲 지나, 무덤 지나, 밭 지나 아스팔트길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세운 제방 위의 도로다. 고갯마루에서 농로를 택하지 않고 묘가 있는 왼쪽 능선의 산길을 밟아 도남제방의 아스팔트길에 닿았다.

낙동강 살리기 현장을 지나는 역동의 걷기 코스

길 옆으로 사막이 흐른다. 넓은 모래 둔치는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이다. 빠른 걸음으로 닿은 삼거리는 병성교 앞이다. 다리 위에서 본 낙동강은 수수하다. 자연스러운 모래밭인데도 고운 결을 가지고 있어, 마치 거대한 삽으로 일부러 다져놓은 것 같다. 초록빛 밭이 단정한 선을 그리며 자리를 잡은 가운데로 여린 물결이 흐른다.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 모르게 조용히 떠나간다. 지극히 예의를 갖춘 이별 방식. 헤어지는 와중에도 그대를 배려하는 속 깊은 강물은 아름답고 슬프다.

다리를 건너자 MRF 이정표가 왼쪽 병성마을로 가라 한다. 전설 몇 개는 품고 있을 것 같은 왕버드나무가 마을 입구에서 객들의 기선을 제압한다. 마을회관 앞은 산행이 시작되기 전 전열을 가다듬는 곳이다. 너른 터에 정자와 벤치, 화장실이 있어 열 명이 넘는 일행을 가볍게 받아들인다. 마을 골목을 지난다. 미로 같지만 걸음을 늦추고 차분한 눈길로 살피면 길이 나뉘는 곳마다 파란 페인트의 화살표가 있다.   

산 입구에는 고분안내판이 있다. 상주 병풍산 고분군은 사벌국의 왕릉이다. 사벌국은 삼국시대 초기의 작은 나라다. 청동유물이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 기원 전후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신라에 패망해 병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낯선 이름의 잊혀진 왕국이다. 잊혀진 왕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뭔가 미스터리한 낭만이 있을 것 같지만, 없다. 시골 야산이다. 12월의 눈 없는 야산은 말라비틀어진 낙엽과 뼈만 남은 가지들로 너저분하다. 산은 가을 잔치가 끝나 손님이 돌아간 잔칫집이다. 남편이나 시누이할 것 없이 뻗어버리고 며느리 혼자 남아 젖먹이 업고 눈물 한 방울 그릇 하나 삼키는 잔치가 끝난 집 마당이다.  

▲ 1 낙동강 둑길을 걷는다. 아자개성길은 낙동강 살리기 공사현장과 아자개성을 지나는 역동의 걷기 코스다. 2 낙동강변을 걷는다. 사막처럼 넓은 모래벌판이 펼쳐진다. 3 1606년 선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도남서원 앞을 지난다.<보물찾기 사고 참조. 위치ID:GKOOEH#보물찾기>

만만히 볼 수 없는 도전의 길

아스팔트길을 걸었기에 오르막이라도 감지덕지다. 볕을 가려주는 숲의 소중함도 피부로 느낀다. 1km를 달콤하게 올라서자 성벽 같은 능선 위다. 낙동강, 모래평야, 산, 밭, 마을이 차곡차곡 맞대고 살아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300m 겨우 넘는 높이지만 강을 끼고 있어 방어하기 좋은 산세다. 병풍산성은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성이다. 그는 원래 농사꾼이었으나 당시 혼란기에 각지에서 지방세력이 들고 일어나자, 885~887년에 상주에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고 아자개성을 본거지로 했다. 그는 꽤 특이한 행보를 보였는데 아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후에도 상주에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며 말미에는 고려에 망명했다. 그래서인지 아자개와 견훤 사이는 친부모 자식 간이 아니라는 것부터 여러 설이 있다. 

농사꾼이 장군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난관을 거쳐 밑바닥부터 올라 이룬 자리였기에 아들에게조차 귀의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농사꾼에게 땅은 그냥 땅이 아니다. 지금처럼 먹을거리가 풍족한 시절도 아니었으니 땅은 곧 목숨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조차 스스로 일군 땅을 넘기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들 견훤에게 귀속된다는 건 농부가 논밭을 팔고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성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다. 성터에 도착하면 좌측의 성곽로를 따라서 올라가야만 한다. 성의 정상부가 능선 꼭대기다. 작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전병순 계장은 “망루 역할을 했던 바위가 아니겠냐”며 “여기선 아자개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푸른 하늘을 찢을 듯 가르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울린다.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이어서 일행 간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다. 전 계장은 “전투기 사격장이 있어 그렇다”며 “저 산 위에서 하강을 시작해서, 저기서 폭격하고 다시 올라간다”며 비행기 길을 줄줄 외운다. 능선에는 기차바위도 있고, 정월 대보름날 달집을 태우던 달바위도 있다. 능선은 강과 나란히 달린다.

아자개바위를 지나며 마루금은 하강곡선이다. 몸을 산에 맞춰 리듬을 따른다. 오른쪽 골짜기는 성골이다. 아자개성이 있던 골짜기라 성골이다. 가을을 떠나보내지 못한 억새의 환영을 받으며 좁은 능선길을 내려선다. 가파르게 내려서다 다시 완만하게 리듬을 바꾼다. 청바지 입은 아가씨가 올라도 힘들다고 투정부릴 염려 없는 순한 산등성이다. 배수로 아래를 지나 임도를 가로질러 가니 낙동강과 만나는 강창교다. 드넓은 모래사장은 덤프트럭이 모래를 퍼 나르느라 쉴 새 없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과 걷는 사람들이 낙동강을 지난다.

강창교는 상주 시내와 중동을 연결하는 잠수교다. 장마철 수위가 높을 때는 통제한다. 다리를 건너니 중동 제방이다. 낙동강 투어로드 안내판이 있는 상주보까지 3km다. 공사장 입구에 선 인부가 마을로 우회할 것을 권한다. 상주시청 전병순 계장이 적당히 얘기하고 통과한다. 제방을 걷는 건 모래가 깔린 학교 운동장을 끝없이 걷는 분위기다. 흙으로 다져진 긴 길이 아스라이 작게 보이는 저 끝까지 이어져 있다. 간간이 차가 지나지만 불편하진 않다. 불편한 건 뙤약볕과 같은 풍경의 지루함이다. 그러나 낙동강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공부다. 변화하는 낙동강을 볼 수 있는 시기는 지금뿐이라고 전 계장은 얘기한다.

상주보 공사장 가까이 오자 투어로드 안내판과 화장실, 주차장이 있는 쉼터다. 15km를 걸었더니 일행은 노곤해하거나 일부는 차를 타고 되돌아갔다. MRF 이야기길이 평지가 많다고 해도 하루에 20km를 간다는 건 쉽지 않다. 이제 즐기는 분위기는 아니다. 쉽지 않은 완주에 도전하는 겸허한 자세다. 처음엔 산행이 아니라고 만만히 생각하지만 15km가 지나면 여기저기 쑤시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걷기의 어려움을 체험한다.

다시 산이다. 상주시에서 황토임도를 깔아 오르막이라도 힘들지 않다. 비봉산, 231m로 낮지만 경치의 즐거움은 깊다. 전망 좋은 곳은 데크를 만들어 깔끔하게 정비했다. MRF 길은 정상을 300m 남기고 사면길로 인도한다. 청룡사로 이어진 길에 보석 같은 전망대를 만난다. 오후의 햇살은 멀리 아자개산성이 있는 병풍산을 검은 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발아래 낭떠러지가 낙동강이다. 강은 넓고 길어 비현실적이다. 멈춰 있는 그림 같다. 작은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는 넓은 품을 가졌다. 200m대 산에서 막힘없는 경치를 맛볼 수 있는 건 상주 땅이 그만큼 전체적으로 평평하다는 뜻이다. 전병순 계장은 그래서 “상주는 자전거 타기 좋은 천혜의 고장”이라 자랑한다.

청룡사가 반갑다. 멋진 문화재나 풍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 냄새나는 절간이 반갑다. 온종일 거침없는 시선을 누려, 작고 소박한 것이 그리웠나보다. 임도를 따르다 이정표가 손짓하는 산길을 내려간다. 사과나무들과 임도가 산길이 끝났다고 얘기한다. 저 앞에 초가집 몇 채가 보인다. 드라마 상도 촬영장이다. 인가 없는 강가에 있는 것이 쓸쓸해 뵌다. 세트장을 관리하는 어르신이 반가운 듯 나와 인기척을 한다. “사람들 많이 오나요?”하고 묻자 “안 와요”하고 솔직하게 답한다. 웃음이 터진다. 옛날 초가집이 쓸쓸하게 작은 마을을 이뤘다. 걷기의 끝을 알리는 강창교를 건넌다. 자전거 타는 모습의 조형물을 설치해 다리에 개성을 주었다. 낙동강과 두 개 산을 돌아 완주했다는 만족감에 일행의 표정이 환하다. 먼 길 가는 낙동강을 눈으로 배웅한다. 

 

▶아자개성길 (총 20.4km, 6시간 소요)

자전거박물관~(1.8km, 30분)~도남서원~(1.5km, 20분)~삼덕양수장~(2.2km, 30분)~병성교~(2.3km, 60분) ~아자개산성 정상~(3.2km, 60분)~강창교~(3.8km, 60분)~투어로드 안내판~(2.5km, 40분)~청룡사~(3km, 60분)~자전거박물관


아자개성길은 원래 경천대에서 출발하는 게 원래 코스다. 그러나 23km가 넘을 만큼 길어 원점회귀와 주차가 편하도록 자전거박물관을 기점으로 돌기도 한다. 길찾기는 지도를 보고 강변과 다리, 산성 등 큰 선을 따르면 어렵지 않다. 반면 코스를 머릿속에 미리 넣어두지 않으면 눈앞에 보이는 이정표 찾기에만 급급하다가 당황해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다. 게다가 낙동강 제방 길은 4대강 공사가 2011년 연말까지 잡혀 있어 지도에 표시된 길은 조금씩 바뀔 수 있다. 강창교 건너 낙동강 제방 길 입구에서 공사 관계자가 제지할 경우 직진해 마을길로 우회하면 된다. 병풍산과 비슬산 모두 완만한 편이라 오르기 어렵지 않으나 20km가 넘는 장거리이므로 초보자들이 완주하기는 쉽지 않다. 아자개성길은 산등성이 몇 곳을 제외하면 MTB 자전거로 갈 수도 있다. 

병풍산성(아자개성)

병성동과 성골 사이에 있는 사벌국 고성이다. 낙동강변의 병풍산 두 봉우리를 이은 포곡식 토석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1,770m다. 상주의 역사지인 상산지 고적조에는 병풍산성은 사벌왕이 쌓은 것이며 성안에 못 한 곳과 우물 세 곳이 있고, 성의 동쪽 밖으로는 백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어서 성안의 물이 마르면 수차로 강물을 끌어올렸다 한다. <고려사>에서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 성에 머물다가 918년 왕건에게 귀순했다고 한다. 병풍산성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모든 능선에 대형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 글 신준범 기자  / 사진 김영선 객원기자 / 월간 산 1월호 -